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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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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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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10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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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4. 고통을 먹는 자 (38)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38.

잇페인은 어찌어찌 물리칠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건 위즈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동원한 인력이 많았기 때문이다.

잇페인이 도망친 해안가에는 그를 도와줄 페인킬러만 있던 게 아니다.

당장이라도 잇페인의 존재가 노출되면 일제히 덤벼들 프로미넌스와, 증원된 안티 바하르칼의 배까지 있었다. 위즈는 이들을 전부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모두 동원해도 잡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판단한 데에는 잇페인의 존재 자체가 파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잇페인의 존재를 처음 알았던 건, 더 오션이라는 게임을 서비스하는 마도로스 社의 사장-케이트를 통해서다. 파티에서 만난 그녀는 잇페인의 등장을 예고해주었다.

그 뒤 여러 가지를 조사해본 결과 잇페인은 유저들의 샌드백 정도로 전락한 중간보스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게임 초반에 등장하면 유저여럿 잡을 스펙을 갖춘 괴물.

실제로 맞닥뜨렸을 때는 그 괴물 같은 능력을 그대로 드러내보였다. 루인 블래스터라는 마력포를 홀로 다루며 그랄누타이의 함대와 싸운 것이다.

SF영화의 고전 ‘스타워즈’에 비유한다면, 다스 베이더가 포스로 거대함선 디스트로이어를 혼자서 조종하고 행성파괴용 무기의 화기관제마저도 알아서 다 해먹는 것과 같았다.

한마디로 잇페인은 중급마법사로는 보기 어려운 특별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위즈는 생각했다.

큰 부상을 입고도 도주하는 잇페인은 처음부터 그 존재자체가 상식 밖의 것이라고. 그러니 설사 따라잡게 되더라도 다른 이변이 발생할 수 있다고.

위즈는 해적들과 함께 움직이는 빌헬름텔을 호출했다.

빌헬름텔은 샤프슈터 테크를 탄 유저. 그에게 저격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파이널 웨폰-네이쳐스 아크의 힘까지 빌린다면, 잇페인을 충분히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처음부터 잇페인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빌헬름텔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이 계획에 대해서는 이미 수 차례 의견을 교환한바 있다.

빌헬름텔이 저격을 준비할 동안 위즈도 밑 작업을 해두어야만 했다.

위즈는 학살자의 망령까지 써가며 잇페인을 몰아쳤다.

그가 숨기고 있을 마지막 패를 쓰게끔.

예상대로 잇페인은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레비테이션 주문으로 날아올랐다. 잇페인이 배리어를 치지 않은 것은, 부상 입은 몸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용병마법사의 엄호를 받으며, 페인킬러에 착함한 순간을 노려 빌헬름텔의 저격이 이루어졌다.

위즈의 주문대로 네이쳐스 아크를 이용한 초 장거리 저격.

그 결과 잇페인의 체력은 1000을 남기고 모조리 깎여나갔다.

무조건 1000 이상의 체력을 날려버리는 파이널 웨폰 고유스킬의 위력이다. 그러나 남은 1000의 체력을 깎을 능력이 위즈에겐 없었다. 화염의 발자국을 10번 넘게 겹치고 쏜 코로나로도 가능할지 어떨지는 위즈도 자신 없었다. 더군다나 스탯이 왕창 깎여버린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위즈는 해적-레이스단이 보유한 자폭공격용 보트 ‘닉스’를 이용했다.

닉스의 연쇄폭발은 인근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잇페인은 그렇게 죽었다.

레미라 침공을 담당한 총사령관이 그렇게 사라지자 생각지도 못한 현상이 일어났다.

섬 곳곳에서 싸우던 용병마법사들이 갑자기 모습을 감춘 것이다. 위즈는 이들 대부분이 잇페인의 분신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사라진 자들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레미라의 마법사들은 아직도 건재.

승기를 탄 레미라 마법사들이 요새에서 뛰쳐나와 공세에 들어가자 용병들의 태반은 물고기 밥이 되었다. 바다에서는 숫자가 늘어난 안티 바하르칼의 배가 막았고, 레미라에서는 성난 마법사들이 마력을 공명시켰다.

그 결과 쳐들어온 숫자의 1/5만이 살아서 도망쳤다. 현재 그들은 잔당처리를 맡은 레이스단에게 쫓기고 있다. 고래상어와 귀상어가 신이 나서 따라갔으니 그들은 고국에 닿기 전에 궤멸될 것이다.

2차원정군 문제도 해결되었다.

이미 여러 나라들이 바하르칼에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하고 있었다.

내륙에서는 연일 바하르칼 용병들이 습격당했고, 바다에서는 해적들이 병력수송선을 침몰시켰다.

세상의 모두가 바하르칼에게 이를 드러낸 상황.

이에 바하르칼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고 종전협상을 요구했다.

레미라 수호전쟁은 이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에게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바로 바하르칼 진영에 등장한 잇페인 때문이었다.


◇◇◇◇◇◈◇◇◇◇◇◇◈◇◇◇◇◇◇◈◇◇◇◇◇


잇페인이 레미라 침공 때 퍼뜨린 분신의 숫자는 위즈가 알고 있는 것만 100명이 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에 동원된 용병마법사의 대다수가 분신이었다.

그들에게 위즈가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는 심상세계에 잇따른 침입을 허용해 스탯을 모조리 강탈당한 것이었다. 정신공격 비슷한 걸 받아 악몽 비슷한 걸 꾸게 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유저들은 어땠을까.

결과적으로 말하면 유저들 역시 스탯이 깎였다. 다만 그것은 사망 패널티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저들은 악몽 같은 걸 꾸진 않았다. 물론 이들 역시 위즈와 마찬가지로 기분 나쁜 경험을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사람에게는 신이 주신 선물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억이 퇴색되어, 괴로운 기억도 잊고 싶은 기억도 먼 훗날 꺼내어보면 추억으로 변질된다.

이것이 망각.

헌데 잇페인의 정신공격은 망각으로 변질된 기억을 복원시켜 원판 수준으로 만들어 놓았다. 빛바랜 기억에 색이 입혀지면서, 기억과 연관된 감정 역시 되살아났다.

질투, 분노, 슬픔, 원망 등등.

그것들은 마이너스 감정들이었다.

이 때문에 유저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 한낱 게임 속 NPC 따위가 인간의 감정을 주물러대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잇페인 때문에 요즘은 입맛도 뚝 떨어졌습니다.

- 맞습니다! 아무리 가상현실 게임이라 해도 그렇지, 인간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다니! 이건 도덕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 마도로스 社는 이번 일에 대해 성의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 이건 음모다! 대중들을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시오닉스의 음모다!

- 정신적 피해보상을 내놓아라!


유저들이 마도로스 社를 콕 집어 비난한 것은, 단순히 ‘더 오션’이라는 게임을 서비스하는 회사라서가 아니다.

직접적으로 잇페인의 출현에 깊숙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게임들은 중간보스부터 최종보스까지 모든 게 처음부터 게임 속에 구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발생한 문제가 특출한 소수의 유저에게 게임이 클리어 되는 일이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헤븐즈 게이트’라는 게임에서 벌어졌다.

당시 레벨 13짜리 유저가 게임 내 최종보스인 마왕을 해치운 일이 생겼다.

우연히 맵 사이의 빈 공간을 찾아내 그곳으로 진입한 유저가, 곧바로 마왕의 머리 위 공간으로 떨어지며 칼질을 한 것이다. 마왕은 불의의 습격을 받고 목이 날아가 버렸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어이없게도 데이터 상의 좌표입력이 잘못되어 발생한 것이었다.

프로그래밍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이 사건 때문에 해당게임은 문을 닫아야 했다.

왜냐하면 마왕의 정체가 사실 정의의 편이었던 성녀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엔딩이 유출된 추리물을 굳이 극장가서 볼 이유는 없듯이, 이 게임 역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출시한 뒤 1달을 버티지 못하고 ‘헤븐즈 게이트’는 서비스를 중지했다.

이후 게임 회사들은 헤븐즈 게이트의 일을 교훈삼아, 미 구현 데이터 영역을 늘리고 특정데이터에는 잠금장치를 해두었다.

설사 사고로 최종보스가 있는 던전에 들어간다 하여도, 만날 수 없게 해둔 것이다.

최종보스는 오로지 게임사의 판단에 의해 풀려나야지만 만날 수 있었다. 그전에는 무슨 꼼수를 써도 공략할 수 없다. 희귀한 아이템과 재료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격이 없는 자가 취하려 하거나, 과정을 생략해도 절대 얻을 수 없게 해두었다.

그러니 더 오션에서 잇페인이 등장한 것에는, 게임 개발사인 마도로스 社가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았다.

아무리 출현조건이 만족되어 나타난 것이라지만, 메인퀘스트와도 관련 있는 중간보스가 등장하는 일이다. ‘마도로스 社’에서 해금을 해주지 않았다면, 잇페인이 레미라에서 활개치고 다니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오션의 양대 팬 사이트, 솔티워터와 마린블루에는 성난 유저들의 성토가 끊이지 않았다. 관계자들은 골치가 아팠다. 조만간 해명을 해야 할 텐데, 회사임원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임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던 것이다.

임원들은 회의실에 틀어박혀서 철야 중이었다.

회의실에는 벽 하나가 통째로 스크린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깡마른 체구의 마법사가 눈을 시커멓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화면의 좌우 빈 공간에는 다량의 데이터가 출력되었다. 잠시 후 화면이 분할되어 게임기에 누워있는 유저의 실제 모습이 나타났다.


- 으으으! 으으으으!


유저가 몸을 버둥거리며 게임기의 덮개를 발로 마구 차댔다. 암릿이 끼워진 팔을 제외한 모든 부위가 폭력적으로 변했다. 잠시 후 뇌파 불안정 판정을 받은 유저는 강제로그아웃 당했다. 게임 캐릭터는 사망한 상태.

삑.

화면 속에서 데이터가 클로즈업 되었다.

거기엔 유저만이 알 수 있는 시시콜콜한 개인정보가 드러나 있었다.

사람의 이름으로 보이는 게 두 차례 등장하고, 이별을 암시하는 단어가 반복되었다.

물론 사생활침해 수준까지 가기 힘든 단편적인 단어의 나열이기에, 유저 본인의 동의를 구해 해당 데이터를 구해올 수 있었다.

-몇 번을 봐도 황당하군요. 이건 게임이란 말입니다. 유저가 들어가 있는 건 게임기지 의료기구가 아니에요. 어째서 게임 속 NPC가 인간의 머리를 스캔하는 거죠?

앳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회의실은 그리 크지 않았고, 참석한 인원도 20명 정도였다.

굳이 스피커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스피커가 사용된 이유는, 회의 참석자 한 사람의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임원들은 회의실의 상석, 최고 결정권자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게임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마도로스 社가 게임회사라지만, 회의실에까지 게임기를 들여놓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게다가 게임기는 지금 가동 중이었다.

강화글라스 덮개 너머에는 쇼트 컷을 한 갈색머리 소녀가 누워있었다. 마도로스 社의 신임 사장인 케이트였다.

임원들은 게임기 속에 들어간 채 회의에 참석중인 그녀를 익숙하게 대했다. 이런 회의를 한두 번 치룬 게 아니기 때문.

“가상현실게임에 사용되는 게임기와 의료장비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안전성문제 때문에 이런저런 보완이 이루어진 탓이고, 그래서 게임기는 고가의 물건이…….”

케이트는 임원의 말을 자르고 반박했다.

- 제가 그것도 몰라서 이러는 걸로 보입니까? 저도 가상현실게임이라면 질리도록 해보았고, 더 오션은 실제 플레이 중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잘 알고 있어요. 게임기에는 스캐닝 기능이 빠져 있어요. 저 영상 속 유저가 사용하는 게임기를 조사한 결과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어떻게 유저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유저만의 기억을 게임 속의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한 잇페인이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

“아무래도 해킹당한 뒤 새로 생성된 데이터에 이상한 기능이 들어있었다고 추측됩니다.”

- 추측? 더 오션의 게임 클라이언트 해석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게 아니었나요?

“10%에 해당하는 영역이 암호화되어 있었습니다. 잇페인의 경우는 그 10%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해킹의 영향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의 영향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는 거로군요.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 잇페인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유저들의 협공으로 어떻게 잡긴 했지만 그게 끝은 아니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잇페인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겁니다.”

- 그래서 한 가지를 제안하려 합니다. 만약 게임 서버를 강제로 리부팅 시켜서, 잇페인의 데이터를 강제로 뒤바꾸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임원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케이트가 말한 방법은 게임개발사가 스스로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는 행동. 과거는 어쨌을지 몰라도 지금은 게임 속 데이터에도 재산권을 행사하는 시대다. 당연히 재산권을 침해한 마도로스 社는 거액의 소송에 휘말리고 말리라. 그리되면 도산할 수밖에 없다.

한번 떠나갔던 유저들의 마음을 잡는데 1달이 넘는 시간을 투자한 뒤다. 이번에 무너지면 마도로스 社는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 그렇다고 이대로 놔둘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미 유저들은 정신적인 피해를 겪었습니다. 이걸 그냥 놔둔다면 나중엔 더 큰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제2의 브림캐스터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브림캐스터…….”

가상현실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모든 걸 마쳤던 학자. 하지만 그의 이론을 차용한 가상현실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광인과 자살희망자를 양산한 매드 사이언티스트. 그 이름을 들은 임원들 모두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케이트의 말이 옳았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두어야 했다.

회사의 존속에 신경 쓰다가 인명피해를 방조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단은 잇페인의 데이터를 손보는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업데이트를 위한 서버점검을 이유로 들면 될 것 같습니다.”

- 동시에 나머지 10%의 데이터 해석도 계속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일단 차후 업데이트 일정을 앞당겨서…….”

쾅!

이들의 대화는 문이 열리며 등장한 세 사람의 청년들로 인해 끊겼다. 임원들이 청년들을 제지했다.

“여기는 출입금지…….”

“네깟 놈들이 콜로니 연합의 VIP이신 이 몸을 막겠다고?”

선두의 청년이 자신의 암릿으로 홀로그램을 띄웠다. 신분내력이 담긴 홀로그램에 VIP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임원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흥. 천민들 주제에.”

한껏 턱을 치켜든 청년이 사장석으로 다가가 게임기에 다리를 올렸다.

“어이……케이트. 이번 일에 대해 설명해주셔야겠어.”

- 무례하군요.

“무례? 유럽변방에서 굴러먹던 년이 귀족인체 하고 있네. 네년 때문에 잇페인이 해금된 거잖아? 그놈이 아군까지 공격하게 만든 게 네년이지?”

-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놈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같은 편인 날 공격했단 말이다!”

- 바하르칼 진영이었나요?

“그래! 바하르칼이지! 그게 이상한가?”

- 개인의 취향이니 강요할 수는 없지요. 문제는 아군까지 공격했다는 건데……예전부터 잇페인은 포악한 존재가 아니었나요?

“때리거나 괴롭히긴 했어도 죽이진 않았다고!”

- ……일단 돌아가서 기다리시지요. 해킹 이후 리뉴얼 하면서 부여된 개성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 같군요.

“할 말은 그게 끝이냐?”

- 아밀 네크리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게 뭔지 설명해주셔야겠습니다.

“보면 모르겠나? 침식형 나노봇이지. 게임기 째로 녹여버릴 수도 있는.”

청년-네크리타의 손에 들린 건 20센티미터 길이의 단봉.

그것의 몸체에는 ANB라는 흰색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 그렇군요. 원하는 것을 얻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 이거로군요.

“이미 벌어진 일가지고 떠들어봐야 입만 아프지. 그러니까 보상 문제로 들어가자고. 사장의 권한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잖아?”

- 예를 들면?

“다음 업데이트 내용이나, 앞으로 해금될 데이터 같은 것 말이지. 이번 레미라 침공전에서 별로 재미를 못 봤다고. 그러니 그 손실을 어떻게든 메워야하지 않겠어?”

- 거절합니다.

“내 손에 들린 건 단순 협박용이 아니야. 정말 쓸 거라고. 내가 가진 힘이면 너 따위는 죽여 버리고 입막음해도 상관없지. 너무 쉬워서 하품이 날 지경일 테니까.”

- 물론 그렇겠지요. 당신 말마따나 난 콜로니 연합에 막 가입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사장이 된 데에는 자에몬님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다는 걸 알고 있나요?

“흐흐. 어쩐지……너 같은 어린애가 사장이 되었을 때부터 구린내가 나더라니. 그 노친네하고 잔거냐? 그런 거라면 고맙지. 단순무식 무투파 따위가 수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 싫었는데 잘됐군. 스캔들이라면 이쪽에선 대환영이다.”

- 이상하군요. 이 대화……전부 기록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네 말대로다.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마도로스 社에 내 사병을 데려왔다. 회사 내부 자체 네트워크는 재밍으로 무용지물이 된지 오래다.”

- ……사실이로군요. 게다가 해킹까지?

“그러니까 지금의 대화는 내가 직접 삭제시킬 테니 염려 말라고. 이제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들을 차례인 것 같군.”

게임기의 덮개가 열리며 내부에 공급된 산소가 푸쉭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케이트의 눈꺼풀이 열리며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거절입니다.”

네크리타의 이마에 혈관이 솟아올랐다. 그는 손에 든 ANB를 케이트의 머리에 겨누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우습군요. 제가 약시라서 눈에 뵈는 게 없답니다. 무기를 겨누며 하는 위협은 통하지 않아요. 무엇보다……지금은 손님과 만날 시간이라 당신과 드잡이할 시간이 없네요.”

“뭐? 손님? 나는 손님이 아니란 말이냐?”

“손님인 건 맞죠. 청하지 않은 손님. 다른 말로는 불청객이라고도 하더군요. 음……불청객. 참 좋은 어감이군요.”

케이트는 게임기에서 몸을 일으켜 네크리타를 스쳐지나가려했다. 그러자 네크리타는 ANB의 사출 스위치를 눌렀다. 나노봇이 뿌려지면 케이트의 몸은 갈가리 찢겨져나간다. 그리고 결국엔 염산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온몸이 분해되어 체액만 남게 될 것이다.

네크리타는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거역하는 자를 처분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감히 날 무시하더니 꼴좋구나.”

그의 뒤에서 죽었을 사람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보니 네크리타, 당신도 저 못지않게 눈이 나빴군요?”

네크리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케이트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맹인용 지팡이를 주섬주섬 펼치고 있었다. 네크리타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치켜떠졌다.

“어, 어떻게?”

손에 쥔 ANB는 멀쩡했으며 제대로 작동했다. 바닥에 구르는 나노봇이 담긴 용기가 그 증거. 게다가 카펫에 검은 얼룩이 번져나가는 중이다. 나노봇이 카펫을 분해, 아니 녹이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카펫은 걸쭉한 국물 비슷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나노봇을 이용한 공격은 사실상 범위 공격에 속했다.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걸어 다니지 못하는 장애인 소녀가 피할만한 공격이 아니다.

“그렇게 놀라는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제대로 피하긴 힘들 것 같아 꼼수를 썼거든요.”

케이트의 손에서 작은 앰풀이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그건 뭐지?”

“용병들이 말하길 전투 약물이라더군요. 짧은 시간 전신의 반응 속도를 올려서…….”

“전투 약물이 뭔지는 나도 알고 있다! 어째서 그런 걸 가지고 있느냐는 거다!”

“당연하지 않나요?”

케이트가 배시시 웃었다.

“제가 사장자리에 오른 뒤 못마땅해 하는 눈들이 늘었어요. 장애인이, 그것도 어린 계집이 이 자리를 꿰차니 그렇겠지요.”

“그래서 전투약물까지 구한 거냐?”

“사람들의 적의는……시력이 나빠도 잘 보이더군요. 아니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요.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케이트가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양손에 쥐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지팡이 끝에서 가느다란 꼬챙이가 튀어나왔다. 곧 회의실에는 가느다란 진동음이 울렸다.

“단분자 커터?”

“그럴 리가요? 아무리 전투 약물을 사용했어도, 이 가느다란 팔로는 그 정도 물건은 감당이 안 돼요. 그냥 절삭력보다는 질러 넣는데 특화된 거라고 생각해주시길.”

케이트가 앞으로 나서자 네크리타의 좌우에 있던 청년들이 품속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이들 역시 네크리타의 사병이었다.

열병기로 무장한 프로와 냉병기로 무장한 아마추어.

어느 쪽으로 보나 케이트에겐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회의실에 허스키한 목소리가 울렸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야?”

모두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거구의 청년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비무장이었지만 그 몸은 단련된 흔적이 역력해서 결코 전투 이외의 일을 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살집이 많은 편이지만 내딛는 걸음걸음도 날렵하다. 드세게 보이는 인상 때문에 한가락 할 것 같은 분위기까지 풍긴다.

막 싸움이 벌어지려는 타이밍에 맞춰 나타났으니 그 신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네크리타는 암릿을 조작해 자신의 신분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마도로스 社의 무장경비인가? 끼어들 곳과 안 끼어들 곳을 구별하시지? 지금 VIP가 볼일이 있는 게 안 보이나?”

“VIP?”

청년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암릿을 조작했다. 암릿 위로 흐릿하게 떠오른 정보와, 네크리타가 띄운 홀로그램을 번갈아 쳐다보던 청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밀 네크리타……콜로니 연합의 VIP로군.”

“그래. 알았으면 그 무거운 몸뚱이 끌고 꺼지라고.”

“허허…….”

청년의 몸이 붕 소리를 내며 날았다. 그리고 네크리타의 사병들은 손목이 꺾인 채 바닥을 뒹굴었다. 청년의 손에는 사병들의 총이 들려 있었다.

“VIP라고? 너희들은 뭐가 특별해서 말끝마다 VIP, VIP거리는 거냐?”

네크리타는 지지 않고 말을 맞받았다.

“무너져가는 세계를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콜로니 연합이다! 이런 대접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너져가는 세계를 일으켜? 그건 새파랗게 어린 네가 아니라, 어른들이 해온 일이겠지.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하시지? 300년 전부터 오염된 땅을 일구며 콜로니를 세운 건 파이오니어 컴퍼니다. 콜로니를 관리하던 놈들이 이익단체로 변질된 게 바로 너희들이 아니더냐? 네가 세계를 위해 뭘 했기에 VIP인 것이지?”

“너…너 이 자식!”

“아무튼 아밀 네크리타. 그쪽 생각대로라면, VIP는 우월한 존재니 하등한 것들은 기어오르지 말라 이건데……그건 10세기도 전에 사라진 귀족들이나 하던 발상 아닌가? 그걸 역겨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모르는 건가?”

청년이 양손에 들린 권총을 들어올렸다. 총구가 향하는 곳은 정확히 네크리타의 가슴.

네크리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것이냐?”

청년의 입매가 뒤틀렸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더욱 갈라지며 낮게 울렸다.

“내가 왜 후환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지?”

“걱정해야 할 것이다. 네 녀석은.”

“죽음도 두렵지 않으시다? 그럼 이건 어떠냐?”

청년은 총을 거두고 자신의 암릿을 톡톡 두들겼다. 청년의 신상이 홀로그램 상태가 되어 떠올랐다. 네크리타는 눈을 부릅떴다.


파이오니어 컴퍼니의 후계 1위. 편재. [VVIP]

S급 용병 라이센스 보유/ 이하 기밀.


꿀꺽. 회의실 곳곳에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VIP의 존재도 놀랍거늘, 이를 넘어서는 VVIP가 나타났다. 더군다나 그 신분도 예사롭지 않다.

네크리타의 입에서 억눌려진 한마디가 내뱉어졌다.

“전기통구이…….”

“연령으로 보건데 내가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학생이었을 것 같군. 안 그런가? 아밀 네크리타?”

“으음…….”

“이 방엔 전기시설도 충분한 것 같으니 문제없겠군.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대놓고 구워버리려는 건 아니니까.”

편재는 양손에 힘을 주었다. 권총 두정이 우그러들며 슬라이드가 튕겨나가고, 탄창이 빠져나왔다. 편재는 우악스러운 악력으로 두 자루의 권총을 포개어 뭉갰다. 권총은 순식간에 고철덩이로 변했다. 어디가 방아쇠고 어디가 손잡이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기회를 줄 때 순순히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진짜 권력의 맛이 어떤 건지 보여줄 테니까.”

네크리타는 잔뜩 충혈 된 눈으로 편재를 쏘아보더니 부하들과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편재는 그녀를 부축했다.

“무리했군요.”

“네……하지만 다행이네요. 전기통구이씨.”

“흰소리나 할 땝니까?”

편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케이트의 안색이 창백한 게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편재는 회의실의 임원들을 둘러보았다.

“네크리타라는 자가 케이트 양에게 무슨 짓을 했습니까?”

임원 중 하나가 알려주었다.

“사장님께서는 전투 약물을 사용하셨습니다.”

편재는 케이트를 안아들었다.

“의사를 불러요! 부작용입니다! 수혈팩이랑 혈액투석기 들고 오라고 해요! 심폐소생기도! 서둘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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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고통을 먹는 자 (38) +5 14.04.10 1,397 26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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