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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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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2018.03.26 19:27
연재수 :
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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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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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37,868

작성
17.01.10 19:31
조회
420
추천
9
글자
11쪽

엽인들 [친우..간섭 ]

DUMMY

‘장마라더니 비라도 좀 오지.’ 창수는 내리쬐는 볕만큼이나 뜨거운 입김을 뱉어냈다.


오늘 처음으로 인터벌러닝이 아닌 전력질주만으로 10km를 뛰었는데, 체력이 달려 기절할 것만 같았다. 이 정도로 무리하면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하루가 힘들테지만,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형도 하는데, 내가 못하겠어?’


길가로 무성하게 자라난 이름 모를 잡초와 희고 노란 꽃들을 멍하니 보며 호흡이 안정되기를 기다리니, 역시나 그 생각이 뇌리를 맴돈다.


‘이게 대체 뭘까?’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약을 주에 두세 번씩은 사용하고 있다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찝찝함을 다 떨친 건 아니었다. 하나..


‘이렇게 효과가 죽이는데, 안 쓸 수도 없고.’


몸의 떨림이 벌써 잦아들자 그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빌어먹을 놈의 어둠이 찾아올 게 뻔해서 서둘러 탈의 정문으로 향했다.


‘일단은 샤워부터 하고.. 운동이나 해야지.’


묵직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며 축축한 티셔츠를 벗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수 왔냐?” 그는 체육관의 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막 근력운동을 끝냈는지 땀에 흠뻑 젖은 명진이 벤치프레스 주변에 널브러진 아령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 형..”


창수는 말끝을 늘이며 1층 창가 쪽을 힐끔 쳐다봤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널린 트레이닝복과 속옷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또 여기에서 잔 거야?”

“나야 뭐, 관장님도 별 말 안 하시고 해서..”


정리를 끝낸 명진은 창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탈에서 살아도 되냐고 물어볼 참이야, 집에 가면.. 또 그 지랄일 테니까.”


명진은 씁쓸한 미소를 그리며 샌드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창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에이, 형! 그래도 그건 좀 오버다. 최대한 빨리 이 허접한 곳에서 벗어나야지, 평생 이렇게 살 것도 아니잖아, 형도 많이 좋아지지 않았어?”

“그래, 평생 이렇게 살 순 없겠지.”


대충 고개를 끄덕인 명진은 2m짜리 갈색 샌드백 앞에 서서 툭툭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를 지켜보던 창수가 길게 한숨을 내뱉는다.


‘있다가 둘이서 얘기 좀 해봐야겠네.’


비쩍 말라서 그런지 조금은 신경질적이게 보이는 외모로 툴툴거리곤 했지만, 항상 귀를 열어 주변의 말을 듣고 따뜻한 눈빛으로 희망을 말하던 남명진은 이제 없었다.


‘나도 그렇고 형도 그렇고.. 정말 많이 변했어.’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매는 가끔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워 보였다. 과거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커진 몸은 창수로서도 위압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고, 육중한 어깨를 비롯한 지방이 거의 없는 상체와 두꺼운 허벅지는 그가 얼마나 노력했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피부가 찢어질 정도로 샌드백을 쳐대는 모습을 보면 활력이 아니라 선을 넘은 광기가 느껴지곤 하였기에, 그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보다 똑똑한 양반이니까 나름 생각하는 게 있겠지만..’


자신 역시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운동에 집착했지만, 명진처럼 모든 걸 중단한 채 강해지는 것 하나에 삶을 송두리째 바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저렇게까지 안 해도 살만한데, 형은 아직도 시달리는가 보네.’


창수로서는 도저히 그의 집착과 광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명진을 볼 때마다 눈빛에 안타까움이 서리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는 다시금 한숨을 뱉어내며 샤워실로 향하려다가 주춤 멈춰 섰다.


‘씨 팔, 뭐야. 이 정도였어?’


명진의 움직임이 격렬해지며 타격에 무게가 실리자 샌드백이 서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죽의 재질이나 안에 든 것이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2m짜리 샌드백은 굉장히 육중해서 웬만한 타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창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벌써?’


불과 일주일 전에 자신이 형에게 했던 충고가 귓가를 맴돈다.


‘형, 이렇게 무겁고 큰 샌드백으로는 운동이 안 돼. 타격감이 전혀 없어서 치면 칠수록 몸만 위축되거든. 이것 봐, 내가 쳐도 꿈적하지 않잖아. 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형한테는 저기 저게 더 잘 어울리니까, 그냥 내 말대로 해.’


창수는 자신이 가리켰던 80cm짜리 샌드백을 힐끔 보곤 2m짜리 샌드백으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명진이 휘두른 다리에 강타당한 샌드백이 비명을 토하며 허리를 접는 게 보이자, 절로 등골이 서늘해진다.


‘설마 형이 나보다 강한 거 아니야? 에이, 그럴 리 없어.’ 문득 든 생각을 바로 부정하면서도 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타까움이 서려 있던 눈빛에 옅은 분노와 열망, 불안감, 시기, 그리고 경쟁심이 가득 차오른다. ‘빌어먹을.’ 그는 솟구치는 열기를 거칠게 뱉어내며 손에 든 윗옷을 구겨 던졌다. 그리곤 벤치프레스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그를 힐끔 본 명진이 호흡을 고르며 물었다.


“샤워부터 안 하고?”

“어, 어차피 땀 흘릴 건데 괜히 한다 싶네. 조금 뛴 거 가지고 샤워하는 것도 웃기고.. 나 신경 쓰지 말고 형은 형 할거 해.”


창수는 거칠게 호흡을 조절하며 벤치프레스에 누웠고, 피곤이 서린 눈으로 그를 보던 명진은 호흡이 안정되자 다시 움직였다.


‘더 강해져야 해.’


샌드백을 때린 주먹의 굳은살이 결국에는 찢어져서 피가 배어 나왔건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그를 이토록 치열하게 하는 건 창수보다 더 공포를 느끼거나 두려움에 떨어서가 아니었다. 그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건 재미있게도 처음으로 느끼는 제대로 된 성취감이었다. 딱히 특출한 재능이나 큰 열정없이 평범하게 살아온 인간으로서, 언제 또 이렇게 놀라운 성취를 맛보겠는가?

혹시 취업이라도 했다면 달랐을까?

아니겠지, 살아가는 것과 성취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니까. 해서 그에게 벗어남이라는 목표는 어둠 속 그뿐만이 아니라, 정체된 채 폐인으로 썩어가던 과거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탈[脫], 마음에 들어, 정말로 멋진 말이야.’


보이지 않는 터널을 통과하려 했던 노력들.. 하루에 2, 3시간씩 자면서 몸부림쳤던 치열한 싸움은 그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물론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일이었지만, 2년을 넘게 하고도 과실을 따먹지 못했던 시절보다 거울 속 나를 보고 웃는 지금이 더 좋고 편했다.


‘혹시 내가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몸이 좋아졌지만, 아무리 운동해도 죽음에의 공포를 완연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왜..?’


귀를 쓰면서 비약적으로 운동량을 늘리고 몸도 충분히 감당해내고 있었지만, 그 불안감은 보란 듯 덩치를 불려갈 뿐이었다. 예전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고요한 곳에서 심적 평온을 얻을 때면 여지없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래도 좋아진 걸 보면 방향은 맞게 잡은 것 같은데, 뭐가 문제지? 분명히 뭔가 부족한데.’


어금니를 악문 채 마구잡이로 강타하던 샌드백을 얼싸안고 숨을 헐떡이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뒤돌아 창수를 불렀다.


“창수야, 할말 있으니까 듣고 시작해.”


워밍업을 하려고 140kg의 바벨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던 창수는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어, 듣고 있으니까 말해.”

“야, 우리 격투기 같은 거 배우러 다닐까?”


바벨을 천천히 들어올리면서 자세를 잡아가던 창수는 머금었던 호흡을 바로 뱉고 반색하며 말했다.


“형도 그런 생각했어?”


그는 바벨을 걸이에 걸고 일어나 앉았다.


“사실은 나도 그래야 될 것 같았거든. 우리 정도면 몸 만들기는 끝난 거잖아? 복싱이나 유도 합기도, 어딜 가도 바로 에이스 대접 받을 걸?”

“그래?”

“그럼, 형은 그런데 안 다녀봐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병신짓 할 때 조금 해봤거든. 나보다 잘 치는 놈이 없어서 그냥 나왔는데.. 형, 그러면 오늘은 그냥 운동 쉬고 같이 다닐만한 곳을 찾아 볼까?”

“그러자, 이 정도면.. 뭔가 변화를 줘도 될 것 같으니까.”


체육관 주변을 절대 떠나지 않는 명진의 긍정적인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창수는 주먹을 뻗어 그의 어깨를 살짝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형하고 나하고는 뭔가 통하는 게 있다니까."

“그래, 그럼 어디가 좋을까? 네가 다녀봤다니 한 번 말해봐.”

“어, 내가 몇 군데 봐둔 곳이 있긴 한데, 거기가 어디냐면..”


둘은 근처에서 본 다양한 무술도장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창수가 일하는 술집과 탈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종합격투기 도장으로 둘의 의견이 모아지자, 명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결정됐으면 바로 움직이자. 샤워는 갔다 와서 하고 일단 옷부터 걸쳐.”

“어, 형은 이런 게 좋다니까.”


환히 웃으며 돌아서던 창수가 멈칫하더니 목례하자 따라 시선을 옮기던 명진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관장님.”


귀를 준 이후로 일체의 간섭도 않고 지켜보기만 하던 그가 불쑥 나타나자 명진은 ‘벌써 이틀이 지났어?’라는 생각부터 했다. 그리곤 귀를 맞을 때마다 느끼는 지독한 냉기와 통증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킬 때, 관장이 입을 열었다.


“남명진이라고 했었지?”

“예, 관장님. 이제 좀 기억해주세요.”


그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너스레를 떨었지만, 관장은 한치 미동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내가 길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예, 관장님. 돈도 받지 않고 그렇게 귀한 약을.. 덕분에 숨통도 트이고 몸도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몸을 만들었으니까 뭔가 다른 걸 해야겠다?”

“예, 그게.. 탈을 떠나려는 건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몸은 어느 정도 만들었으니까, 뭔가 다른 걸 한 번 해보는 것도 좋겠다, 뭐 이런 생각을.. 그러니까 제 말은..”


관장은 괜히 주눅이 들어서 횡성수설하는 명진의 말을 잘랐다.


“몸을 만들었다?”


명진은 어느새 대여섯 걸음 앞으로 다가온 관장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예,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무슨 조언이라도 해주시려는 건지?”


관장의 무표정한 얼굴에 한줄기 조소가 그려진다.


“덩치만 커졌지 딱히 달라진 것도 없다. 여전히 약해 빠져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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