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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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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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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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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37,868

작성
16.12.28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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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
추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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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엽인들 [학살조장..1]

DUMMY

오랜 냉전의 한 축으로서 제국을 꿈꾸다가 패배해 품은 대지만큼이나 황량해진 나라의 경계에는 사랑의 신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강이 하나 흘렀다. 수많은 유람선이 그 위를 노닐며 꽤나 볼 만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개중 가장 낡고 볼품없으며 심지어 작기까지 한 유람선 한 척이 막 선착장을 출발했다. 이번 운행이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잔잔한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는 모습이 오늘따라 유달리 쓸쓸해 보였다.


트레시아, 낡은 선박의 이름이었다. 아마도 누군가의 이름이겠지.


평소와 달리 제법 많은 승객이 선상 위를 거닐었지만, 1, 2층을 통틀어 30여 명이 전부인 걸 보면, 마지막까지도 정원을 채우지 못한 듯했다. 거기에다가 승객 대부분은 사진기로 풍경을 담기보다 보드카나 주전부리를 꺼내 든 채 낡아빠진 선체만 살피니.. 관광객이 아니라 오랜 추억을 되새기려고 승선한 현지인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그래도 아무르의 유람선이라고 하면 관광객들의 고정코스로 통하는데 마지막까지 정원을 채우지 못한 이유가 뭘까?


선상에 고정된 철제 테이블과 의자에 칠해진 파란색 페인트가 다 벗겨져서? 깨끗하긴 하지만 삐걱거리는 바닥 때문에? 아니겠지, 그런 정도라면 어디에서나 볼법한 풍경이니까. 아마도, 2층으로 이어진 조그만 철제 계단이 밟을 때마다 덜컹대고, 안전 따위는 도외시한 얄팍한 철제 울타리는 녹이 슬어 강바람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세상에, 신이시여. 왜 여태 저런 고물선을 폐기하지 않은 걸까? 웃고 떠드는 승객들 중 관광객이 없는 게 천만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출항은 했으니까, 남은 90분이 순항이기를 빌어보자. 비명을 질러대는 엔진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지만 말이다.


그래도 저무는 햇살을 품어 눈부시게 빛나는 강을 타고 유유자적 흘러가는 낡음의 모습이 고즈넉한 멋을 풍기긴 한다. 일회용 컵에 따른 보드카를 한 모금씩 삼키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도 그와 잘 어울렸고..


동서고금을 떠나서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노인이 과거를 추억하는 모습은 그림이 되니까.


특히나 2층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채 떠들썩하게 웃고 즐기는 세 쌍의 노부부,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였다. 유람선의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며 서로의 추억을 주고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들의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는 검정양복 3명이 눈에 거슬렸지만, 뭐 어떤가? 승객 중 그들의 눈치를 보는 이 단 한 명도 없는데..


그들 역시 안면이 익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관심도 두지 않았다. 단지, 계단 쪽 테이블에 앉은 동양인과 러시아인에게는 가끔씩 날 선 시선을 보내곤 했다.


‘처음 보는 놈들인데.’


흰색 운동화에 청바지와 항공점퍼, 세계 어디에서나 볼법한 차림의 동양인과 갈색 바지만 빼면 비슷한 행색의 러시아인 남자는 관광객과 현지 가이드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덩치들은 그들을 노골적으로 노려보며 적대감을 비췄으니.. 그들의 매서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슬쩍슬쩍 눈치를 살피던 가이드가 마침 보드카를 마시던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를 본 노인은 짜증스런 얼굴로 덩치들의 리더인 대머리에게 소리쳤다.


“체호프! 저들도 트레시아의 마지막 운항을 즐기러 왔을 텐데 괜히 겁주지 말고 적당히 해.”


이름이 언급되자 바로 선글라스를 벗어 든 대머리는 두말없이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마코브스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노인은 절레절레 고개 저으며 아이스박스에서 보드카 한 병을 꺼내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뭐든 지나치면 안 되는 거야, 가서 정중히 사과해.”


공손히 보드카 병을 받아서 러시안 가이드에게 다가간 체호프는 보드카를 건네고 악수를 청한 뒤, 썩 괜찮은 미소를 남기곤 돌아섰다. 술병을 받아 든 가이드는 병을 들어 노인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 자리에서 뚜껑을 열어 한 모금 쭉 들이켰다. 그리곤 테이블 맞은 편에 앉은 동양인에게 보드카 병을 건네며 넌지시 말했다.


“저기, 웬만하면 한 모금 드시는 게.. 마시지 않으면 저 미친 늙은이가 시비를 걸어올 텐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요.”


옅은 미소를 띤 동양인은 술병을 받아 시원하게 서너 모금 마신 뒤에 노인을 향해 병을 흔들며 살짝 고개 숙였다. 그를 지켜보던 마코브스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가이드는 짧은 금발을 쓸어 넘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맞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이대로 시비 붙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조장님께 폐를 끼칠 것 같아서요. 뭐, 굳이 나서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넌지시 낚싯바늘을 던져보던 가이드는 동양인의 유리구슬 같은 눈과 눈이 마주치자 말끝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바닥에 둔 배낭에서 검은색 가죽 바인더를 꺼내 든 채 말을 이어갔다.


“이거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다 했습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기 이게 바로 휴가에 필요한 서류입니다.”


동양인은 바인더를 받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휴가?”


특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를 듣자 가이드의 푸른색 눈동자에 어떤 결심과 단호함이 어렸다. 그는 강조하듯, 하지만 부드러운 어투로 답했다.


“예, 1조장님의 휴가에 필요한 서류입니다.”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동양인은 이내 바인더를 테이블 위에 펼치고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안에는 한 개인의 인생이 통째로 기록된 서류와 전역증을 비롯한 각종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서류의 내용대로라면 이 남자는 무서울 정도로 평범하게 살아오며, 무관심이라는 사회의 그늘 안에서 헤어나지 못한 부류의 인간이었다.


“나쁘진 않군.” 그렇게 중얼댄 동양인이 서류를 유심히 읽어가자 가이드는 슬쩍 입을 열었다.


“휴가 중 인적 사항 때문에 한국 내 사법기관과 충돌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조장님이 유닛을 맡았을 때부터 준비했으니까, 아주 오래됐고 그만큼 확실한 신분입니다.”

“휴가를 안 갔으면 큰일 날 뻔했군.”


고저가 없어서 그런지 더 재미없게 들리는 농담에 간신히 웃은 가이드가 답한다.


“휴가없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조장님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그렇지, 앞으로는 종종 휴가를 즐기시게 될 겁니다.”

“그런가?”

“예, 휴가가 일의 능률도 올려주지요.”


말없이 끄덕인 학살조장은 눈앞의 사내를 다시 봤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기에 본능적으로 가지게 되는 두려움과 긴장을 떨치고 그놈의 휴가를 강조하며 부대의 의지를 명확히 전달하는 모습이 제법 흥미로웠다.


'재미있군.' 한데, 속을 알 수 없는 사자의 미소를 마주한 토끼는 어떤 기분일까?


어젯밤에 거울을 보며 연습한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제법 여유롭게 읊어댔지만,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 줄기 식은땀이 지금의 심경을 대변해줬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땀을 훔치며 보드카를 한 모금 더 들이켠 가이드 채프먼은 서류를 살피는 학살조장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하필이면..’


그는 각종 스파이 능력을 인정받아서 부대의 일원이 된 케이스였다. 타고난 외모부터 높은 지능을 비롯한 온갖 기술에 능하다 보니 여태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었고, 육 개월 전부터 투입된 러시아 미션도 오늘로 완수하는 날이었다.


'너무 잘 풀린다 싶더니.'


보통 임무를 하나 끝내면 두 달간은 어떤 임무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사흘 전 사령부에서 급신이 내려왔다. 부대 내 인사와의 간단한 접촉이 전부라고 해서 별다른 부담 없이 승인했다.


‘그런데 학살조장이야.’


손에 묻힌 피가 마를 날이 없다 들었기에 기회가 있어도 접촉하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마주앉아서 보드카까지 마시게 되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학살조장이 띤 의미 불명의 미소, 타인의 행동을 읽는 게 수단인 그조차 알 수 없었던 섬뜩한 일그러짐이 머릿속을 맴돌며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휴가를 너무 많이 강조해서 마음이 상한 걸까? 조금 적게 할 걸 그랬나?’


유리구슬 같은 눈을 마주했을 때 머릿속이 하얘졌던 게 떠오르자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혹여 살기라도 흘리면 그냥 강으로 확 뛰어드는 게 좋겠어. 그래도 조장인데, 물속까지 쫓아오기야 하겠어?’


참 어이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는 흐르는 강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완벽한 임무의 완수를 위해 대량살상 지역섬멸 특화대의 제1유닛과 그 조장에 대해서 너무 깊이 조사한 게, 이 어처구니없는 생각의 근원이었다.


‘젠장, 이것도 직업병이야, 직업병.’


각종 보고서와 목격자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가늠해본 그의 전투력은 실로 압도적이었지만, 부대의 일을 하면서 그런 슬러거들을 처음 본 건 아니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작년에 세르비아에서 함께했던 암살대만 해도 뭐..’ 이 정도가 전부였다.


한데 오늘 직접 대면해서 두 눈을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 정보들과 그의 분위기, 여유로운 행동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와 행동 등이 조합돼 한 가지 끔찍한 사실을 알려줬다.


‘보고서만 봤을 때는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니. 내게 정체를 들켰다는 걸 알면 나를 포함한 승객 전부를 죽이고 이 망할 놈의 유람선도 가라앉히겠지?’ 무슨 놈의 망상인가 싶었지만, 그로서는 저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동양인은 불과 17개월 전에 알게 된 어떤 세력의 일원과 너무 비슷한 냄새를 풍겼다. 인간을 사육하고 잡아먹는 그 괴물들 말이다.


‘빌어먹을.’


답답한 마음에 보드카를 한 모금 더 크게 들이켠 뒤, 멀리 보이는 하바롭스크와 쉼 없이 일렁이는 강물 사이에 시선을 두고 나름의 여유를 가장했지만, 첩보원으로서 특화된 감각이 상대를 끊임없이 분석하며 위험신호를 보내왔다.


‘시간아 가라, 제발 좀 빨리 가!’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엮인 사람들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하고 덧없는지가 떠오르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유람선이 아니라 그냥 찻집에서 만나자고 할 걸, 하필이면 임무가 겹쳐서..’


그는 여전히 시끌벅적한 마코브스키 일행을 힐끔 보고는 간단한 잠수장비와 MP7[기관단총]이 들어 있는 바닥의 가방, 그리고 상의 안쪽 홀더에 꽂아 둔 글록과 눈앞의 괴물을 떠올리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도움을 좀 받을까 했는데, 이거 자칫하다가는 민간인들까지 휘말리게 생겼어.’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테이블 위에 놓인 보드카 병으로 손을 뻗을 때,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와 그의 손길을 붙잡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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