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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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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2018.03.26 19:27
연재수 :
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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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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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37,868

작성
16.12.2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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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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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12쪽

엽인들 [다프네..1]

DUMMY

그녀의 거실은 여전히 어둡고 적막하여 조금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나마 들려오는 나지막한 타이핑 소리가 괴괴한 분위기를 잘게나마 부수긴 했지만, 20여 평이 훌쩍 넘는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카우치소파와 그 위에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여인의 실루엣은 언제나처럼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물론, 모니터의 은은한 불빛에 비친 경이로운 미모가 그 모든 기괴함을 상쇄하긴 하였지만, 그녀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때때로 뱉어내는 진한 한숨이 거실의 분위기를 어쩔 수 없이 스산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또 어떤 종류의 잔혹사를 바알제불에게 전해주려는 걸까?


하바롭스크의 가난한 역무원이 벌이게 될 또 하나의 처참한 존속살해? 아니면 마세루의 도기공방을 피로 물들인 끔찍한 포식의 모습? 어쩌면 일방적인 죽음에 관한 내용은 아닐지도 몰랐다. 세상의 이면에서 벌어질 치열한 전투 속 전사들의 활약상일지, 누가 알겠는가?

가끔 타이핑을 멈춘 채 입술을 깨물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을 보면, 그게 어떤 내용이든 결코 유쾌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희열이 어린다. 기다란 손가락들의 율동이 절정을 치달아 종장에 이르는 순간, 그녀는 소리 나게 엔터키를 누르고 호흡을 멈춘 채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발신완료 메시지가 뜨자 노트북이 부서지라 덮개를 닫았다. 눈가에 머물던 후련함이 얼굴 전체로 퍼지며 아름다운 미소로 그려지다가 이내 안타까운 한숨으로 화해 입 밖으로 뱉어졌다.


“미안해요,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아직은..”


묵념하듯 고개 숙이자 잊을 수 없는 과거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부디 그대의 사명이..’


목소리와 함께 참 시원했던 미소가 눈앞을 스치자 그녀는 도톰한 입술을 악문 채 잠시 그를 추억하곤 고개 들었다.


“나의 사명.”


그녀는 팔을 쭉 뻗어서 기지개를 켜고는 소파에서 내려왔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걸음을 옮기자 움직임을 감지한 LED등이 은은한 불빛을 밝혀 하늘거리는 흰색 원피스를 쫓는다. 체스판 형태의 조명은 침실로 이어지다가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춰 선 유려한 곡선을 비췄다.


“어쩌지?”


평소라면 발코니로 나가서 머리를 식히거나 샤워실로 향할 텐데, 드레스 룸도 아닌 침실의 문고리를 잡은 모습이 조금 어색해 보였다. 한참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문고리를 돌렸다. 설마, 다시 잠들기라도 하려는 걸까?


“언제까지 외면할 순 없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며 침실로 들어서자 암울한 어둠이 그녀를 반긴다. 방의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 밑에서 물건 하나를 끄집어낸 그녀는 연이어진 움직임을 감지한 조명이 붉을 밝히자 침대 위로 올라갔다.


“더 망설여선 안 돼.”


그녀의 새하얀 손에 들린 건 40cm가 조금 안 되는 길이의 가죽 케이스였다. 가장자리에 달린 지퍼를 열다가 멈칫한 그녀는 천장의 조명을 슬쩍 올려다보며 중얼댔다.


“혹시?” 며칠전에 본 첩보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자 그녀는 슬그머니 이불을 당겨서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저러다가 잠이라도 들면 낭패일 텐데.. 어쨌든 이불 속 조그만 공간을 은신처로 삼아 조심스럽게 지퍼를 열고 안에 든 태블릿PC를 꺼내 들었다.


‘뭐가 들어있을까?’


PC를 손에 든 것만으로도 긴장되는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고 부팅 버튼을 누르자, 가죽 케이스를 건네 받았던 당시가 뇌리를 스친다. 그의 다부진 목소리와 얼굴도..




‘부디, 그대의 사명이 크고 위대한 것이기를..’




조금은 뜨거웠던 햇살이 따사로워지기 시작한 오후쯤 그녀는 우범지역으로 유명한 공원의 커다란 분수대를 맴돌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너무 일찍 나왔나 봐?’


손목시계를 힐끔 보고 시선을 옮기니, 분수대 중앙에 놓인 흉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돌고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석재 조형물은 머리통과 꼬리 부분이 심하게 파손된 데다가 시뻘건 핏자국에 탄흔까지 나있었다.


'이런 건 좀 고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시선을 옮기지 않는 건, 물이 메마른 분수대 바닥의 일회용 주사기, 담배꽁초, 찢어진 옷가지와 생리대 따위를 감상하는 것보다는 백 번 나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 작명한 먹다 남긴 돌고래를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신도 모르게 탄흔의 개수를 헤아리던 그녀는 불과 일주일 전에 공원관리자가 총격 당했었다는 게 문득 떠오르자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옮겼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안 됐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그에 대한 추억을 싹 정리한 그녀는 찬찬히 공원을 살폈다.


조경 자체는 잘 되어 있어 곳곳에 자리 잡은 나무와 수풀은 제법 그럴싸해 보였지만, 마약에 취한 정키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물론, 그들을 향한 다프네의 눈빛에서는 어떤 감흥도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쟤들도 여전하네.’


사실 이 공원은 쓰레기장[junkyard]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남녀불문 혼자 오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장소였다. 다프네 같은 미인이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불을 보듯 뻔하였음에도,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보는 그녀의 얼굴은 그저 평온했다.

용감하다고 해서 불행이 비껴가는 건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공원은 사실 다프네가 즐겨 찾는 산책로 중 하나였다. 밤에는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한 장소였지만, 낮에는 정키들의 취침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도 없고 조용했기에 그녀는 귀찮은 작업남녀들을 피해 이곳을 찾곤 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왜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쟤들은 잠자기 바빠서 사람을 건드리지도 않는데.’


그녀의 한가로운 생각과 달리 아주 가끔씩 이 쓰레기장에 발 들이는 천둥벌거숭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 90퍼센트가 강도질을 당했고 나머지 10퍼센트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어느 사창가에서 발견되곤 했지만, 어쨌든 그녀에게만큼은 이 무법지대가 정말로 괜찮은 산책로였다.



저 놀라운 미모의 여인을 노렸던 자들 중 분수대에 목이 걸리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정키야드의 기요틴 걸.’


이 유치찬란한 닉네임이 바로 그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거리의 갱, 경찰, 기자들을 비롯한 관계자 모두가 쉬쉬하는 유명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혼자서만 모르는 정키야드의 기요틴 걸은..


‘그래도 저들은 편히 자니까, 그건 좀 부럽네.’


따위의 망상을 하며, 벌써부터 시작된 금단증상을 견디려 억지로 잠을 청하는 중독자들의 신음을 평온한 잠꼬대 정도로 듣다가 들려온 쾌활한 웃음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다프네 씨. 이렇게 나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거, 그때보다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군요.”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며 말을 건넨 사람은 정신병원에서 명함을 건넸던 바로 그 남자였다. 어설픈 작업남처럼 느끼한 멘트를 던지다가 밑도 끝도 없이 도망쳤었던..


“예, 안녕하세요. 이렇게 또 뵙네요.”


그는 여전히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안쓰러울 정도로 초췌하고 어두워 보였다. 괜스레 긴장돼 경각심 어린 눈으로 그를 살피던 다프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라 신음을 흘렸다.


“아니, 당신 팔이..” 군청색 짚업 재킷의 왼팔 부분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힘없이 흔들거린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훈남이 팔 없는 불구가 되어 나타나다니..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자 그는 왼쪽 어깨어림을 툭 한 번 치고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팔 하나 잃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래 봬도 그년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건 제가 처음이니까요.”


그의 웃음소리는 밝았지만, 그년이라는 단어를 씹어뱉을 때의 어감은 날이 잔뜩 서 있었고 왼쪽 어깨부위를 쓰다듬는 손의 미세한 떨림은 그때의 고통과 심경을 대변해줬다. 그래서 더 염려를 지울 수 없어 다프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 같은데, 약속을 뒤로 미루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일단은 치료부터..”

“예? 아니요, 아닙니다. 일정을 미루다니, 어찌 그리 무서운 농담을 하십니까? 사실 저는..”


부드럽게 걸어서 다프네의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익살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엽인이랍니다. 그러니 이런 조그만 상처 따위는 웃어넘기지요.”

“예? 작아요? 아니, 당신 팔이 잘렸어요. 그러니까 일단 몸부터.. 잠깐만, 엽..인? 당신이 바로 그 엽인이라고요?”

“예, 제가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엽인입니다.”


다프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린다.


“정말로 당신이?”

“바로 그렇다니까요?”


새삼스레 그를 다시 본 다프네는 왼팔이 날아간 건 벌써 잊었는지 두 눈을 반짝였다.


“엽..인, 꿈에서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봐요. 와, 세상이 정말로 좁구나. 그런데 얼핏 듣기론 능력이 없어서 지리멸렬했다고..”


생각 없이 던지고 보니 실례라 말끝을 흐린 그녀가 어색하게 미소를 머금자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오히려 사과하며 살짝 고개까지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신비를 제대로 잇지 못해서 지지부진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은 정보 쪽에 치중하느라..”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받았다.


“아니요, 제가 실례되는 말을 했어요. 그런 뜻으로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우리를 보지 못한 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 거랍니다.”

“예? 아니, 뜬금 없이 그게 무슨.. 그리고 기억이라니요? 저 보기보다 머리 좋아요. 많이 자서 그렇지 웬만한 건 다 기억해요.”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저주를 받은 대신에 수많은 축복을 대가로 얻었다는 것을..”

“예? 그건 또 무슨..”

“죄송합니다. 이거 쓸데없는 말을 해서 말이 길어지네요. 중요한 건, 다프네 씨가 우리를 봤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는 조금은 서글픈 듯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다프네 씨, 당신이 무게를 두지 않은 장면은 망각의 영지에서 가지고 나오지 못한답니다.”

“망각의 영지요?”

“제가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자세한 건 장로께서 차차 알려드릴 겁니다.”

“장..로?”

“예, 그 또한 당장 설명하긴 어려우니 일단은 그렇게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제가 엽인이라서 이 딴 상처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팔이..”

“허세가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진솔한 표정과 눈빛에서 한 점 거짓도 읽어내지 못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다프네는 다시 물었다.


작가의말

크리스마스 즐겁게 잘 보내셨는지요. 이제, 제 2장 엽인들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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