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래몽래인 님의 서재입니다.

초보형사, 눈 떠 보니 무림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래몽래인
그림/삽화
배민기
작품등록일 :
2023.05.10 14:48
최근연재일 :
2023.08.02 23:37
연재수 :
67 회
조회수 :
7,906
추천수 :
330
글자수 :
295,344

작성
23.06.20 21:02
조회
68
추천
3
글자
10쪽

<41> 백발의 나체 노인, 생의선.

DUMMY

*

유유곡 안으로 들어가서도 한참을 헤매야 했다.

단 한 명이라도 수십 년을 산 곳이면 생활감의 흔적이 있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자주 다녀 길이 난 곳도 없고 사람이 남긴 부스러기 하나 없었다.

그냥 무작정 여기저기 뒤집고 다녀야만 했다.


“생의선님! 어딥니까? 어디 계세요?”


로운의 고함이 쩌렁쩌렁 온 산을 울렸다.

대답이 전혀 없었다. 놀란 짐승들과 산새들만 푸드덕 달아났다.


두어 시진을 헤매던 끝에 그를 만났다.


“꺄악!”


취소연은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하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왔고 흰수염이 길게 자라 다행히 그곳을 가리고 있었다.

다행이란 건 몸에 걸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수염이 아니었다면 덜렁거리는 물건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사실 바람이 불어 수염이 날리면 잠깐씩 그곳이 드러났다.

소연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 돌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키보다 큰 장대를 지팡이 삼아 짚고 벌거벗은 채 수염을 드리우고.

고함을 지른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의선 어르신 맞습니까?”


대답 없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아닙니까? 아닐 리가 없는데. 맞지요, 생의선?”


“어으.....”


잠시 입을 벌리고 소리를 냈지만 말은 아니었다.


“소녀 취소연이라고 합니다. 할아버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 말에 처음으로 눈빛이 살짝 변했다.


“어.....응......”


말인지 신음인지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한참 동안 취소연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생의선님을 뵙기 위해 중원에서 왔어요.”


그는 말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걸을 때 마다 맨 살 엉덩이가 실룩실룩 대는 바람에 로운과 소연은 따라가면서도 괜히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

통나무로 얼기설기 기둥을 세우고 나뭇가지와 풀로 지붕을 대충 덮은 초옥이었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안쪽에 나뭇잎을 대충 깔아 만든 곳이 잠을 자는 곳인 것처럼 보였다.

그가 거기 털썩 앉았다.


“아..... 아잔..... 앉잔...... 아.... 앉아....”


몇 번을 더듬다가 앉으란 말을 했다.

짐승처럼 이상한 소리로 웅얼대던 건 너무 오랫동안 사람의 말을 하지 않아서였다.

아예 말을 잊어버린 거였다.


로운과 소연이 그와 마주 앉았다.


“마...해.... 너.... 할버.....아지.....”

“네? 아! 할아버지?”

“응.... 친구... 취학명.... 완나...”


다른 말은 더듬거렸지만 취학명이란 이름만은 정확하게 말했다.

세상을 다 잊은 그도 친구만은 잊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아왔던 그를.


“할아버지가 이곳을 찾아왔던 건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어르신에 대해서도 생사조차 모른다고만 하셨지요.......”


소연은 생의선이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쉽게 그리고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교주의 검에 죽임을 당한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 여길 찾아오게 된 사연까지 모두.

소연의 긴 얘기가 끝나자 밤이 깊어 있었다.


얘기를 다 들은 생사의가 회한에 잠겼다.

초옥 밖으로 나가더니 과일 몇 개와 말린 고기를 가져와 두 사람에게 주었다.


배가 고팠던 로운은 순식간에 과일 몇 개와 고기를 해치우고는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취소연이 과일과 말린 고기를 조금 먹고 나자 생사의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나는.... 맞다.... 생사의..... 지금은 사의귀......”


빛나는 시절은 짧았고 길고 긴 고통의 세월, 그의 일생이 흘러나왔다.


*

지다원.

화타의 환생이라며 생의선으로 불린 그는 병약한 몸으로 태어났다.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던 표국을 운영하던 그의 부친은 강호 곳곳으로 일을 나갈 때 마다 몸에 좋은 영약과 약초를 구해 아들한테 먹였다.

또한 부친이 워낙 강직한 사람이라 거대 세가들은 물론이고 강호 협사들과의 친분도 돈독했다.


병약했던 유년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소년 지다원은 강해졌다.

그가 표국 일을 따라나서면서 만나게 된 많은 협객 고수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내렸다.

어린 취학명과 친분을 쌓게 된 것도 그 때였다.

그러다 나이 열넷에 의성(醫星)이라 불리던 풍일관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뛰어난 재능으로 단 오년 만에 사부 풍일관의 경지까지 올랐다.


의성의 문하를 떠나 높은 산과 깊은 강을 헤매며 약학과 독학을 연구했다.

그가 스쳐간 마을마다 죽어가던 환자들이 생명을 얻었다.


겨우 약관의 나이에 사람들은 그를 의선(醫仙)이라 불렀다. 사부인 의성 보다 더 높인 칭송이었다.


일월교가 중원을 휩쓸고 취학명이 군웅맹의 깃발을 올렸을 때 지다원은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가 연단한 몇 알의 단약으로 취학명의 철검은 더욱 강해졌다.


군운맹은 일월교를 휩쓸며 그들의 본교인 설산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취학명이 철검으로 일월교주 율리극의 목을 베었다.


철검 취학명, 그리고 생의선 지다원은 강호 역사상 가장 거대한 공을 세웠다. 이제 겨우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두 사람의 손에서 태평성대가 열리게 되었다.


맹주가 된 취학명은 여전히 할 일이 있었다. 아직도 드글대는 탐관오리와 타성에 젖은 황궁의 벼슬아치들을 암중에 격살했다.

백성을 위해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다원은 조금 달랐다.

그는 현실에 발을 담그는 것 보다 순수한 의학의 경지에 오르고 싶었다.

조용히 군웅맹을 떠나 한적한 곳에서 의술에만 전념했다.

사부인 의성의 딸과 결혼하고 어여쁜 아들도 낳았다.


그런데 불행은 아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내가 힘겹게 낳은 아들이 병약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아니 자신보다 몇 배나 더 약한 아이였다.


미안했다. 자신을 닮아서 그런 것일 테니까.

그래도 별 걱정은 없었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내리라 생각했다.

자기가 겪었던 길이기 때문에 훨씬 쉬울 거라 생각했다.

아버님은 표국을 했지만 자기는 의원이기 때문에 훨씬 더 잘 할 거라 생각했다.


사람의 생각 중에 자신감은 득이지만 자만심은 실이다.

자신감 만으로 엄청난 이득을 가져오기 힘들지만 자만심은 때로 치명적인 실패를 낳고 만다.


아들의 몸을 자세히 살폈고 병의 원인과 진행도 완벽하게 파악했다.

귀하디귀한 재료로 오랜 시간 연단한 약을 썼다.

그런데 지다원이 마지막 순간 그 약에 조금 욕심을 부렸다. 몇 가지 약재를 추가 했다.

약효가 제대로 듣기만 하면 내공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나아가 임독양맥까지 타동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들이 죽었다.

약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지다원 그의 자만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내가 죽었다.

아들을 따라 가겠다고 자결한 것이다.


“아..... 그런 일이..... 그 일은 할아버지가 얘기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몰랐으...니까.... 내가.... 말... 안해... 하지.... 않했으니까.....”


생의선이 어눌한 말투보다 그 날을 떠올리는 처연한 눈동자가 더 가슴 아팠다.


거기까지 얘기를 끝낸 생의선은 천천히 돌아누웠다.

어두우 보이지 않았고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소연도 구석에 누웠다.

너무나 피곤했지만 슬픔에 쉽게 잠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 드르렁 드르렁


아무 것도 모르는 이로운의 코고는 소리만 초옥 밖 하늘로 울려 퍼졌다.



*

유유곡에 사람이 들었다.

일대 고주 취학명이 다녀간 지 수십 년이 지나서였다.

취소연과 이로운


그런데 다음날 아침, 또 다른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지밀원주 무영흔


유유곡이라 씌어진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담비 한 마리가 포르르 뛰어 내려가 무영흔의 팔에 안겼다.


“고샘했다. 섬(閃).”


무영흔은 비둘기, 담비와 매는 물론이고 늑대와 수리, 심지어 쥐도 길렀다.

그것이 모두 무영흔의 눈과 귀가 되고 때로는 입이 되어주었다.


그중에서도 섬이 무영흔이 가장 아끼는 녀석이었다.

아비인 전(電)보다 더 영리하고 빨랐다.


27의 나타가 죽기 전부터 섬은 로운의 뒤에 붙었다.

그런데 천하의 로운도 섬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섬은 열흘 동안 몰래 로운을 따르며 무영흔을 이끌어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


손바닥에 몇 알의 말린 앵두를 올려놓자 맛있게 먹었다.

담비는 작은 짐승을 잡아먹지만 나무 열매도 좋아라 한다.

섬은 특이하게도 앵두 말린 것을 가장 좋아했다.


맛있게 먹은 섬은 기분 좋은 듯 빈 손바닥을 핥더니 폴짝, 자신이 왔던 길로 빠르게 사라졌다.


유유곡 앞에 무영흔만 남았다.

하지만 무영흔은 혼자 유유곡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적을 앞에 두고는 백전백승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다른 조직은 몰라도 적어도 지밀원은 그래야 했다

의문의 인물인 이로운과 그의 곁에 있는 취소연을 홀로 막아 설 수는 없다.

또한 유유곡 안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유유곡으로 진입은 주력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라야 한다.


빠른 시간 안에 이곳까지 올 수 있는 건 일월교에서도 몇 명의 이름 있는 고수들 뿐일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보름 가까이 걸릴 일이다.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자신은 그러한 만약의 유의미한 사태에 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 지밀원이 해야 할 역할인 거다.


무영흔이 하늘을 보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비행 중이던 매 한 마리가 신호를 받고는 먼 하늘로 사라졌다.

무영흔의 매 ‘추색’이다,


추색이 먼저 날아가 소집령을 전할 것이고 뒤이어 섬이 도착하면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 올 것이다.


무영흔은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몇날몇일 지낼 적당한 은거지를 찾아야 하니까.


균열.


지밀원주 무영흔은 이런 긴장감이 좋았다.

평온한 일상에 균열이 오는 자극을.

그런 긴장감이 오히려 그를 여유롭게 했다.


자신 마음 속 ‘균열’의 여유로

교주가 찾던 그 ‘균열’을 막을 것이다.

낙장불입.jpg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초보형사, 눈 떠 보니 무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공모전 이후 / 연재 주기에 관해 / 6월 3일 수정판 +1 23.05.14 125 0 -
67 <67> 묵광멸천(墨光滅天) +2 23.08.02 39 2 10쪽
66 <66> 이게 죽음인가, 생각보다 편안해..... +4 23.07.31 43 3 10쪽
65 <65> 희망은 평행우주 저 편의 진파란. +3 23.07.26 39 2 10쪽
64 <64> 일광개천(日光蓋天) 대 일광개천(日光蓋天) +2 23.07.25 35 2 10쪽
63 <63> 천 개의 봉우리가 몸을 떨다 +5 23.07.24 42 3 10쪽
62 <62> 교주와 검무룡, 율리납과 율리혁 +6 23.07.21 41 2 10쪽
61 <61>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 +4 23.07.20 42 2 9쪽
60 <60> 하루를 살아간다는 건 하루만큼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2 23.07.19 45 2 9쪽
59 <59> 불령산 소격동의 마지막. +3 23.07.18 47 2 9쪽
58 <58> 소격동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내 +2 23.07.14 66 2 10쪽
57 <57> 마음으로 죽이는 것, 실제로 죽이는 것. +2 23.07.13 58 2 10쪽
56 <56> 죽고 죽이고, 또 죽이고 죽는 +1 23.07.12 68 2 11쪽
55 <55> 그 영화의 그 대사 '좋아해요', '나도 알아' +5 23.07.11 55 2 9쪽
54 <54> 로운이 취소연의 양 빰을 후려치고 +1 23.07.10 60 2 10쪽
53 <53> 사흘에 한 번, 악령의 식사를 하는 자 +1 23.07.07 67 2 9쪽
52 <52> 고맙다...... 라는 말 +3 23.07.06 66 2 9쪽
51 <51> 원한과 복수의 고리를 끊는 일 +2 23.07.05 68 2 10쪽
50 <50> 세상에는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2 23.07.03 58 2 10쪽
49 <49> 그녀의 낙장불입은 입맛이 쓰네 +3 23.06.30 65 2 9쪽
48 <48> 새꺄! 나 왼손잡이야. +3 23.06.29 71 2 9쪽
47 <47> 나한테 코피 내면 너는 피똥 싸는 거다. +2 23.06.28 68 2 10쪽
46 <46> 유유곡의 결전 +4 23.06.27 74 2 9쪽
45 <45> 임독양맥. 생사현관. 환골탈태. +4 23.06.26 74 2 9쪽
44 <44> 진심을 다해 죽음을 입에 담는 이 +2 23.06.23 69 2 9쪽
43 <43> 열빙지(熱氷池)에서 사흘 낮 밤을. +5 23.06.22 68 3 10쪽
42 <42> 죽어도 죽지 않는 자의 오로지 죽기 위해 사는 운명을... +3 23.06.21 66 3 9쪽
» <41> 백발의 나체 노인, 생의선. +2 23.06.20 69 3 10쪽
40 <40> 멀고 아득하고 그윽한 곳, 유유곡(幽幽谷) +3 23.06.19 63 3 10쪽
39 <39> 소연아, 치킨 좋아하니? +5 23.06.16 86 3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