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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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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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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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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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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5
글자수 :
2,037,868

작성
17.01.04 19:53
조회
417
추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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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엽인들 [친우..징조]

DUMMY

두루치기를 비롯한 안줏거리를 능수능란하게 완성한 창수는 주방에 서서 술집을 둘러봤다.


‘앞으로 3년 안에..’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개방형 주방이라 넓지 않은 술집의 곳곳이 다 보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한 목제 테이블과 의자가 널찍이 간격을 둔 채 놓여 있고 약간은 밝은 조명에 담담하고 정갈한 디자인은 담백한 느낌을 줬다. 벽으로 붙은 작은 계단 위쪽으로도 자리가 있었는데, 그곳은 홀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약간은 짧은 듯 단조로운 커튼으로 가려져 밀폐된 공간은 부드러운 조명 속 고급스러운 의자와 테이블 등으로 꾸며진, 조금은 은밀한 장소였다. 그리 넓지도 않은 술집을 극단적으로 나눠 위화감을 조성하기도 했지만, 사장이 일본에 놀러 갔다가 나도 이런 거 하나 가져야겠다고 해서 만든 가게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의외로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고.


‘내 가게라면 저놈의 벽부터 허물겠지만..’


창수는 이곳의 사장이 돼 술집을 확장하고 테이블 간의 간격을 넓혀 사람들이 더 편하게 즐길 수 있게 해야겠다는 등의 즐거운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오래 간직했던 꿈이 이루어지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연히 그를 본 젊음은 쓴웃음을 흘렸지만 말이다.


‘좆도 꿈이라.’


명진은 창수의 저런 모습을 처음 본 게 아니라 잠시 기다렸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눈빛, 소박하나마 꿈을 담은 시선이 부러워서 괜히 이를 악물었다.


‘젠장, 내 꿈은 뭐였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취업 말고는 특별한 게 없어 그는 습관적으로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대 다 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한 모금은 길게 내뿜어 머릿속 복잡한 상념까지 함께 뱉곤 창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거 가게가 왜 이래? 손님이 왔는데 인사도 안하고 대접이 영 엉망이네.”


놀라 고개 돌린 창수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형, 왔어?”

“예, 제가 왔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합니다, 사장님. 사과는 이따가 따로 할 테니 어떻게, 고기 안주는 준비하셨는지요?”


창수는 명진이 농으로 던진 사장이란 말에 기분이 좋아지자 가슴을 활짝 폈다.


“예, 손님! 외로운 고추에게는 고기와 술이 공짜랍니다.” 척추라도 빠진 듯 90도로 고개 숙이는 명진을 보며 창수는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가게 안 모든 조명을 끄고 술 마실 테이블에만 불을 밝힌 창수는 제법 분위기가 잡히자 만족스러워 웃음을 흘렸다. 그는 회심의 역작, 매운 치즈 두루치기를 비롯한 각종 마른안주를 잔뜩 꺼내서 테이블을 세팅한 뒤에 친우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형, 그런데 진짜 왜 이리 늦었어? 나는 또 무슨 일 생겼나 했네.”


술병을 건네받아 창수의 잔을 채우던 명진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어, 일단은 한잔하자.”


목이 타는지 소주를 털어 넣는 명진의 안색이 영 좋지 않자 창수는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형, 무슨 일 있어?”


명진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데 넌 아무렇지도 않아?”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의아해하는 창수를 빤히 쳐다보던 명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게.. 나도 잘 모르겠네. 일단은 술부터 좀 마시고..”


어색한 침묵 속 한 병을 다 비워갈 때쯤 잔이 부딪치는 소리에 두런두런 대화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형..”


창수는 명진의 빈 잔을 채워주면서 속에 묻어뒀던 말을 꺼냈다. 이상할 정도로 지워지지 않으면서도 떠올리기가 두려워 온종일 외면했던, 바로 그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늘 산에서 봤던 사람 있잖아, 형 혹시 그 양반 얼굴 생각나?”


드디어 그가 언급되자 명진은 담배에 불부터 붙였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감추지도 않고 담배 한 모금을 깊숙이 빨아들인 뒤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도 그 사람 생각했어? 솔직히 나는.. 하루 종일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어.”


그는 담배 연기를 안주 삼아 한 잔 더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웃기는 건 말이야,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는데도.. 이런 씨팔, 그의 얼굴이 생각나질 않는다는 거야. 나이는 내 또래쯤 됐던 것 같은데..”


혼란스러워하는.. 아니, 분명히 두려워하고 있는 그를 보며 조용히 술잔을 들이켠 창수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해보려 가볍게 말을 던졌다.


“에이, 형.. 잘해봐야 나랑 갑이거나 한두 살 많아 보이던데, 형만큼 늙었으려고?”


평소 같았으면 늙었다는 말을 농으로 받아치며 낄낄거렸을 명진은 창수의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훨씬 더 연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 이런 좆 같은 거. 창수야, 너 뭔가 이상한 거 모르겠냐?”


창수는 빈 술잔을 채우며 고개 저었고, 명진은 깊이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신경질 적으로 뱉어내며 말했다.


“야, 너 정말 모르겠어?

“뭘?”

“네가 산에서 어떻게 내려왔는지, 그거 기억나?”

“아니 형, 그게 무슨 말이야. 당연히 산에서..어? 잠깐만, 잠깐.. 이게 뭐야?”


헛웃음을 흘리던 창수의 얼굴이 급격히 굳는다.


‘내가 어떻게 내려왔지?’


곰곰이 생각에 잠길 때 명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있잖아? 씨 팔, 뭔가 봐서는 안 되는 걸 본 것 같아. 산에서 내려오려면 대충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어디에서부터 필름이 나간 건지 전혀 모르겠어. 그냥 당연한 것처럼,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나.”


연이어 술잔을 털어 넣는 명진을 멍하니 보던 창수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오늘 내가 언제부터 가게에 있었던 거지?’


필름이 끊길 정도로 폭음을 하거나 누군가와 격렬히 싸운 것도 아닌데 기억의 한 부분이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나는 왜..?’


산을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 못 하는 건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와 되돌아보니 발끝에서부터 뭔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는 반사적으로 술을 들이켰다.


“형, 형 말을 들어보니까, 이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이거 대체 뭐야?”


명진은 창수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푸념하듯 답했다.


“나도 몰라, 그래서 더 미치겠고. 온종일 인터넷도 뒤지고 생각도 많이 해봤는데, 이건 씨 팔 무슨 정신병도 아니고..진짜 모르겠어.”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술잔을 잡았다.


“창수야, 우리 그냥 술이나 마시자. 그리고 아까 너, 내가 왜 늦었냐고 그랬지?” 술잔을 꽉 붙잡은 손의 떨림이 짙어진다.


그래도 창수는 일한다고 정신이 없었겠지만, 혼자 집에 틀어박혀 있던 명진은 산에서의 일만 생각했다. 여태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기괴한 감정 속에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정말 미칠 것 같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음에.. 창수와의 술 약속이 아니었더라도 혼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퍼부어 댔을 게 분명했다.


“좆 같은 거.” 그저 한숨만 나온다.


그는 안주도 없이 술을 들이켜다가 다시 담배를 물고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창수는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형, 괜찮아? 그냥 시간이 지나면..”


약 떨어진 약쟁이같이 불안정해 보이는 친우가 안타까워 술잔을 채워주던 그는 슬그머니 눈을 감고 찬찬히 그때를 되새겨봤다.


‘산에 올라가서 후련하게 한바탕 질러 댄 다음에 형을 만나서.. 수진이 얘기도 하고 오늘 약속도 잡고 하다가.. 그래, 무슨 좆 같은 느낌이 들어서 돌아보니까, 웬 시꺼먼 새끼가..’


기억을 꽉 틀어막았던 원인, 흐릿하기만 하였던 이미지를 떠올리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왔다. 산산이 조각났던 퍼즐이 맞춰지듯 뿌연 그림자 속 놈의 형체가 완연이 모습을 갖추는 순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 전신을 관통한다.


‘이게 무슨!’ 내장이 찢겨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옅은 신음 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저 꺽꺽대며 눈이라도 떠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이런, 씨..팔.’ 멀리 그 놈이 시꺼먼 눈을 들어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곤 천천히 손을 뻗는 순간 세상이.. ‘안 돼!’ 비명 같은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눈을 뜬 창수는 반쯤 남은 소주병을 들어서 그대로 들이켰다. 발끝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던 냉기와 끔찍한 통증의 기억이 몸 여기저기를 개미떼처럼 기어 다니며 끊임없이 소름이 돋게 했다.


“씨 팔, 이런 개새끼가..”


순식간에 비워버린 소주병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놓고 담뱃갑을 잡아서 한 개비 뽑으려는데, 애처롭게도 손이 떨려서 몇 번이고 실수하는 모습을 보며 명진은 조용히 한숨을 뱉었다. 아마도 숨 막히는 공포가 목을 옥죄이고 있으리라.


'창수야.'


그는 걱정 어린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봤다. 지금 창수의 상황이 어떤지 자신도 집에서 겪었기에 어떤 위로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겨우 담배에 불을 붙이고 삼킬 듯 빨아들인 연기를 길게 뱉어낸 창수는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기댔다. 그 모습이 자신과 겹쳐지자 명진은 힘없이 고개 저었다.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어.”


또 한 대 피우려고 구겨진 담뱃갑을 잡아가던 그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나 창수가 이 감정의 실체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산에 오르지 못 하리라는 것을.. 이 정체불명의 공포가 무슨 트라우마 같은 걸 만든 게 분명했다.


“좆 같은 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가늠할 수가 없어 욕설만 뱉을 때,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물고 있던 창수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우리.. 괜찮겠지?”

“그래, 좆도 뭐 별일이야 있겠냐?”

“그렇지? 씨팔, 좆도 아니겠지?”

“어, 시간이 지나면..괜찮아질 거야. 무슨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이후 별다른 대화 없이 술만 마시다가 환한 햇살을 머금는 창문을 보며 내린 결론은 고작 ‘설마?’ 가 다였다.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한데 정말로 그럴까? 여태껏 살아오면서 겪은 고통과 아픔처럼, 이 소름 끼치는 기억도 망각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저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게 될까?


만일 저들이 이 숨막히는 압박감의 정체가 영혼의 뒤틀림을 읽은 본능의 절규라는 것을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에의 절망이라는 것을 우연이라도 깨달았다면, 과연 술 따위에 기대어 그렇게 가벼운 결론을 내렸을까?


모를 일이다. 혼돈은 저들에게 죽음 하나만을 명하지는 않았으니까.


창수와 함께 주섬주섬 뒷정리를 하고 비틀비틀 밖으로 나온 명진은 동생이 건네주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불을 붙이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입을 열었다.


“창수야, 나 그냥 집에 가서 자련다.”

“왜? 그냥 우리 집에서 자. 형 집까지 가려면 40분은 걸어야 하잖아? 술도 많이 취했는데 쉬었다 가.”


창수의 혀 꼬인 소리를 들으며 멀리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쳐다본 명진은, “어차피 가야 할 길 이잖아, 좆 같은 거.”하고는 동생의 널따란 등을 한 번 두들겨줬다. 그리곤 터덜터덜 걸어가니 창수가 아쉬운 듯 작별을 고한다.


“형, 정말 그냥 가?”

“어, 간다.”

“여하튼 고집은. 형, 형도 술 많이 됐으니까 갈 때 조심하고, 이따 통화해.”

“그래. 그리고 창수야, 오늘 진짜 잘 먹었다, 고마워.

“에이, 별 말을 다 한다.”

“어쨌든 창수야,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슬쩍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고 한참 걸어가던 명진은 8차선 도로 앞 부산한 건널목을 보며 작게 욕설을 뱉곤 인파 속으로 섞여 들었다.


“좆 같은 거, 나도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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