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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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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2018.03.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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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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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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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5
글자수 :
2,037,868

작성
16.12.22 21:28
조회
707
추천
12
글자
9쪽

아프가니스탄 [Episode..3] 예지자

DUMMY

꿈과 현실을 동일선상에 놓지 못했기에 그들 중 하나일 거라고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괴물. 지난 몇 년간 수십 번을 만나고 연중행사처럼 저녁도 함께하곤 했었는데, 그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몰랐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대체 뭐지? 무슨 조율자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바토리는 왜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런 감정을 느낀 걸까?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서..”


그와 만나거나 대화했던 순간들을 억지로 다 긁어내서 찬찬히 더듬어보던 그녀는 자신이 바알제불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게 전무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헛웃음을 흘렸다.


“포주가 주는 화대는 언젠가 갚아야 할 빚에 불과한데, 낼름낼름 받아먹었으니, 이제 어쩐다? 벗어나려는 것과 이겨내려는 것은 다르다고 했는데, 혹시 거기에 실마리가 있는 건 아닐까?”


이후 그녀는 꽤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제법 쌀쌀해진 바람에 떠밀려서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힘없이 소파에 앉으며 뇌까렸다.


“그들과 싸워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잖아.”


그들이 정말 존재한다면, 아니 실존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더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다. 아무런 힘도 없는 여인이 무슨 수로 그들에게 대적하겠는가?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한 채, 한 줌 핏물로 녹아내리게 되리라.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짐승들은 고통과 죽음을 선사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악몽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피의 포식자들은 세상을 거대한 양식장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며칠 전 악몽 속에서 가족을 모조리 잡아 먹히고 울부짖던 아이는, 빌어먹을 놈의 주치의가 말한 과거의 투영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개새끼.”


당장 뛰어가서 그 얌전한 얼굴을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느다란 손을 뻗어서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는 것밖에 없었다.


‘젠장, 그냥 다 악몽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자해 하듯 손에 힘을 주고 신음하던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누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나 혼자서 뭘 어쩌라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남들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힘들어. 그런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이딴 걸 알려주는 거야? 난 못해, 나는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야. 나는 그냥 이대로..” 추악한 진실 속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은 자의 눈에서 한 줄기 서러움이 흘러내린다.


지금 자신이 적으로 돌리려는 자들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수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어 인간들에게 사냥이나 당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말을 길들이듯 채찍과 당근으로써 인간을 지배하고 탐욕스럽게 허기를 채우는 포식자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게는 그들을 막을 만한 힘이 없어. 잠깐만, 힘?’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영상이 있었다. 그들보다 더한 살의와 광기를 품고 있는 악인들의 모습.


'학살조, 그래 학살조라고 했었지? 어쩌면 그들이.. 하지만, 그들은..'


여태껏 봐온 포식자들이 우습게 보일 정도의 학살을 들뜬 희열에 휩싸여 자행한 미치광이들이었다.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모습을 조심스레 그려보며 고심하던 그녀는 이윽고 당연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바보 같이.. 원래 사람은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잖아?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를 찾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며 서늘한 조소를 머금었다.


‘별일도 아닌 걸로 괜히 고민했네.’ 대체 그녀에게 결여된 것은 뭘까?


소름끼치는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다프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자 다시 소파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학살자들 중에서 가장 강하고 위협적인 동양인을 떠올렸다.


“학살조장.”


그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들.. 시초, 여섯 번째, 혼돈, 도전자, 포식자를 먹는 괴물, 소년 따위의 단어들이 무작위로 떠올랐지만,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기에 일단은 지웠다. 그리곤..


‘그를.. 만나야 해.’


참으로 밑도 끝도 없이 결론에 도달한 게 갑작스러운 충동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무의식 속에서 뻗어 나온 어떤 울림을 들었기에 그녀는 그런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만나야 해.'


그 이상한 괴물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와 거침없는 행동, 말투, 타인을 대하던 방식과 마지막에 보여줬던 환상적인 모습까지 떠올리며 이제는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던 그녀는 불현듯 어떤 의문을 뱉었다.


“그 사람 얼굴이.. 아니, 왜 얼굴이 기억 안 나? 그냥 평범한 동양인 이라서 그런가? 아닌데, 눈빛이 좀 무서워서 그렇지 제법 잘생겼던 것...”


그녀는 말끝을 흐리다가 결국에는 자신이 그의 얼굴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뭐야? 아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고!”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의문을 던지면서 소파를 걷어차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언제나 그랬듯 적막한 어둠 속에서 들려온 건 너 혼자라는 비웃음뿐이었기에 그녀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 누가 좀 도와줬으면.. 잠깐만!”


당장 울 듯 처연한 얼굴로 중얼대던 비련의 여주인공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일어서서 노트북 옆에 놓인 명함을 집어 들었다.


‘벗어나려는 것과 이겨내려는 것은 다른 거라고 들었습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 이 번호로 연락해 주십시오.’


자연스럽게 떠올라 귓가를 맴도는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믿음직했지만, 친분관계라는 것 자체가 없는 그녀로서는 선뜻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소파의 등받이에 천천히 기대앉았다.


‘악의가 있어 보이진 않았어. 혹시 이 사람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바토리의 생각이 맞다면 그의 등장이 격변의 전조이고 오직 그만이.. 잠깐만, 그런데 부정자는 또 뭐야?’


바토리에게 동화돼 그녀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느꼈지만, 그 지식의 깊이까지 엿볼 수는 없었기에 그저 모든 게 불투명하기만 했다.


‘괜히 또 쓸데없는 생각을.. 복잡한 머리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일단은 이것부터 해결하자.’


그녀는 손에든 명함을 보며 다시금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쩌지? 그냥 한 번 해볼까? 안 받으면 그 비서에게 죽었다 여기면 되는 거고.. 그래, 한 번 해보자.”


소파에서 일어서며 “휴대폰은 어디에 뒀더라?” 라는 물음을 시작으로 또 한참을 허비하던 그녀는 드레스 룸의 구석에 던져둔 휴대폰을 가까스로 찾았다. 타인과의 교류를 병적으로 싫어하다 보니까 딱히 사용할 일이 없어서 방치해둔 상태였다.


'일단 휴대폰은 찾았고, 던지기 전에 꺼놓았으니 배터리도 있겠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원 버튼을 누르고 메인 화면이 떠오르기까지의 몇 초 사이에 치열하게 고민했다. 드레스 룸을 나와서 발코니로 가는 동안에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번호를 눌렀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다 못해 아예 깨문 채 통화버튼을 누르곤 오늘따라 더 불편한 신호음을 가만히 듣던 중, 누군가 전화를 받자 반사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긴장하면 안 돼.’


휴대폰에 살며시 귀를 가져다 대니, 예상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와 그녀를 당황케 하였다.


-이 우자[愚者]의 예상보다는 오래 걸리지 않았군요. 이제야 이렇게 인사를 하게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당대의 예지자여.

‘뭐야? 웬 할아버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망설이다가 그냥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


-벗어남과 이겨냄은 다른 것이지요.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노인의 현기 어린 목소리 속 익숙한 내용이 들려오자 그녀는 눈을 감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모든 게 망상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는 바토리와 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홀로서기를 천명하고 혈혈단신 거대한 힘에 맞서려는 붉은 여인과, 세상을 뒤흔들 듯 강대한 소용돌이를 갈무리하고 당당히 대지를 밟았지만, 자신이 훔쳐본 몇몇 절대자들의 위용에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도전자의 행보를..


‘나도 그들처럼..’


당대의 예지자는 호흡을 고른 뒤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명함을 보고..”


꿈과 현실의 경계, 피식자와 포식자의 접점, 세상과 이면의 간격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의 삶이, 이 한 통의 전화로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었으니, 혼돈을 향한 또 하나의 연은 그렇게 이어져갔다.

이처럼 연과 연이 닿아서 얽혀 드는 것을 필연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기 메마른 대지 위, 비포장도로를 털레털레 걸어가는 두 소년에게도 어떤 필연이란 것이 이어지게 되는 걸까?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어느 죽은 농장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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