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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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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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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37,868

작성
16.12.2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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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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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프가니스탄 [Episode..1] 예지자

DUMMY

뿌연 흙먼지를 흩뿌리며 비포장도로를 질주해가는 흰색 랭글러의 운전석,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시원한 바람을 즐기던 여인은 차가 사막지대로 들어서자 기어를 4단으로 변속하곤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RPM이 급격히 상승하며 랭글러 특유의 육중한 엔진음이 온몸을 간지럽히자 그녀는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뜨거운 햇볕과 메마른 대지 그리고 모래바람의 조합은 드라이브하기에는 썩 좋은 환경이 아니었음에도, 얼굴에 띤 미소가 그렇게 상큼할 수가 없었다. 암울한 아침과 보다 더 막막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건만, 지난 밤사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저런 표정을 지을까?

그녀는 수백 년 간 지겹도록 봐온 태양을 습관적으로 올려보다가, 햇살이 본격적으로 강해지자 기어를 잡은 손을 뻗어 선바이저를 젖혔다.


‘없네? 선글라스를 어디에 뒀더라?’


생각과 동시에 습관적으로 콘솔 박스를 열다가 “아, 맞다. 거기에 뒀지.”라고 중얼대며 글로브 박스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새하얀 손가락 끝에서 가느다란 핏줄기들이 뿜어져 나와 마치 손처럼 움직여 글로브 박스의 문을 연다. 그리곤 빨간색 큐빅으로 장식 된 안경집에서 보잉 선글라스를 휘감아 와 그녀의 얼굴에 씌워 주고는 점점이 흩어졌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피에 대한 지배력의 행사는 미약하게나마 타고나는 것이라 언제나 해왔던 일일 텐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손을 들어 선글라스를 살짝 바로잡곤 노골적으로 태양을 올려다보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에 다시금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놀랍게도 어떤 순박함마저 서려있다.


“그래, 이런 기분이었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거듭 중얼대며 시원하게 웃은 그녀는 자신에게 이런 놀라운 기적을, 그저 당연하다고 여긴 족쇄를 벗어 던지고 무한의 자유를 만끽하게 한 자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결국에는 함께하게 될 거야.’


진혈로 학살조장의 몸에 술식을 새기고 전승의 술을 발현하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와 의식의 공유 정도만 하려고 했었는데 아예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 그대로 동화되고 만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혼란스러워할 때, 그의 내면에 도사린 거대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 모를 굶주림과 치열한 투쟁심, 거대한 증오를 충족지 못해 끊임없이 분노하며 자신의 영혼까지도 갈기갈기 찢어 삼키려던 파괴적인 흐름과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그저 깊디깊어서 슬쩍 본 것만으로도 자아를 상실케 했던 무한의 심연.


'세상에.' 그 경이로운 괴물들과 마주하니,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들은 하나에서 분열된 것이 아니라 본래 완전한 둘이요 각기 다른 존재라 한 몸에 공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결코 저렇게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녀의 영혼이 분쇄되고 말았다. 그리곤 저 깊은 심연 속으로 끌려들어가며 육체를 이루는 진혈마저 산산히 흩어질 때, 둘을 품고 있기에 오롯이 하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가 손을 뻗어 그녀를 끄집어 올렸다. 그리곤 속삭이기를..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들었다.’


익숙한 음성이 들려와 자신이 왜 살아남으려고 했었는지를 기억나게 하자, 조각난 육신과 영혼이 순식간에 재건돼 밖으로 뱉어졌다. 그렇게 학살조장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진혈은 바토리라는 하나의 주체로서 오롯이 뭉쳐 대지를 밟았다.


‘이번에는 정말 끝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살아나는구나.’


머릿속 수많은 의문을 뒤덮는 커다란 안도감에 취해서 길게 한숨 뱉고 눈을 떴는데, 이런 빌어먹을 마침 태양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이게 뭐야!’


혈인의 권능을 지닌 상태로 태양 아래 서면 어찌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그저 허망한 얼굴로 눈을 감다가,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을 쓰다듬고 초라한 나신을 포근히 감싸 안는 순간 전율하며 눈물을 터트렸다.


“이제, 누구도 날 속박할 수 없어.”


결코 벗어나지 못할 거라 여긴 족쇄가 사라졌음에 오열하며 위를 올려다보니, 거대한 폭풍 속에 오롯이 홀로 서 있는 그가 있어 자신을 내려다본다.


“당신이 나를 구원해 주셨군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고 손을 뻗어 은인을 찬양하려는 순간, 오래된 기억 속 서[書]의 한 구절이 떠올라 입 밖으로 뱉어졌다.


“정말 감동적이긴 했는데, 그래도 적당히 울었어야지 너무 징징거린 거 같아. 아, 내 스타일은 원래 그런 게 아닌데. 완전 구겼지 뭐야? 이상한 노래를 부르면서 피눈물까지 흘려 댔으니, 그가 날 어떻게 기억하겠어? 그건 아닌데..”


도톰한 입술을 삐죽이며 괜히 투덜대던 그녀는 이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부드럽게 핸들을 틀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이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곧 다가올 수많은 시련과 전투를 이겨내고 홀로 서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며 의문을 찬찬히 정리해갔다.


‘흑기사가 입에 달고 살았던 부정자가 만일 그분이라면, 이면이 아예 뒤집어 지겠지? 아니야, 그가 언급한 부정자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기억 속 단편들을 잠시 더듬어 보던 그녀는 답 없는 의문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머릿속 한 귀퉁이로 던졌다.


‘자, 이제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일가의 추적에서 벗어날 방법이나 고민해 보자.’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도시를 향해 힘차게 액셀을 밟던 그녀는 학살조장과의 마지막 대화가 떠오르자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나의 이름은 현[現], 뜻은 나타남이라고 하였다. 바토리, 네가 나를 학살조장이라 부르고 싶다면 받아들이겠다.”

“받아들이겠다는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그래서..”


곧 다가올 암울한 미래가 떠올라서 말끝을 흐리니, 학살조장은 여전한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자리를 비워 두지.”


그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를 마주보며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이던 그녀는 길게 한숨을 뱉어 미련을 털어내곤 부드럽게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조장님.”


현이 작게 끄덕이자 그녀는 시원한 미소로서 작별을 고한 뒤에 랭글러로 올랐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고 잠시나마 서로를 기억 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예지자는..


“아니, 무슨 바보도 아니고 똑똑한 것 같더니 왜 말귀를 못 알아먹어?”


답답한지 냅다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 땅이 꺼지라 한숨 쉬다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리모컨을 찾아 개방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누르곤 발코니로 향하며 다시 툴툴거렸다.


“그냥, 따르겠습니다. 사실은 제가 적이 조금 많은데, 도와주세요! 했으면 그.. 이상한 괴물이 그건 내 알바 아닌데? 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자기 혼자서 어떻게 추적을 견뎌내려고 저러는 거야? 설마, 저대로 죽는 거 아니야?”


발코니로 들어서던 중 쌀쌀한 바람이 몸을 휘감아 오자 그녀는 이젠 진정 해야겠다며 크게 심호흡을 하다가, 이내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홀로 설 거면 자기처럼 멀쩡하게 일어선 구울이라도 데려가던지. 이제는 나의 권속이 아니네요, 라는 건 또 뭐야? 아, 진짜 답답하고 이해 안 되네. 자기도 그 아스모데우스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면서, 정말..”


환상 속에서나 존재할 아름다움의 극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자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옅은 미소를 띠며 주억거렸다.


“그가 직접 나서지는 않을 테고, 그 오래된 괴물들만 아니면 나름대로 할 만 할지도 몰라. 그런데 정말 그들이 나서지 않을까?”


가주 앞에서도 무릎 굽히지 않던 자들 중 단 한 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오자 그녀는 발코니 난간에 힘없이 기댔다. 그러다 문득 바토리라는 여인의 진면목이 떠오르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내가 왜 그 마녀 편을 들어? 그 여자도 사람 목숨을 무슨.. 그냥 사람 잡아먹는 괴물 중 하나잖아? 그 현이라는 남자도 그렇고, 자기들이 뭐 어떻게 되든 내 알바 아니지. 물론 그 꼬마한테 잘해준 건 마음에 걸리지만, 알고 보면 걔를 고아로 만든 것도 그들이잖아. 그러니까..”


화려한 뉴욕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그렇게 중얼대던 그녀는 갑자기 피곤이 몰려들자 짜증스레 기지개를 켜고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발코니로 향하는 문이 자동으로 닫히며 세상과 집을 완벽하게 단절시킨다.


“아, 짜증나. 신경을 너무 썼나 봐. 이러다가 다시 잠들겠다."


바알제불의 약을 먹고 잠을 거부한 게 아니라 악몽이 원하는 시간만큼, 그러니까 약 19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자연스럽게 일어난 거라 별다른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예지의 후유증인 만성피로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일단은 샤워부터 하고 노트북을 켠 다음에 후딱 일을 해치우고 나가자.’ 그녀는 집에서 항상 입고 다니는 실크 재질의 검정 원피스를 벗어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세상 모든 여성이 원할 법한 곡선을 모조리 갖춘 나신이 드러나자, 그를 혼자 보기가 아까웠던 천장의 조명들이 은은한 불빛을 밝혀 시대의 미인을 스토킹하기 시작한다. 그저 아름다운 여인은 손에 든 원피스를 샤워실 앞 빨래바구니에 던지고 문을 밀어젖히면서, “그런데 내가 왜 악몽 따위를 현실이라고..” 까지 중얼대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래, 내가 왜 꿈을 현실이라고 여긴 거지?”


그녀의 매끄러운 살갗에 소름이 돋는 순간 오랫동안 외면했던 진실이 흘러나온다.


“그 바토리라는 여자가 바알제불과 나, 예지자인 다프네를 알고 있었으니까. 잠깐만, 세상에.. 그녀는 날 알고 있었어.”


그대로 다리가 풀려 주저앉자 세상에서 가장 익숙하고 무서운 음성이 귓전을 맴돌았다.


‘다프네 양, 명심하십시오. 이 선을 넘으면 당신이 향유해 온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그때는 단순히 그의 정체를 의심해서 그런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태껏 내가 꿈꾼 그 끔찍한 일들이 현실이었다면..?’


셀 수없이 많은 사람의 고통과 참혹한 죽음이 어디선가 벌어졌거나 벌어질 일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그냥 지켜봐도 되는 거야? 그들의 이야기로 돈이나 벌면서?’


그녀는 세상의 그림자로부터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인간에 대한 믿음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경멸했으면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한 자들의 원한과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는 건, 악몽 속에서 그들과 하나 되어 절규하다 잡아 먹혀 봤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그냥 악몽에 불과해서 겨우 버틸 수 있었는데..”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불현듯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옆에 놓인 빨래바구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거였던 거 같은데..?”


그녀는 빈티지 풍의 타이트한 청바지를 찾아 들고는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구겨진 명함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뭐야, 정말로 있어? 그런데 왜 이제야 생각이..아니, 왜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지?”


어디서나 볼법한 명함에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전화번호 한 줄만 달랑 찍혀있었다. 청바지를 빨래바구니에 던지고 검정 원피스를 꺼내서 다시 걸친 그녀는 소파 위로 돌아와서 기억을 더듬었다.


‘명함이 있다는 건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는 거잖아, 그런데 왜?’


불과 나흘 전에 벌어진 일이었음에도 마치 어린 시절을 되짚는 듯 흐릿하기만 하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더라?”


바알제불의 소개로 다니게 된 정신병원의 조용한 대기실에서 이 명함의 주인을 만났었던 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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