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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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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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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1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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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4. 고통을 먹는 자 (26)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26.

위즈는 잇페인의 수작에서 벗어날 방법을 물었다. 핏스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저항하지 못한다.』

예전의 핏스톤은 witch의 가호까지 받고 있었음에도, 결국 잇페인의 꼬임에 넘어갔다.

당시 잇페인의 수법은-상대의 처지를 공감해주며 호감을 산 뒤, 엉뚱한 해결방법을 제시해 몰락하게 하는 것이었다.

핏스톤의 주인인 witch는, 동생에게 배신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 그 뒤로 핏스톤은 주인을 잃게 될까봐 노심초사했다. witch가 일을 당했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때 잇페인은 넌지시 한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당신의 주인은 세상에 적이 많으니, 그 적에게서 보호해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어떻겠느냐고.

하지만 세상에 주인보다 강한 펫이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핏스톤의 주인인 witch는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었다.

잇페인은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마계의 주민인 핏스톤의 특성을 살려, 엄청난 두께의 암석으로 무장하는 것. 그렇게 한다면 witch를 지킬 든든한 방패가 될 수 있다고. 그 후 핏스톤은 주인의 마력을 섭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고철과 녹슨 칼, 그리고 정련조차 하지 않은 철광석을 마구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핏스톤의 몸은 산으로 착각할 만큼 커져갔다.

그리고 드디어 항마전쟁이 터졌다.

핏스톤은 주인과 함께 출전했다. 그리고……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족과 인간들을 함께 쓸어버렸다. 뒤늦게 witch는 핏스톤이 다른 이의 조종을 받고 있음을 알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뒤였다.

많은 이들이 책임을 물으며 핏스톤의 처단을 원했다. 핏스톤의 입장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witch의 손에 죽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witch는 핏스톤을 살리려 했다. 그래서 거래를 했다.

그녀는 혼자서 무모하게 마족들의 거점들을 타격했고, 마족에 대항하는 군세는 숨통을 틔웠다. witch의 부상투혼을 지켜본 이들은, 핏스톤을 땅속 깊은 곳에 영원히 감금해두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300년이 흘러, 위즈와 만나게 된 것이다.

『녀석은 그럴 듯한 말로 나를 속였다. 핏스톤이란 종족은, 아무리 몸집을 키워도 중형 골렘의 출력밖에 내질 못한다. 하지만 녀석은 클수록 좋다고 했지. 녀석이 써먹기 좋게 말이다. 아마 네게도 이런 식으로 접근해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와는 경우가 다르잖아? 잇페인과 나는 적으로 만났다고. 적이 뭐라고 하든, 그 꼬임에 넘어갈 리 없잖아?”

『그래도 방심하지 마라. 잇페인은 300년이나 살아온 자다. 그 시간동안 간교한 지식은 더욱 늘었을 터.』

“그러고 보니 잇페인이란 자는 인간이 맞아? 마법사가 되면 300년을 살수도 있는 것인가?”

『평범한 인간이 300년이나 살수는 없다. 이종족일 가능성도 있지.』

“혹시 영생을 연구하다가 리치 같은 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네 눈에 저게 리치로 보이나?』

위즈는 바다로 떨어진 잇페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깡마른 체격이지만 분명히 살점이 붙어 있었으며, 핏기가 없지만 생기가 느껴졌다. 잇페인은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확실히 리치는 아니네.”

『그보다……이 배, 어쩐지 너무 소란스러워진 것 같지 않나?』

“배도 왼쪽으로 기운 것 같아.”

위즈는 돛대에 깔린 자들이 한명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위즈는 윈드커터로 돛을 찢었다. 그러자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 속에 쓰러진 용병마법사들이 보였다. 돛을 찢지 않고 움직이다가, 연기가 가득 차니 질식사한 것이다.

게다가 갑판의 나무들이 지나치게 거무스름하게 변해있다. 발밑이 뜨끈뜨끈한 느낌도 들었다. 희미하게 아지랑이 같은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도 있다.

『대체 불을 얼마나 지른 것이냐.』

“층마다 화염병 다섯 개씩 쓰고, 고래 기름을 뿌려주었지. 갑판에선 코로나도 꽤 사용했고.”

『이 배는 곧 가라앉는다. 일단 탈출부터 하지.』

“잠깐 함께 온 사람이 있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찾을 생각인가? 바보가 아니라면 알아서 빠져나갔을 테니, 우리 걱정이나 하는 게 어떤가?』

핏스톤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다. 귀상어라면 지금쯤 바다에 뛰어들었을 지도 모른다. 위즈는 펫 인벤토리를 열어 핏스톤을 집어넣고, 난간 밑을 내려다보았다. 6층은 더 되어 보이는 높이라 아찔하다.

“통구이 되긴 싫으니 어쩔 수 없지!”

위즈는 도움닫기를 해서 멀리 뛰어내렸다.

풍덩! 몸이 바다 속으로 쑥 꺼지며 보글보글 물거품이 솟았다. 위즈는 재빨리 생명의 진주를 입에 물었다. 스테미너가 천천히 깎이기 시작했다. 위즈는 신발에 정령강화를 걸고, 바하르칼의 배에서 멀어졌다. 배가 가라앉으면서 소용돌이가 발생할 것이다. 거기에 휘말리기 싫으면 멀어지는 게 좋았다. 그때 무언가가 위즈의 발을 쑥 잡아 당겼다.

“푸핫!”

위즈는 허우적거리며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귀상어의 성난 얼굴이 뒤따라 솟았다.

“늦었잖아!”

“많이 기다렸어요?”

“배에 불이 붙었는데도 싸워댈 만큼 내가 미친 걸로 보이나?”

“……그렇네요.”

사실 위즈는 ‘네’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귀상어의 이미지는 광전사, 불이 나면 더욱 신나서 날뛰리라 생각했었다.

“친구는 구했고?”

“네.”

“됐어. 그럼 가자. 헤엄은 칠 줄 알겠지?”

“롱혼까지 헤엄쳐가야 하는 건가요?”

“우리 둘 구하겠다고 쓸데없이 배를 보낼 이유는 없으니까. 저 녀석들 명색이 바하르칼의 용병마법사다. 가까이 접근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매우 방어적이며 소극적인 대처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위즈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다에 빠뜨린 잇페인은 위즈가 도망치는 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임에도 말이다. 다른 용병마법사들도 움직임이 없다.

‘바하르칼 용병은, 싸움으로 먹고 사는 용병들 중에서도 최상급. 그중에서도 저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은, 레미라를 칠 인원들이다. 이리 쉽게 무너질 리 없어.’

하지만 불안은, 불안에 그쳤다.

십여 분을 헤엄쳐 롱혼에 오를 때까지 어떤 방해도 들어오지 않았다.

배에 오르자마자 그랄누타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좋지 않군.”

위즈는 잇페인이 자신의 몸에 부린 술수 때문에 그러는 건 줄 알았다. 핏스톤의 말대로라면, 위즈는 의지에 상관없이 결정적인 때에 아군의 뒤통수를 치게 된다. 하지만 그랄누타이가 보고 있는 건 위즈가 아니었다. 그는 가라앉고 있는 바하르칼의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에 휩싸인 바하르칼의 배는 절반 이상이 물속에 잠긴 상태.

그 주변은 살기위해 빠져나온 바하르칼의 용병마법사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해적-레이스 단의 배를 향해 헤엄쳐오고 있었다.

“저들을 구해줄 생각입니까?”

“조난자를 구하는 건 뱃사람의 의무지. 하지만 우리는 해적이고, 저들은 그 해적을 건드린 세력이다. 구해줄 의리는 없다. 그리고……구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군.”

“네?”

“저들에게 제물의 인장이 찍혀 있네.”

“제물이요?”

“자네는 마법사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저건 널리 알려진 것이라네. 인간 마법사들이 위저드 마크를 찍는 건, 주문이 빗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지. 하지만 마족들은 마력을 얻기 위해 변형된 위저드 마크를 찍네.”

“그게 제물의 인장이로군요. 그렇다면 저 배에 마족이 타고 있다는 겁니까?”

“그건 아닐 거네. 제물의 인장은 중급 마법사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지. 지금 벌어지는 일은, 저 배에 탄 누군가가 마력을 모으고 있는 것뿐이네.”

“섬에서 지켜본 바로는 제단과 단검이 있어야, 제물을 통해 마력을 뽑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동종의 마력을 가진 자라면, 그럴 필요는 없지. 같은 바하르칼 출신이니 차이가 없을 거 아닌가.”

“결국 저들은 제물이 되기 싫어서 도망친 거로군요.”

위즈는 저렇게 마력을 모을 인물은 잇페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문득 위즈는 그렇게 모인 마력으로 무얼 할 것인가에 생각이 미쳤다. 마법사가 마력을 모아서 할 일이 주문을 쓰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그것도 부하들을 희생시켜가며 시도하는 거라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질 않습니까? 주문이 완성되기 전에 투석 공격을!”

“가라앉는 배에 대고 낭비할 정도로, 바위를 많이 싣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럼 도망이라도 쳐야지 이러고 있으면 됩니까?”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오는 사람의 숫자만 해도 100명이 넘는다. 저들을 제물로 삼아 주문을 쓴다면, 단순히 매직 캐논만 쓴다고 해도 투석 공격의 사거리를 훨씬 뛰어넘을 수 있다.”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랄누타이는 태평했다. 역으로 이쪽이 당하게 생겼는데도 위기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랄누타이 뿐이 아니다. 이 노마법사의 손녀인 귀상어는 물을 먹어 착 달라붙은 옷을 짜내다가, 위즈의 눈길을 받고는 새침하게 굴었다.

“어머, 싫다. 징그럽게 쳐다보긴. 섹시한 건 알아가지고.”

“크윽…….”

위즈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렇게 농담 따먹기 할 때가 아니다. 위즈는 빌헬름텔을 찾았다. 여차하면 빌헬름텔에게 ‘세 갈래 운명의 길’을 써서, 그라도 살려야 한다. 하지만 빌헬름텔마저도 이 느긋한 분위기에 녹아들어 있다.

“이게 뭡니까?”

위즈는 빌헬름텔이 건네는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럼주입니다. 혹시 어지럽거나, 멀미를 할 수 있으니 마셔요.”

“아니 지금 한가롭게 이럴 때가 아니질 않습니까?”

빌헬름텔은 손가락을 들어 뒤편에서부터 다가오는 작은 배 세척을 가리켰다. 전체적으로 검은 색 일색인 그 배에는, 붉은 색으로 ‘MC-1’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머지 배들도 ‘MC-2’, ‘MC-3’ 이런 식으로 붉은 페인트가 발려 있다.

“저게 뭡니까?”

“우리들의 구명줄이지요. 저것 덕분에 이들이 레이스(유령)라고 불릴 수 있었습니다.”

위즈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MC들이 롱혼을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정확히 바하르칼의 배와 롱혼의 사이였다.

“저 작은 배로 뭘 어쩌려고?”

“지켜보시면 압니다.”

그동안 바하르칼의 배 근처에서는 보라색 빛의 기둥들이 연달아 하늘로 쏘아지고 있었다. 롱혼을 향해 헤엄쳐오던 바하르칼의 용병마법사들이 바스러질 때마다, 빛의 기둥들이 하나씩 늘었다.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잇페인 개자식아!”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바다위에는 사람의 형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위즈는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제물로 바쳐진 자들에게서 뻗어 나온 빛의 기둥들이 한데 모인 곳은 하늘.

가라앉고 있는 바하르칼의 배에서 수백 미터 상공이다.

그곳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펄럭이는 로브자락 너머로 깡마른 손이 하늘을 떠받치는 것처럼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손끝에는 희생자로부터 뽑아낸 마력이 응집되고 있었다.

‘적이지만 멋있네.’

위즈는 빌헬름텔이 건네준 럼주를 홀짝거렸다.

이젠 위즈도 레이스 단과 빌헬름텔의 분위기에 동화되고 있었다. 잇페인이 저렇게 마력을 모아대는 걸 보면서도, 그냥 멋지다는 정도의 감상밖에 안 떠오른다.

짙은 보랏빛 마력이 한데 모이며, 잇페인의 발밑에 컴퍼스로 대고 그린 것처럼 거대한 원이 그려졌다. 외곽의 원 속에는 다시 작은 원이 겹치고, 그 간격마다 읽지도 못할 정체불명의 글자가 새겨졌다. 그 규모가 크다보니 근처의 바다는 보랏빛에 물들어, 해질녘의 바다처럼 바뀌었다.

그랄누타이가 탄성을 울렸다.

“허어! 혼자서 저런 규모의 마법진을 전개하다니!”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나도 저 정도는 그릴 줄 알아. 하지만 저렇게 빨리 만드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지. 보통은 열 명 정도 보조를 이룰 마법사와 함께해야 저런 속도가 나오네.”

그 말을 듣고 보니 새삼 잇페인이 대단하게 보인다.

‘하긴 300년 전의 인물이니까. 저 정도는 해야 이름값을 하지.’

잇페인의 발밑에서 생성된 마법진에서 가느다란 줄기들이 자라났다. 그것들은 이제 막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으려는 바하르칼의 배를 옭아맸다. 그러자 가라앉던 배가 들썩이며 물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배안에 들어찬 바닷물이 환기구며, 부서진 벽을 통해 콸콸 흘러나왔다. 사실상 침몰선이나 마찬가지인 배를 인양한 것이다. 잇페인 혼자서.

“저렇게 큰 배를 들어 올리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저건 고급 마법사도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네. 이거 궁금해지는군. 대체 저자는 누구지?”

“잇페인이라고 하더군요.”

“300년 전의 항마전쟁에 나타난 고위마족? 하지만 저자는 인간이지 않은가?”

“동명이인이겠지요.”

300년 전 사람인 건 맞지만……. 위즈는 굳이 그 사실을 알려 혼란을 가속시키진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잇페인은 계속해서 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마치 크레인으로 강재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거대한 바하르칼의 배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잇페인은 자신이 밟고 선 마법진 위에서 뒤돌아섰다. 그러자 허공에 매달린 배 역시 그를 따라 회전했다.

위즈가 코로나로 날려버린 뱃머리 쪽에서 보랏빛 방전이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통나무 열배 정도 굵기의 거대한 관이 선체를 따라 박혀 있었다. 그 끝은 송곳처럼 뾰족했는데, 화재와 폭발로 인해 절반가량 날아버려서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잇페인이 손을 휘젓자, 흉물스러운 부분이 억지로 뜯겨져나갔다. 그러자 굵은 관의 단면이 드러났다. 단면 속에는 눈부실 정도의 자줏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위즈님 저 빛 심상치 않은데요?”

위즈는 빌헬름텔을 돌아보았다. 자신이야 마력을 보는 눈이 있으니 보이지만, 그런 스킬도 없고 마법사도 아닌 빌헬름텔의 눈에도 저게 보인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저거 무슨 색으로 보이나요?”

“보라색 아닙니까? 눈이 따가울 정도네요.”

마치 우주전함의 주포와 같이 거대한 관에, 마법과는 무관한 사람에게까지 보일만큼 고농도의 마력이 이글거리고 있다. 위즈는 다른 걸 떠올리지 못했다.

“저게 매직 캐논입니까?”

그랄누타이는 고개를 저었다.

“매직캐논? 그런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 저 정도 마력량이라면……그래, 천 년 전 통합왕국 시절의 ‘루인 블래스터’급이다. 아니 진짜 루인 블래스터인지도 모르겠군.”

“뭔지 모르지만 위험하다는 거죠?”

“직격으로 맞으면 레이스 단은 증발한다.”

“즈, 증발한다고요?”

그랄누타이가 설명했다.

“작은 섬도 지워버리는 위력을 가진 무기다. 통합왕국 시절에는 레지스탕스들이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지. 무엇보다 무서운 건, 유효사거리가 20킬로미터라는 것이다. 이 배의 투석 공격이 2킬로미터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것이지.”

“막을 수 있는 거죠?”

“저걸 막을 수 있는 무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다네. 하지만 안 맞으면 그만.”

피하려는 노력조차 안하고 있는데, 안 맞을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아…이젠 다 틀렸어.”

위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귀상어가 끼어들었다.

“할배, 손님을 너무 놀리는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위즈님은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빌헬름텔까지 가세했다. 위즈는 영문을 모르고 눈만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그랄누타이는 제대로 알려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미안하군. 하지만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슬슬하죠. 여유 부리기엔 저 빛이 신경 쓰여요.”

귀상어가 채근하자 그랄누타이가 지팡이를 바닥에 찍었다.

롱혼의 앞에 위치한 MC 세척에서 즉시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가라앉은 배를 끌어올린 잇페인의 마법진보다는 훨씬 작지만, 그것들은 스위치만 넣으면 작동하는 기계처럼 갑자기 생겨났다.

“모든 MC는 퇴로를 열어라!”

명령이 떨어지자 MC들이 선회하면서 롱혼을 지나쳤다. 그러자 마법진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뱃전에 와 부서지는 물결이 새카맣게 변했다. 롱혼의 난간이며 갑판이 이지러지고, 사람의 모습과 함께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찰흙반죽을 제멋대로 이겨놓은 것처럼, 모든 게 그렇게 강한 압력을 받아 찌부러졌다. 위즈는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위즈님?”

빌헬름텔이 다가와 어깨를 흔들었다. 어느새 주변은 원래 모습대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의 그건?”

“저 작은 배, ‘미라클 차일드’가 가진 고유능력입니다.”

그때 섬광이 번쩍이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허공에 매달린 바하르칼의 배에서 뻗어나간 자줏빛 섬광이 바다를 쓸며 지나간 것이다. 섬광이 지나간 바다가 순식간에 부글부글 끓으며 수증기를 뿜어냈다. 일순간 살짝 갈라진 바다가 다시 합쳐지면서, 인근의 해류가 거칠어졌다. 바다에 떠다니는 배의 잔해 같은 건 없었다.

“저긴 우리가 있던 곳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잇페인이 일부러 엉뚱한 곳에 대고 쏘지 않는 한 우리들은 피할 수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조금 전에 일어났던 세상의 일그러짐 기억하십니까?”

“그거랑 무슨 관련이?”

“그건 웜홀을 통한 단거리 이동 중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웜홀이요?”

“네. 미라클 차일드는 단거리 이동용 웜홀을 열지요. 위즈님을 찾아 용병마법사들의 섬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입니다.”

그러니까 잇페인이 저 가공할 마력포를 쏘는 순간을 노려, 미라클 차일드로 레이스 단의 모든 배들을 이동시켜버린 것이다.

‘섬을 날린다는 저 마력포 만큼이나 사기적인 장비 아냐?’

잇페인은 뒤쪽에서 나타난 레이스 단을 보고 배를 선회시켰다. 하지만 그 속도는 처음에 비해 매우 느렸다.

“그만한 마력을 쏟아 붓고도 아직 움직일 힘이 남았는가?”

그랄누타이가 명령했다.

“골렘들! 투석기를 작동시켜라!”

중앙 갑판이 열리며 투석기와 골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형 골렘 다섯 기가 달라붙어 투석기를 조립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첨탑 같은 구조물들이 갑판 위에 늘어섰다. 위즈는 그것이 과거 지구에서 석유를 채취하는데 사용했던 원유채굴용 장비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반 조립 상태로 접어서 넣어둔대요.”

빌헬름텔이 설명해주었다.

“그래도 너무 빠른 걸요? 10초 걸렸나?”

조립이 빨리 끝난 투석기에는 벌써 바위가 올려지고 있었다. 중형 골렘들이 부지런히 바위를 날랐다.

“발사!”

더블사이즈 침대 두 개만한 크기의 바위덩어리가, 대기를 가르며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바하르칼의 함선에 맞은 건 하나도 없었다. 잇페인이 마법진 자체를 이동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진이 움직이자 매달려 있던 배도 함께 이동했다.

그러자 그랄누타이는 골렘들을 투석기에 실었다. 그 모습을 본 귀상어가 중얼거렸다.

“와……할배 열 받았다.”

다른 투석기들은 일시적으로 멈추었고, 골렘을 실은 투석기만 힘차게 지렛대를 휘저었다.

바위 대신 날린 골렘 역시 바하르칼의 함선에 닿지 않았다. 그랄누타이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버스트&무브!”

그러자 골렘의 몸에 환한 빛이 어리더니 실금이 갔다. 그리고 수백 개의 조각으로 나뉘며 폭바했다. 골렘의 바위파편이 넓게 흩뿌려졌다. 대부분은 허망하게 바다 속에 빠져버렸지만, 일부는 바하르칼의 함선의 몸체를 뚫고 들어가 박혔다.

그랄누타이는 그만의 방식으로, 위저드 마킹을 한 것이다.

골렘의 조각이 박힌 바하르칼의 배를 노리는 이상, 투석 공격은 더욱 정밀해질 것이다.

“준비.”

그랄누타이가 명령하자 다시 골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석기마다 바위가 재어졌다. 그랄누타이의 지팡이 끝에서 수박만한 크기의 마법진이 세 개 생겨나더니, 그대로 지팡이를 관통했다. 그랄누타이는 지팡이 끝으로 바하르칼의 함선을 겨누었다. 투석기들이 일제히 바하르칼의 함선을 향했다.

“발사!”

그랄누타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위덩어리가 하늘을 날았다. 잇페인은 자신이 밟은 마법진을 살짝 비틀며 조준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 의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날아온 바위는 하나뿐이었다. 바하르칼의 배가 막 움직인 공간으로 두 번째 투석 공격이 가해졌다. 마치 그곳으로 피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신속했다. 뒤이어 3타 4타가 박혔다.

바하르칼 함선의 바닥부분이 헐려나가며 나뭇조각을 바다에 흘렸다. 배안에 실린 가죽부대와 나무통들이 함께 쏟아져, 근처 바다는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잇페인은 투석 공격에서 벗어나려 고도를 높였다.

하지만 이미 용골까지 직격당한 터라, 무리한 움직임은 배에 균열을 만들고 말았다.

삐걱, 우지끈!

배의 2/3에 해당하는 부분이 통째로 떨어져나가 바다로 떨어져 내렸다. 이제 바하르칼의 함선은 내부의 마력포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연스레 투석 공격은 마력포로 집중되었다. 그랄누타이는 마력포를 통째로 바다에 떨어뜨릴 셈이었다. 그러자 잇페인이 밟고 선 마법진에서 다시 빛을 머금은 줄기들이 휘둘러져 마력포를 친친 감았다. 마력포에서는 다시 보랏빛 전류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배의 상당부분이 날아간 탓에 이전보다 선회하는 속도가 빨랐다.

위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아니지……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위즈는 인벤토리 속에서 아렌의 크리스를 꺼내들었다. 생명을 마력으로 바꾸는 힘이 있는 제단과 짝을 이루는 검. 이것은 마력을 뽑아내는 힘을 가졌다.

‘만약 이걸 저 마력포의 포구에 처넣어버린다면?’

마력포는 이쪽을 똑바로 겨누고 있다. 게다가 지금 그랄누타이의 투석 공격은 90%가 명중하고 있다. 이 정도면 해 볼만 하다.

“그랄누타이! 이 검을 투석기로……헉!”

위즈의 손에 들린 아렌의 크리스가 제멋대로 그랄누타이를 찔러 들어갔다. 그 바람에 모든 골렘들이 작동을 멈추었고, 투석 공격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흐음, 역시나…….”

그랄누타이는 지팡이를 치웠다. 이미 위즈의 공격은 귀상어가 차단하고 있다. 방어는 필요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귀상어는 분노를 토해냈다. 그랄누타이는 손녀의 어깨를 툭 쳤다.

“저 잇페인이라는 자에게 홀렸다. 심상세계를 침범당한 것 같구나.”

“그래도 그렇지 감히 할배를…….”

“네가 같은 입장이라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봐라 저 얼굴을.”

위즈의 이마에는 힘줄이 솟아나 있었고,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만 보면 있는 힘껏 크리스를 밀어 넣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즈의 엉덩이는 뒤어 엉거주춤 뒤로 빠져 있었다. 상체와 하체가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이건 위즈의 의지가 아니다.

위즈의 꾹 다물린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멈춰, 멈추라고…….”

하지만 행동은 말과 달랐다. 위즈는 귀상어의 커틀라스를 크게 밀치며 물러서더니, 진각까지 밟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귀상어는 커틀라스를 휘둘러 그런 위즈의 공격을 막아냈다.

“정신 차려!”

“이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는 동안 잇페인은 정확히 위즈가 타고 있는 롱혼의 바로 위쪽에 도착했다. 고정시킨 줄이 몇 가닥 끊기면서, 마력포가 수직으로 세워졌다. 유효사거리 20킬로미터짜리 마력포가 불과 1,000미터 상공위에 있다. 제로거리에서 사격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보랏빛이 넘실거리는 포구를 본 위즈가 소리 질렀다.

“그만하라고 잇페인, 개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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