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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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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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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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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37,868

작성
16.12.27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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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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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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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엽인들 [다프네..사명]

DUMMY

항상 활발하고 모두에게 친절해서 가족 같았던 다이앤이 자살해 모두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였다. 하루 대부분을 잠들어 있던 다프네도 그녀와는 친분이 있어 다른 이들처럼 슬퍼하고 눈물도 흘렸다. 매음굴은 자연스럽게 상갓집으로 변했고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여인들은 지인의 죽음에서 오는 아픔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질 못했다.


"이런 개같은 년들이 다들 미쳤어? 뒈지고 싶어?"


당연히 장사가 되질 않자 포주가 들이닥쳐 그녀들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다프네를 비롯한 모두가 서러움에 눈물을 흘릴 때, 마침 나타난 마담이 포주의 따귀를 왕복으로 후려갈기며 고함을 질렀다.


“야이, 개새끼야! 계집애들 술 취한 거 하루 이틀 봐?”


놀란 포주가 “그렇지만..”이라고 중얼대며 고개 숙이자 마담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게 뭐라는 거야? 너 내 눈 똑바로 보고 다시 말해 봐! 못 하겠지? 내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게 어디 애들 앞에서 지랄발광이야! 헛짓하지 말고 빨리 꺼져! 회장님께는 내가 다 말해 뒀으니까.”


회장이란 말에 놀라 얼었다가 다급히 고개 숙인 포주가 다리를 절며 문을 나서자, 마담은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애기들한테 그 지랄을 하면 그 다리 평생 못 쓸 줄 알아, 알겠어?”


조용히 문을 닫던 포주가 말없이 고개 떨구자 마담이 눈살을 찌푸리며 욕설을 뱉었다.


“너는 화대 깎는 놈들보다 더 쓰레기 같은 새끼야.”


찍소리도 못한 채 내뺀 포주를 보며 통쾌한 기분을 느낀 다프네는 마담이 다가오자 기다린 듯 물었다.


“그런데 술 취했다는 게 뭐에요?”


마담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숙취는 괴롭지만, 생각보다 금방 사라진단다.”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다프네가 되묻자 마담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지. 그 후로 몇 번을 더 겪어도 익숙해지지는 않아. 하지만 계속해서 겪다 보면 그러려니 하면서 견디게 돼,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의 다프네를 보며 마담은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화대를 받을 때 말이다. 예를 들어서 네가..”


마담의 주특기인 화대 이야기로 넘어가자 웃었던 게 기억나며 그때의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다프네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혼잣말을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그녀는 쿠키와 포도주스를 말끔히 먹어 치운 뒤에 벌떡 일어서서 대청소를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새 옷을 꺼내 입은 뒤, 빨래를 끝내고 바알제불의 약을 먹지 않은 상태로 잠들었다가, 자그마치 이틀 만에 깨어나서 또 한참을 울었다.


아마도 누군가의 서글픈 죽음을 보았으리라.


하지만 채 한 시간도 되질 않아 눈물은 멎었고, 여느 때처럼 발코니에서 악몽의 여파를 떨쳐낼 수 있었다. 그리곤 본격적으로 태블릿의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해도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쩌지? 인류의 평화 같은 건 너무 거창하잖아?’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중 처음 통화했던 노인과 계속 연락하라던 그의 당부가 떠올라서 명함의 연락처로 전화도 해봤지만, 번호가 죽은 상태였다.


‘아, 막막해. 어쩌지?’ 딱히 이렇다 할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태블릿 안의 자료는 워낙 방대해서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살펴야 했고, 바알제불에게 메일을 보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의 정체를 알면 알수록 무서워져서 이제는 거부할 엄두도 나질 않았다.


'어찌됐든 이야기를 보내야 하는데, 어쩐다?'


죽은 자들을 위한 슬픔보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억울하고 아까워서 내뱉는 한숨이 더 많아질 때쯤, 그녀는 특이한 폴더를 하나 발견했다.


"장로?"


번뜩 머리를 스치는 게 있어 망설임 없이 폴더를 클릭하자 생뚱맞게 비밀번호입력 창이 떠올랐다. 창의 아래쪽에는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calling’이라는 단어를 입력했지만 락은 풀리지 않았다.

"아닌가?"고개를 갸웃거리다 혹시나 싶어 'vocation'을 입력하니, 락이 풀리며 텍스트파일이 떠올랐다.


‘이게 뭐야?’ 비밀번호가 너무 간단했다. 고작 숫자 10개가 전부라니?


괜히 “특수문자 섞는 건 기본 아닌가?”라고 투덜대던 그녀는 아래쪽 여백에 ‘1분 후 자동 삭제’ 라는 경고문이 떠오르자 다급히 번호를 암기했다.


“그래도 이건 프로다운데.. 이게 대체 뭐지?”


암기력이 좋다고 자부하는 편이었지만, 벌써부터 번호가 헷갈리는 것만 같아서 옆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일단 눌렀다. 한데 그러고 보니까..


‘이거 전화번호잖아?’


그녀는 반사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질 않아 머쓱한 기분에 종료 버튼을 누르려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았군요, 다프네 양.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나이를 짐작할 만큼 노쇠하고 또 차분한.. 그리고 현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그녀는 급히 전화기를 귓가에 댔다.


-저는 그, 바보 같은 놈이 사명을 이룰 거라 믿었습니다.


노쇠한 목소리가 언급한 바보의 미소가 눈앞을 스치자 그녀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그분은..


떨리는 목소리가 차마 이어지질 않아 한숨만 쉬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차분히 그를 받는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아이는 잘 해냈습니다. 자, 그럼 이제 묻겠습니다. 예지자여, 그대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갑작스럽긴 했지만, 원하는 대화였기에 그녀는 일단 대답했다.


-그게 잘.. 모르겠어요. 제 사명이 뭐죠?

-경계에 선 자여, 당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대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몇 날 며칠을 고민했음에도 답이 나오질 않는 질문이 반복되자 그녀는 말문이 막혀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로 모르겠어요, 나는 도저히..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고 조금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정녕 모르시는 겁니까?


노쇠한 목소리에 어린 미약한 떨림으로부터 지독한 슬픔을 감지한 다프네는 자신을 위해 죽은 자들이 보이는 듯해 울컥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너무 답답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도저히 모르겠어요.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엇이 그렇게 미안합니까?”

-저는..


이건 또 어찌 답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리자 목소리가 물었다.


-그대는 지금 누구에게 미안한 겁니까?

-그분들이요. 저를 위해 희생한.. 영상 속에 나왔었던 그들이요.


그녀는 목이 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영상 속 환한 웃음이 떠오르자 가슴이 시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개의치 않는 듯 물어왔다.


-예지자여, 혹시 그대는 그들의 죽음만을 아파하고 있는 겁니까?


다프네는 반사적으로 고개 저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알게 된 다른 수많은 이들의 죽음도 너무 아팠다. 지독한 악몽 따위가 아니었던 그들의 고통과 절망을 그녀만큼 절절히 느낀 이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결국 그녀가 소리 내 울음을 터트리자, 목소리는 다그쳤다.


-다프네! 그 고통과 절망은 누구 탓입니까?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은 듯한 질문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제가..


그녀는 자신의 탓이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영상 속 신념에 찬 눈빛과 목소리가 맴돌아 입을 막은 것이다.


‘아니,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삼킬 때, 노쇠한 목소리가 휴대폰을 울렸다.


-그게 누구의 잘못인지, 제가 말씀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귀 기울였다.


-그 모든 절망과 고통은, 무지한 예지자의 탓입니다.


핸드폰을 잡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기적이고 어리석었던 예지자는 그 모든 죽음을 악몽이라 단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알제불에게 알려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명을 죽이고 그들의 혈육과 친우에게 씻을 수 없는 절망을 안겨줬습니다. 다프네, 당신은 악몽이 현실임을 느끼고 있었지만,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자,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누구의 탓입니까?


패닉에 빠진 듯 초점 없는 눈으로 듣던 다프네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모든 게 다, 제..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합리화하여 또 한 번 원죄를 외면하려던 여인은 씻을 수 없는 죄악 앞에서 다시금 자살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또한!


놀랍게도 전화기에서 터져 나온 일갈이 그녀의 정신을 강타하며 무너지려던 이성을 붙잡아 세우는 게 아닌가?


-또한 그 모든 절망과 고통은 이 겁 많은 늙은이의 탓입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그녀는 노쇠한 목소리에 집중했다.


-예지자의 탄생을 알면서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려움에 떨며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핏줄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 이 못난 늙은이의 탓입니다.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들에게까지.. 사명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채워서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바로 이 겁쟁이의 잘못입니다.


그녀는 노인의 충격적인 고백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그들이 당신의 가족..


이어지는 노쇠한 목소리에 회한이 실린다.


-이 어리석은 늙은이는 세상에 홀로 남았음을 깨닫고 나서야, 내 진정한 사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지한 예지자여, 이 비겁한 늙은이가 얼마 되지 않는 지식을 드리기 전에 묻겠습니다. 그대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녀는 여전히 사명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일은 말할 수 있었다.


-저는 그 포식자란 괴물을 막을 자신은 없어요. 그리고 모든 이들을 구할 자신도 없고요. 솔직히 그들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로 인한 희생이 없었으면 해요.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저는 그냥, 악몽 속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구해주고 싶어요. 단 한 명만이라도..


정신없이 늘어놓은 말이 의외였을까? 전화가 끊어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길어지던 침묵이 깨지며 한바탕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현기어린 목소리가 이어지니..


-단 한 명이라, 그거 좋군요. 경계에 서야 할 천명을 타고난 자가 세상에 나가 구해내는 그 한 명이 다가 올 혼돈의 시대에 어떤 사명을 가질 건지.. 하늘만이 알겠지요.


그녀의 선택으로 자신의 길도 정해지자 노쇠한 자의 목소리에 단호한 의지가 어린다.


-다프네 양, 자유로운 외출을 준비하는데 긴 시간이 걸릴 겁니다.

-자유로운 외출이요?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매우 컸다. 바알제불의 약 없이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될까? 또 그의 눈을 피해서 움직인다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이번에도 그녀의 마음을 읽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하늘의 눈조차 속이는 게 인간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鬼]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귀라면..

-바알제불이 그대에게 주는 약의 명칭입니다. 또한 모든 엽인들이 사용해야만 하는 필요악이기도 하지요. 그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많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오늘은 태블릿의 자료를 보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갈 길이 참으로 멀지만, 차근차근 준비해 봅시다.


그렇게 둘의 대화는 무르익어갔다.

진실을 알게 된 무지한 예지자가 자신의 의지를 세상에 천명했고, 진실을 외면하던 겁쟁이 지자[知者]가 그의 사명을 듣고 품었으니.. 그녀는 여전히 약을 먹고 꿈 꾸며 바알제불에게 내용을 전송했지만, 끝내 이름만은 알려주지 않은 노인의 도움으로 적당히 각색한 내용을 보내며 외출을 준비해갔다.


새장에서 시들었어야 할 어느 여인의 외출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모를 일이다. 신비시대에서나 있었던 예지자의 간섭이 현세에 재현되니, 이제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게 된 건 분명하니까. 겁쟁이 지자의 말대로 하늘만이 알 수 있으리라.




이로써 나의 의지를 전승한 자들의 첫 번째 연이 이어졌음에, 이제 나조차도 감히 앞날을 엿볼 수가 없어 즐겁기 그지없구나. -서[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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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엽인들 [다프네..1] +2 16.12.26 577 1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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