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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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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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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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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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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5
글자수 :
2,037,868

작성
16.12.28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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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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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12쪽

엽인들 [학살조장..2]

DUMMY

“행동반경이 나와는 다를 테니 민간인들이 있는 좁은 선상에서 MP7은 사용하지 못할 테고, 글록은 간편해도 암살에 좋은 총은 아니야. 몸에 알코올이 들어가면 총구가 흔들리거든. 보디가드 한 명 정도 사살하고 벌집이 되겠지.”

“예?” 놀란 채프먼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한데 목소리가 워낙 커서 선상 위 모두의 시선을 끌고 말았으니..


그는 일순 멈칫하며 빠르게 주변을 살피고는 벌떡 일어서서 보드카 병을 들어 올리고 더 크게 소리쳤다.


“우리의 트레시아와 영원히 남을 추억을 위하여!”


이제 곧 모두가 가슴에 품을 이름이 터져 나오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술잔을 들었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을 둘러보던 채프먼은 모두와 함께 보드카를 들이켠 뒤 몰래 한숨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학살조장이 웃음을 흘린다.


“자네 임무를 내가 대신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어떤가?”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기댄 채 머리를 쓸어 넘기던 채프먼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 하며 답했다.


“아닙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확실해?"

"예, 믿어주십시오."

“공조가 아니라 날 이용하려고 했다면, 지금이라도 솔직해지는 게 좋을 거야.”

“결단코 아닙니다.”

“그런데 왜 약속을 이리로 잡았지?”

“그게 윗선에서..”

“윗선?”

“아시다시피 언급하기가..”

“한데, 내 휴가에 기한이 있던가?’

“예? 갑자기 웬.. 아, 휴가요? 그게 중요하죠. 그러니까 그게..”

“직할대 소속이겠군.”

“예? 아, 예. 굳이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물론 아시겠지만, 직할대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서..”

“직속 상관은?”

“그게 언급하기가 곤란..”

“주량은 강한 편인가?”

“예, 이 일을 하다보면 당연히.. 아니,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학살조장이 두서없이 물어오는 질문에 정신없이 답하던 채프먼은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서 복잡한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하며 답변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이후, 약 5분 정도 계속된 질의와 문답 속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잡다한 일에 관해서 논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흐트러졌던 호흡과 집중이 바로잡혀가자 그는 기이한 눈으로 학살조장을 바라봤다.


‘배..려해준 건가?’


불과 5분 전, 이 대화를 시작하기 전의 상태로 요인 암살을 시도했다면 그의 말대로 벌집이 되었을 거다. 상대는 러시아 마피아의 최고위급 간부였으니까.


‘뭐, 내 총구가 보드카 몇 모금에 흔들리지는 않았겠지만..’


그렇게 변명해봐도 그가 자신을 위해준 것만은 분명했기에 왠지 머쓱하고 부끄러워졌다. 해서 그는 화제를 돌렸다.


“조금 전에 물어보셨던 기한 말입니다. 제대로 답변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조장급에게 주어지는 휴가에는 정해진 기한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확실해?”

“예, 확실합니다.”


부대는 학살조장들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기에 그들에게 제약을 걸어 조정하거나 어설프게 제어, 제거하려 들지 않았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들을 지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내려진 결론은 휴가였다.


‘임무 수행 중이 아니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 기한도 제약도 없으니 부대에 관해서만 함구하라.’


어차피 그들은 전장에서 떠나지 못할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왕이면 부대의 깃발 아래로 돌아오게 하려고 금전적인 부분부터 의식주에 관한 모든 걸 지원해줬고, 여태 부족함을 호소한 사람은 없었다.

중요한 건 휴가라는 도구에 대한 서로의 이해였고 1조장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채프먼은 임무를 완수했다고 확신했다.


‘자, 이제 저 미친 늙은이만 처리하면..’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고 타깃의 상황을 체크할 때, 제공된 신분증을 하나하나 살피던 학살조장이 자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목구비가 비슷한 남자의 사진을 유심히 보며 물어왔다.


“성형인가?”


이미 머릿속을 완벽하게 정리한 채프먼은 여유를 찾은 상태로 답했다.


“약물을 주입해서 병원에 입원시킨 뒤에 본인도 모를 정도로 약간씩 진행했습니다. 조장님의 외모도 좋았고요.”

“그렇군.”


어디에서나 볼 법하고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와 분위기, 이쪽 세계에서는 탁월한 외모이긴 했다. 물론 특유의 눈을 제한다면 말이다. 신분증과 관련한 서류를 보던 학살조장이 다시 물었다.


“키는 몇cm 차이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몸은 많이 부족한 것 같군.”


채프먼은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국에 그자의 체형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

“예. 그는 일가친척 하나 없는 은둔형 외톨이입니다.”

“그렇군.”


그가 학살조장이 되는 순간부터 이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성격과 외모 사회생활 등의 모든 것을 조절 당하며 사육당했을 거다. 눈 앞을 가린 어눌한 머리스타일이나 핏줄들이 사고로 모조리 죽은 것도 그 일환 중 하나였다.


가족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과 천애의 고아로서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을 가진 자가 사회로부터 냉대받기 시작하면 어찌 될까?


우연히 만난 이성의 노골적인 외모 지적과 조롱, 그 눈빛들.. 적당한 때마다 운 좋게 생기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전이 아니었다면 벌써 자살하였겠지만, 최고의 동반자인 컴퓨터가 있어 버텨냈으리라. ‘그래, 그냥 이렇게만 살다가 가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 마니아적 취미생활이 삶의 유일한 활력소이자 의미일 테고, 친분이라고는 게임상에서 알게 된 몇몇 캐릭터 뿐이라 밖으로 나갈 일은 당연히 없을 거다. 물론 동네 마트나 은행에 갈 일이야 있겠지만, 아주 가끔 마주치는 어두운 옆집 남자를 기억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작업이 끝나면, 당사자를 사회적 외톨이로 영원히 살게 해야 하는데 그 방법 또한 간단했다.


어떤 만남이나 모임, 특정한 사회활동에 참여케 한 뒤에 ‘재수없는 놈, 사람들은 널 거부해. 어딜 감히 너 따위가? 역겨운 패배자.’ 정도의 메시지를 실어서 약간의 상처만 주면 충분했다.

평범한 사람이면 웃어넘기거나 오히려 반발할 일도 그들에게는 문밖으로 나오지 못할 아픔이 되곤 하니,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렇게 생긴 상처가 한 번 곪기 시작하면 낫지도 않는다. 저런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사회적 손길이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만남이었지만, 어디 그게 쉬운 세상이던가?


‘아니, 그냥 이대로.. 나 혼자면 충분해.’


그렇게 홀로 살아가다가 학살조장의 휴가를 부대에서 허가하는 순간, 그의 애처로운 인생은 바로 종착점에 닿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외톨이긴 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았던 이 존재감 없는 남자는.. 어느 날 잠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리라.

혹여 자신과 비슷한 삶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죽을 때 조금이나마 덜 억울할까? 손가락질과 무관심이 아닌, 누군가의 무서운 관심 속에 평생을 살아왔다는 걸 알면 좋아하지는 않을까?


‘오직 너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어.’라고 말해주면 이 외톨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회의 무관심에 내버려져 덧날대로 덧나버린 상처만큼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도 없으니 또 모를 일이다. 증명사진 속에서처럼 어색한 미소라도 지을지..


‘나를 위해 살아온 인간이라.’


그의 무미건조한 인생을 잠시 그려보던 학살조장은 멀리 항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바인더를 정리했다. 길었던 유람의 끝이 드디어 다가왔음에 완연한 심적 여유를 찾은 채프먼은 임무를 마무리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이동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 모든 나라가 그렇듯 한국에도 비공식적으로 승인된 이동경로가 차고 넘쳤다. 나라의 특성상 육로는 조금 힘든 감이 없지 않았지만, 굳이 고생을 하겠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현은 비공식적 경로로 고향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숨어서 돌아가긴 싫군. 그리고..”


그가 말끝을 늘이자 채프먼은 긴장한 눈으로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대용품의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직접 처리하는 거로 하지.”


이해할 수 없는 제안에 채프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직접 처리하는 게 힘든 일은 아니겠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상 어떤 변수가 생길지 가늠키 어려웠다.


‘혹시 도시락처럼 쓰려고..아니야, 저들은 살아있는 인간의 피만 섭취하잖아. 설마, 동정심이라도 생겨서 살려주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조장의 결정에 의아심이 들었지만, 자신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고하겠습니다. 조장님이 복귀하시기 전까지 부대는 어떤 간섭도 하지 않을 겁니다. 단지 한 가지만 잊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조에서 조장님만은 여전히 부대의 일원입니다.”


이번만은 확답이 필요한지 채프먼은 학살조장의 두 눈을 마주 보며 대답을 유도하다가 암흑 속, 저 깊은 곳에 도사린 짐승을 다시금 감지하곤 새파랗게 질려갔다.


‘이런..’


타고난 비범함이 후천적 노력을 통해서 극단에 이르러 오히려 목을 조이니, 그를 본 학살조장은 자신의 존재감을 읽은 눈이 서서히 충혈되어가자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조원을 버릴 생각은 없다.”


다급히 시선을 돌린 채 힘겨워하던 채프먼은 그가 한 말의 뜻을 습관적으로 되새기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배낭에서 또 하나의 바인더를 꺼내 들었다.


“조장님의 휴가를 기점으로 제1유닛의 활동은 전면 중지됩니다. 제가 간섭할 일이 아니긴 한데..”


학살조장이 계속하라고 눈짓하자 그는 말을 이어갔다.


“폭탄마와 구원자는 차치하더라도, 도살자의 회복을 위해 부대에서 얼마나 신경 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무슨 의미지?”


채프먼은 살짝 숨을 뱉어 긴장을 조절하곤 대답했다.


“부대에서 도살자의 상처를 치료해주기는 하겠지만 거기까지일 겁니다. 도살자의 완치에 적어도 2년은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조장도 아닌 조원을 위해서 재활까지 지원하지는 않으리라 판단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지원은 없을 겁니다. 2년의 공백은 조장급만 채울 수 있으니까요.”


학살조장은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의 의견을 가볍게 받았다.


“그는 1조의 선임 요원이다.”


채프먼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 그에 대해서는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한 상황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부상이 워낙 위중해서 재활하는데도 특별한 의료진의 도움이 필요할 테고, 거기에는 상당한 비용이 따를 겁니다.”


비용이라는 단어에 강점을 두고 잠시 말을 끊었던 채프먼이 이내 이어갔다.


“그런데 도살자는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에 400평 규모의 체육관을 운영하며 집이 없는 자들에게 숙식까지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장님, 그가 가진 거라곤 체육관 근처의 조그만 원룸 밖에 없습니다. 부대에서 산하의 요양원을 소개해주겠지만, 보안을 위해서 그런 것일 뿐, 그 이상의 지원은 없을 겁니다. 한 마디로.. 버리는 거지요."


부상을 입은 자신도 그리 될 거라는 생각에 씁쓸해진 채프먼은 길게 한숨을 뱉어내며 바인더를 건넸다.


"여기 도살자를 비롯한 1조원들의 재정 상태에 관한 자료가 있습니다. 오늘의 컨택을 위해 조사하다 보니..”


그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학살조장은 바인더를 받지 않고 답했다.


“부대에서 관리하고 있는 내 자산의 9할을 도살자의 계좌로 이체해.”

“예? 그 돈 전부를 말입니까?”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채프먼의 머릿속에 수많은 0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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