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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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녀석의 입에 물린 것은 회색의 천 조각이다. 자연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인공적인 것 즉 인간의 흔적이다.
세렌이 천마비행으로 날아 녀석 앞에 날아내리자 검은 털의 이 늑대는 아예 세렌의 움직임을 전혀 인지 못했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눈앞에 세렌이 나타나자 순간적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만큼 세렌의 풍기는 위압감은 우두머리 늑대가 감당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세렌은 늑대의 입에 물린 회색 천을 잡아당겼다.
혼이 나간 늑대는 입을 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세렌이 늑대 턱을 잡고 벌리자 그제야 회색 천 조각을 빼낼 수 있었다.
찢어진 부위도 그렇고 피 냄새도 나지 않으니 짐승에게 공격당해 찢어진 것은 아니다. 나뭇가지에 걸렸거나 날카로운 바위 조각에 걸려서 찢어진 것이다.
그리고 세렌은 천 조각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사기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네크로맨서로군."
무릇 짐승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도망가거나 복종하거나 한다. 그러나 세렌의 강함은 이 검은 늑대의 인지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늑대는 아직도 굳어 버린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라그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맷토끼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세렌은 녀석이 왜 이 회색 천을 물고 왔는지 대충 감은 잡고 있다. 일주일 전 살려준 것에 대한 자기 딴에 호의를 보이러 온 것이다.
무릇 포식자의 짐승은 살기를 읽는다.
세렌이 자신에게 전혀 살기를 내보이지 않았기에 이렇게 접근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접근하고 보니 세렌이 가진 압도적인 위압감에 자신도 모르게 그만 몸이 굳어 버린 것이다.
"네가 이것을 어디서 찾았는지 날 안내해 줄 거로 생각해."
세렌은 천 조각을 코에 대고 냄새 맡는 시늉을 해 보이고 바닥에 놓았다.
확실히 검은 늑대는 세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아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굳은 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세렌은 맛나게 구워진 맷토끼 두 마리를 집어다가 검은 늑대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냄새가 진동한다. 생고기와 달리 바짝 구워진 고기의 풍미는 또 달랐다.
자기도 모르게 이빨 사이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먹어."
세렌이 말하자 그제야 덥석 받아 물고는 몇 번 우무 우물하더니 단번에 삼켜 버렸다 녀석의 덩치에 비해 맷토끼는 그냥 고기 한 점에 지나지 않았다.
"내일 사냥 더 하면 되지 뭐."
남아있는 맷토끼 여섯 개를 더 던져 주었더니 녀석은 몸이 풀렸는지 날름날름 받아먹고는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성였다.
세렌이 회색 조각 천을 바닥에 던지자 잽싸게 달려와 물고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뒤돌아 세렌을 한번 힐긋거린다.
"라그 업혀."
모닥불을 발로 차 꺼트린 세렌은 라그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늑대는 숲속을 힘차게 달렸다. 세렌은 늑대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고 바짝 따라갔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늑대는 이곳이 자신의 구역이기에 거침없이 내달렸다. 한참을 달린 후에 멈추더니 세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입에 문 회색 천을 한 곳에 내려놓았다.
이곳은 세렌이 조사하지 않는 더 높고 외진 곳이었다. 세렌은 네크로맨서가 평범한 인간이기에 그나마 움직이기 편한 길 위주로 조사했었다.
이곳은 평범한 인간이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주변을 살피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지금은 깜깜한 밤이라 날이 밝아야 주변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라그 오늘을 조용히 여기서 쉬는 거다."
세렌은 한쪽 커다란 고목 아래 앉았고 라그는 세렌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원래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던 라그인데 칼멘이 귀엽다고 자꾸 무릎에 눕히는 바람에 이제 누가 옆에 있으면 자동으로 무릎을 베고 눕는다.
길 안내를 해온 늑대는 세렌 주변을 몇 번 서성이다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침이 되어 날이 밝자 태양 볕이 눈이 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세렌은 즉시 주변을 세세하게 조사했고 드디어 그렇게 원하든 사람이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기간이 좀 오래되어 흔적이 거의 지워지긴 했으나 짐승이 아닌 사람이 칼로 자른 식물의 단면은 없어지려야 없어질 수 없는 거였다.
단서를 찾으니 세렌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긴 방해꾼도 세렌을 막을 존재는 아무도 없다. 마왕도 칠무신 사신왕도. 만약 이곳에 몰레이그가 있다면 자신이 독차지하는 셈이다.
그런 생각에 흥분이 되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기쁨과 즐거움은 한순간이 되어야 값진 것이다.
그런 흥분이 오래가면 되레 판단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세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녀를 담금질한 사람이 보통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라그 너도 업히기만 하지 말고 뛰어."
"응, 좋아."
세렌이 앞서고 라그가 뒤를 따랐다. 그런 두 삶을 검은 늑대가 멀찍이 지켜 보고 있었다.
***
칼멘은 안절부절못했다. 동굴이 무너진 지 사흘이 지났다. 사령 쥐는 세렌이 가지고 있어 통신 수단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신왕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지만,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상대의 말을 믿고 결단을 내리지 말라는 테츠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꾼 사람의 말은 쉬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사신왕이 뭐라고 했던 반드시 자신이 직접 세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동굴 안에 갇혀 있을 줄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굴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으니 검과 맨손으로 일일이 흙과 바윗덩이를 들어내야 했다. 자연적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굉장한 폭발력을 지닌 익스플로전이 터졌기에 동굴이 파괴되면서 붕괴하였기에 기존 동굴의 형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진 상태였다.
칼멘이 굴을 파내더라도 지지대가 없다면 언제 천정이 다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네크로맨서가 독으로 바위와 흙을 녹여 뚫었던 것은 지반의 흔들림이나 충격이 아예 없는 방법이기에 지지대 없이 그렇게 쉽게 굴을 뚫었지만 지금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녹초가 다 될 때까지 끈질기게 조금씩이라고 굴을 파고들어 갔다.
칼멘이 보유한 물과 육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각성자이기에 한 달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동굴을 파내느라 육체적 피로감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른 갈증과 허기감이 대단했다.
입구 근처 부분에서 익스플로전이 폭발했기에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도 칼멘은 어김없이 바윗덩이를 치우고 있었다.
-쿵
칼멘은 흠칫했다. 발밑으로 약간의 진동을 느낀 것이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쿵
다시 한번 들려오는 진동은 진짜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보내는 신호인가?
확실치 않다.
진동은 점점 더 크게 느껴졌고 소리 또한 커졌다. 확실히 이건 인위적으로 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누가 안쪽에서 파고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진동은 생각보다 빠르게 커지고 있었고 소리 또한 불규칙적으로 매우 둔탁한 소리였다. 이미 무너진 동굴이다. 지반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고 이럴 때는 최대한 안전을 지켜 가면서 움직여야 재발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특히나 그냥 무너진 것도 아니고 폭발 때문에 무너졌기에 갱도 안은 완전히 엉망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소리는 마치 미쳐 날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쿵, 쿵, 쿵
소리는 더욱 심해졌고 곧 동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칼멘은 본능적으로 안쪽에서 이 소리를 일으키는 존재가 평범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재빨리 동굴 끝으로 물러났다. 자신이 나흘 동안 파낸 길이는 짧아도 백 보 정도는 되었다.
순간
-콰~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무수한 돌무더기가 일시적으로 쏟아졌다. 칼멘은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돌덩이를 튕겨냈다.
-팟
그 사이로 튕겨 나오는 무엇을 감지하고 칼멘은 뒤로 날았다. 절벽 아래도 뛰어내린 것이다. 그런데 튀어나온 것은 매우 빨랐다. 단번에 칼멘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칼멘의 뒷덜미를 덥석 움켜잡더니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칼멘은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도법을 펼쳤다.
검이 목덜미를 잡은 손을 치려 하자 상대는 발로 칼멘의 허리를 차고 위로 솟구쳐 올랐다.
엄청난 힘이 가해져 칼멘은 미쳐 중심을 잡기도 전에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대로라면 치명상을 입을 터이지만 칼멘의 상황 대처력은 천무지체 답게 기민했다. 왼손에 내공을 올리고 천마소수의 초식으로 바닥을 쳐 그 반발력으로 상체를 들어 올려 균형을 잡았고 그 순간 빠르게 떨어져 내려오는 상대를 응시했다.
옷도 심지어 속옷조차 걸치지 않는 아이가 허공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지옥참마도법의 기수식을 잡았던 칼멘은 재빨리 천마비행으로 뒤로 튕겨 나듯이 물러났다.
-쾅
소년이 떨어진 곳에서 흙더미가 치솟아 오르고 거대한 폭음이 났다.
순간 칼멘은 그 벌거벗은 소년이 마족임을 직감했다. 지금까지 만난 마족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마족이다. 그래봤자 열다섯 살 정도지만 보통 열 살 정도의 아이보다는 덩치가 있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가운데 달린 것으로 남자임을 단박에 알았지만 긴 머리카락은 엉덩이까지 치렁치렁 내려왔고 새까만 흑발은 직모로 탐스럽기까지 했다.
칼멘은 검을 세우며 말했다.
"난 너와 싸울 생각이 없어."
그렇게 말을 했지만 상대에게 일단 검을 세운 동작 자체가 싸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과 마찬가지인 행동이었다.
-쉬이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벌써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익"
상상조차 할수 없는 빠르기다. 머릿속에서 참마도법의 초식이 떠오르기도 전에 상대는 벌써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쉿!
쭉 뻗어오는 팔을 보면서 칼멘은 다급히 몸을 틀었다.
검법보다 몸을 틀어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오른손을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곧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우윽."
소년의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칼멘의 반응이 따라가지를 못했다. 소년의 발등이 칼멘의 등을 찼는데 그 충격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다고 당하기만 할 칼멘은 절대 아니다. 내공이 흩어지지 않게 심결을 유지한 체 비로소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반격이 시작되자 소년은 검의 사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이 틈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칼멘은 바로 지옥참마도법으로 전환했다.
고통을 감내하고 검과 일체가 된 칼멘의 공격은 대단했다. 세렌이 위압감과 묵직함을 가진 공격이라면 칼멘의 공격은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공격이었다.
소년이 일시적으로 물러난 것도 칼멘의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한방의 충격에 따른 고통 때문에 제대로 검을 내지르지 못했고 검을 잡은 팔도 떨렸다.
-팟
소년은 단숨에 달려들어 칼멘의 검을 맨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검을 빼려고 내공을 실어 아래로 당겼으나 이미 검은 소년의 손에 완전히 달라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칼멘의 모가지를 움켜잡았다.
단번에 안압이 높아지고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소년의 손아귀 힘은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뿌득
칼멘의 목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발을 들어 올려 소년의 복부를 걷어차려 했으나 모가지를 잡혀 버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절망의 공포가 칼멘을 확 덮쳐왔다.
소년이 더 힘을 주면 이젠 끝이었다.
-킁, 킁
소년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아니면 무언가 발견한 것인지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그리곤 코를 칼멘의 어깨에 밀착시키며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어깨를 시작으로 여러 부위의 냄새를 계속 맡더니···.
-턱
갑자기 모가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힘이 쭉 빠졌던 칼멘은 휘청하며 뒤로 물러났다.
소년은 그런 칼멘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절벽 아래쪽으로 향해 무서운 속도 달려가 버렸다.
"후아."
칼멘은 자기 목을 매만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지옥참마도법을 펼칠 시간도 없이 소년에게 제압당했다.
"왜지? 충분히 날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칼멘은 소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소년은 동쪽으로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내공을 사용해 경신을 쓰는 것도 아닌 순전히 근력으로 뛰는 데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칼멘은 자신이 살아났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 소년이 왜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인지 알수 없었다.
소년은 마족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만난 마족 중에서 가장 강한 마족이었다.
칼멘은 옷소매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자기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났기에 그냥 간 걸까? 알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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