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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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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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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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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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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5
글자수 :
2,037,868

작성
16.12.23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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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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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
11쪽

아프가니스탄 [Episode..4] 인연

DUMMY

“막내야, 걱정 말고 나만 믿어. 마을에는 별일 없을 테니까. 사실 무샨과 간부 몇 놈들은 죽어 마땅한 쓰레기들이었잖아? 그래서 내가 지프를 몰고 도망간 거야. 그 개자식들 죽어버리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리처럼 무사할 게 분명해. 왜냐고? 그 괴물 같은 건 사실, 미군이 만든 비밀병기거든. 진짜로 그런 괴물이 있을 리가 없잖아.”


소년은 마치 굉장한 비밀을 가르쳐 줬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혹여 누가 들을까 황량한 사막을 쓱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무사 할까? 막내야, 네가 아직 어려서 이해를 못 하나 본데.. 미군은 말이지, 항복한 사람들은 웬만해선 그냥 살려줘. 우리가 무슨 반군도 아닌데 죽일 이유가 없잖아? 아마 지금쯤이면 무샨은 잡혀갔을 거고, 다른 아저씨들은 술독에 빠져서 자고 있을걸?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 말만 믿어.”


십대 중반이나 됐을까? 아직 풋내를 다 벗지 못한 소년은 한참을 주절대다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봤다. 그의 두어 걸음 뒤에는 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AK-47소총을 품에 꼭 안은 채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었다. 눈빛이 흐릿한 게 맨정신은 아닌 듯해서 왠지 측은해 보이는 아이였다.


“막내야..”


걸음을 늦춰서 아이와 나란히 선 소년은 더럽고 야윈 손을 뻗어서 막내의 더벅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활기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그리고 있잖아, 내가 파슈툰한테 기관총 지프 뺏겼다는 거 비밀이다. 사실 뺏긴 것도 아니지. 내가 그거로 기가 막힌 거래를 성사시켰으니까. 그게 뭐냐고? 우리 둘 다 안 죽은 게 그것 때문이잖아, 너 몰랐어? 거기에다가 밥까지 얻어먹고.. 그래! 물도 이렇게 두 주머니나 얻었지. 막내야, 너 있잖아,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거지? 우리가 입을 잘 맞춰야 하거든.”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곤 말을 이어갔다.


“뭐, 어쨌든 새벽 일찍 출발하길 잘한 것 같아. 이대로만 가면 한낮이 되기 전에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마을에서 젤 예쁜 우리 샬리나 누님 결혼식도 못 보고 해서 섭섭하지만, 일단은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푹 쉬자.”


목이 타는지 옆구리에 찬 물주머니를 꺼내 목을 축이던 소년의 귓가에 아이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라만..”

“그래, 막내야 말해.”

“나, 샬리나의 결혼, 축복.. 해줘야 하는데. 약속.. 우리 누나 행복하라고..”


아이가 더듬더듬 말 하자 소년의 얼굴에 아픔이 스쳤다. 그렇게나 총명하고 밝았던 아이였는데, 그 씨팔 괴물이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죽일 놈. 막내야, 내가 언젠가는 복수해줄게.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저 마약왕처럼 순식간에 세력을 불려서 그냥..”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어금니를 꽉 깨물던 할라만은 막내에게 물주머니를 건넸다.


“목마를 텐데, 물 좀 마셔.”


퀭한 눈으로 정면만 보고 걷던 막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채 거칠게 숨을 토해내자, 소년은 혹시 몸에 이상이 왔나 걱정돼 무릎을 굽혔다. 그리곤 손을 뻗어 막내의 다리와 몸을 더듬었다. 아이의 갈리진 목소리가 들려왔고..


“할라만.”


소년은 답했다.


“어, 막내야. 형이 듣고 있어.”

“할..라만.”

“그래, 마을에 가면 샬리나 누님 꼭 축복해주자.”

“할라만.. 할라만.”


막내의 이상한 반응에 불길함을 느낀 소년은 고개를 들어 막내의 얼굴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너 머리가 아프거나 그래?”


그가 손을 뻗어 막내의 이마를 짚을 때..


“할라만?” 고저가 없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막내의 입을 바라봤지만, 저 조그만 입에서 저런 삭막한 목소리가 나올 턱이 없었기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씨 팔.’


얼굴 한가득 두려움을 그린 할라만은 그제야 자신을 향한 그림자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가, 목 뒤로 육중한 충격이 전해지는 순간 거칠게 숨을 뱉어 내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안..돼.’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세상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하자, 마을에 있을 가족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간다.


‘아빠. 이제 내가 보살펴주려고 했는데..미안해, 보고 싶어.’


한 줄기 그리움과 아픔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다행히도 고통은 없었다. 어느새 얼굴에 닿은 거친 흙바닥의 감촉이 포근하게 느껴져서 이대로 잠들려고 할 때, 막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라만도 오늘..고생이 많았는데, 집에..가야 해요.”


이어서 괜히 섬뜩해지는 억양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

“예, 우리 집은.. 저기 언덕 너머에.. 무샨님의 농장이.. 집인데, 할라만이 지켜준다고.. 오늘 고생이 많아서 집에 가..”

“집이라.”


감당키 어려운 충격으로 사고능력을 상실한 아이를 움직이게 한 유일한 원동력이 들려와 머릿속을 맴돌자, 그림자는 묘한 미소를 띤 채 아이를 바라봤다. 불투명한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보며 “바토리도 이런 걸 느꼈던 건가?” 라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는, 이제 곧 삼도천에 닿을 할라만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사실은 나도 집에 가는 길이란다.”

“정말요? 아저씨도 고생을..”


두서없이 중얼대는 소년의 흐릿한 동공에 그림자의 손에서 뿜어진 기이한 바람이 할라만의 몸 안으로 스미는 게 비친다. 그리곤, “고생이라기 보다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지.” 라고 대답한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다가와서 자신의 머리를 꽉 붙잡는 순간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아파..요.”


어쩔 줄 몰라 하며 AK소총을 꽉 붙잡던 아이는 자신의 머리를 젖히는 힘에 이끌려 위를 올려다봤다. 그곳엔 시꺼먼 그림자 속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있어 그와 마주치는 순간, 그저 회색빛이던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가 물어온다.


“너는 이곳에서 죽을 테냐?”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린 아이는 제대로 숨조차 쉴 수가 없어 캑캑거렸다. 그러자 그림자는 아이의 머리를 잡은 손에 힘을 가하며 다시 물었다.


“이곳에서 죽을 것이냐?”


이미 망가진데다가 어려서 덜 여문 몸으로는 머리통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아이는 간질에라도 걸린 듯 경련하며 게거품을 물었다. 하나 상대는 그런 애처로운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존재감을 배가해 나약한 고깃덩이의 사지를 붙잡아 눌렀다. 그리곤 수없이 많은 인간을 잡아먹은 짐승으로서 살의를 일으켰다.


“너는, 이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냐?”


강대한 포식자의 의지가 뇌리를 울리자, 나약한 피식자는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곤 발작적으로 절규했다. 비록 그것은 구체화된 언어는 아니었지만, 생명체가 지닌 가장 원초적인 본능의 발현이자 죽음을 부정하려는 최초의 몸부림이었다. 참으로 애처롭고 처절한 비명이 모래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갈 때, 그림자는 소용돌이로 흡수되던 생명력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이미 혼돈에 닿았기에 뒤틀린 에너지가 아이의 머리를 통해 전해지며 그의 의지를 실행한다.


“지금 네 입으로 뱉은 의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속삭이며 손에서 힘을 풀자 아이는 울컥 피를 토해내고는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아이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급격한 생명력의 변화를 주시하던 그림자는 바닥에 쓰러진 둘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재미있군.’


유년기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걸음을 옮기던 중, 이렇게 홀로 된 아이들을 마주했다는 것이 그에게 독특한 감흥을 안겨주었다. 그는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을 음미하며 그 색깔을 기억해두려 집중했다.


‘동질감, 연민, 그리고 또 뭐가 섞인 거지? 뭔가를 남기기 위해서? 이런 느낌도 있었군.’


3년 만에 가진 새로운 감정의 여운을 갈무리한 그림자는 다시 소년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몸에 주입한 기운, 소용돌이에 먹혀서 나선으로 뒤틀린 영혼의 움직임을 찬찬히 지켜봤다.


‘도살자에게는 제법 도움이 됐었는데.’


3년 전, EGO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사경에 이른 도살자에게 강제로 생명력을 주입해서 회생시켰었다. 미약한 부작용이 따르긴 했지만, 도살자의 정신력과 육체가 워낙 강인해 별다른 문제가 없었기에 눈앞의 아이에게도 사용해본 것이다.


‘그때보다는 정제했지만..’


새로운 지식을 얻어서 조금 변형한 영혼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제 역할을 했다. 기존의 병든 생명력을 순식간에 먹어 치워서 덩치를 잔뜩 불린 뒤에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그 역할이었는데,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나선의 주인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재미있겠어.’


주입된 기운을 아예 극복하며 한 단계 점프한 도살자처럼 끊임없이 한계를 돌파해가는 초인이 될지, 나약하기 그지없어 끊임없이 시달리는 피식자가 될지, 지금의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순간의 활력을 만끽한다면 잡아 먹힐 것이고 부단히 단련한다면 그에 걸맞은 힘을 가지게 되겠지. 언젠가 돌아와서 확인해야지.’


처음 느낀 필연의 끈, 우연과 우연의 교차점을 이만 끊고 떠나려던 그림자는 멀리서 기괴한 인기척이 느껴지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보니 자신의 권속이 되고만 기운들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지평선이 어림에 머뭇거리고 있는 자들이 보인다.


‘나를 위해서 주저 없이 소멸할 수 있는 자를 권속이라 합니다. 하나 그들은 이미 나의 품을 벗어났네요. 이제 당신의 선택에 따라 움직일 겁니다.'


필요 없다고 하니 내게도 짐만 될 뿐이라고 하였기에 그럼 너희는 이전처럼 살아라 하고 떠나왔는데, 주섬주섬 따라오더니 여기까지 온 듯했다.


‘저들은 내게도 짐일 뿐이다. 그냥 소멸시킬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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