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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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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2018.03.26 19:27
연재수 :
3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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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62
추천수 :
4,145
글자수 :
2,037,868

작성
16.12.30 19:25
조회
448
추천
15
글자
11쪽

엽인들 [친우..2]

DUMMY

수도꼭지를 틀어서 온수가 나오길 기다리며 세면대의 거울을 보니 어린 시절 ‘나는 저렇게는 안 돼야지.’ 하고 생각하던 폐인 아저씨가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었다.


“좆도, 보기 좋으십니다?”


망할 놈의 게임에 중독된 채 밥 먹듯 날 세고 불면증을 이긴다며 들이켰던 소주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덥수룩한 머리, 핏기 없이 누렇게 떠 푸석한 피부, 옅게 충혈된 눈동자와 피로에 찌든 얼굴이 비쩍 말라 똥배만 볼록한 몸과 어우러진다.


“이러니까 여친이 없지. 학교 다닐 때는 그래도.. 에휴, 그러면 뭐하냐? 현실이 좆망인데.”


그의 기다란 눈매에 짜증이 서렸지만, 누굴 탓하랴? 스스로 만든 현실인 것을..


‘아직 안 늦었으니까 힘내자, 바꾸면 되는 거야. 전부다 바꾸면 돼.’


그리곤 세수를 한 뒤에 언젠가부터 한 몸처럼 느끼는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걸쳤다. 부엌에서 빈 물통 하나를 챙겨 검은색 힙색에 넣어 허리에 차고 진회색 밀리터리 캡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는 문을 닫기 전에 들려온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I got a dream~”


그나마 다행인 건, 등산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에 대한 역겨운 자기합리화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열심히!’ 계절의 끝자락이라도 겨울이라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몸을 휘감는다.


이유 없는 짜증과 대상 없는 원망이 바람에 날려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진 젊음은 하늘을 향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얼굴에 와 닿는 따스한 햇살과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정말로 멋진 날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머금던 젊음은 불현듯 눈살을 찌푸리고 욕설을 뱉었다.


“날씨 한 번 더럽게 좋네.”


좁다란 창 너머로 본 것과 달리 하늘은 높고 더없이 넓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데 그마저도 버겁게 느껴져서 시선을 돌렸다.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그려진다.


‘열심히 살다 보면, 당당히 쳐다볼 날이 있겠지.’


진회색 모자를 푹 깊이 눌러쓴 젊음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석 달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오른 뒷산 약수터였다.


‘일단 움직이자.’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가 그렇게 시작됐지만, 그의 육체와 정신은 다시 달리기 위해서 조금씩, 확실하게 변하고 있었다. 푹 눌러쓴 모자로는 부족했는지 고개 숙인 채 걷는 모습이 서글퍼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뭐가 그리도 부끄러운지 땅만 보고 걷던 젊음은 산으로 들어서는 경계에 도착해서야 심호흡 하며 모자를 슬쩍 올려 썼다.


“좆 같은 거.” 습관적인 욕설도 흘리고..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부모님 연배나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과 계속 마주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산어림까지 오는 길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솔직히 아는 사람도 없고 딱히 자신에게 관심 두는 것도 아니었는데,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에 고개들 수가 없었다.


“요즘 왜 이러지 정말, 이러다가 대인기피증 걸리는 거 아니야?”


다시 중얼중얼, 정신병 초기 증상을 보여주던 젊음은 갑갑하게 시선을 가린 밀리터리 캡을 벗어서 힙색에 대충 쑤셔 넣었다. 모자에 눌린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흩뜨리곤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셨다.


“아, 이제 좀 살겠네.”


그는 갑갑함을 토해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향해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거라도 하는 게 어디야?”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그럴듯한 이유를 단다.


그냥 산을 오를 뿐인데, 인맥이 돈독해진다, 탁월한 전신운동 효과가 있다, 멋진 이성과의 섹스보다 더한 성취감과 짜릿함을 느낀다, 우울증이 고쳐지고 정력도 좋아진다,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경이 정신을 맑게 한다, 심지어 산으로부터 삶을 배운다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들은 전문가가 언급한 등산의 효능과 잘하는 방법까지도 굳이 찾아본다. 그냥 동네 한 바퀴 도는 것처럼 산을 오를 뿐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확고한 이유를 만들고 나면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등산할 시간에 다른 운동을 해도 그만큼의 효과가 있다는 말에 화를 낸다. 뜬금없이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고?


“다, 좆 같은 소리니까.” 묵묵히 산길을 오르며 그런저런 생각을 하던 불만 많은 이 젊음이 등산을 하게 된 이유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게임에 빠져서 한 달여를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있었을 때였다. 담배를 사러 동네 슈퍼로 가던 길에 문득 산책이나 해볼까 싶어서 걷기 시작했다. 날씨는 짜증이 날 정도로 추웠지만, 햇살이 정말 좋아서 걸음을 옮겼는데 사람들이 왜 이리도 많은 건지.


‘아, 출근 시간이었구나.’


밤낮 모르고 게임만 하다 보니 시간관념이 흐려졌다는 걸 깨닫곤 헛웃음을 흘렸다.


“좆 같은 거.”


하루를 시작하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허름한 트레이닝복에 깔깔이 차림으로 서 있는 자신이 왜 그리도 한심해 보이는지.


'아, 쪽팔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대로 집에 가면 왠지 더 비참해질 것 같아 대충 구겨 신은 운동화를 바로 하고 사람들을 피해서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자신처럼 트레이닝복을 입은 아줌마 무리를 보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산을 오르고 있었다.


“좆도..”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아닌가? ‘어휴, 내가 여긴 또 왜 온 거야. 이렇게 된 거 약수나 마시고 내려가자.’


밑도 끝도 없는 산행을 그렇게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땀에 푹 젖은 트레이닝복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툴툴거리며 샤워를 했는데,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그리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아침에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약수가 참 시원하던데..’


그래서 조그만 물통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다음 날에는 힙색을 허리에 찼고.. 그게 산행의 시작이었다. 그에게 등산이란, 다행히 돈이 안 들고 사람들의 눈도 피할 수 있는 산책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약수도 맛있고.


'벌써 다 왔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약수터로 이어진 마지막 돌계단을 디디자, 시원한 약수 한 모금 들이켤 생각에 목이 칼칼해져 온다. 연신 마른 침을 삼키며 걸음에 박차를 가할 때, 어디선가 요란한 괴성이 들려왔다.


“김 창 수!”

“어휴, 저 미친놈.”


그는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리며 조금 더 서둘렀다. 마치 그를 반기듯 우렁찬 고함이 연이어 들려 온다.


“김! 창! 수!”


‘야호’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지르는 괴성의 색깔은 보통사람들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산에 올라왔다는 성취감이나 자연에 대한 감탄, 경외가 아니라 젊음 자체를 있는 그대로 토해내는 것만 같다. 이렇게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는 강렬하고 호탕한 울림을 들은 젊음은 오늘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식이, 빠르네 빨라.'


그는 시원하게 약수를 들이켠 뒤 물통을 채워 힙색에 넣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내려갈 것 같지는 않고, 산행을 더 즐기려는 걸까? 그는 수풀이 무성하고 협소해서 왠지 꺼림칙해 보이는 샛길로 들어서며 한껏 숨을 들이켰다.


‘이놈아, 조금만 기다려라.’


산을 오르다 보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이런 샛길이 간혹 보이곤 한다. 대다수는 항상 가는 길, 누군가 이미 만들어 둔 익숙한 길로만 다니지 웬만해서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왜냐고? 검증되지 않은 것에의 호기심이나 모험을 위험하고 유치한 짓, 또는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쓸데없는 행동으로 치부하는 세상에서 굳이 샛길을 택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것이 성숙하고 현명한 어른의 자세가 아니던가?

날카로운 눈매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은 삐뚤어진 자세로 세상을 대했던 젊음 역시 딱히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그가 샛길로 들어서게 된 건, 유치한 자격지심의 발로였다. 두어 달 전 그날도 별다른 생각 없이 약수터에 올랐는데..


“아, 웰빙, 웰빙하더니, 요즘은 계모임도 웰빙하게 산에서 하나 이런 좆 같은 거.” 산악회에서 단체로 겨울산행이라도 왔는지, 약수터에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당당히 내뱉은 욕설과 달리 급히 후드를 뒤집어 쓴 젊음은 소심하게 툴툴거리며 망설이기 시작했다. 본래대로라면 시원하게 약수를 마시고 철봉을 비롯한 몇몇 기구들을 이용해 땀도 좀 흘려야 하는데.. 어머니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 십수 명이 힐끗 볼 때마다 괜히 움츠러들어서 물도 마실 수가 없었다.


‘젊은 놈이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서 뭘 하나, 하겠지? 나만한 자식이 있을 테니까 벌써 견적은 나왔을 테고.. 아, 좆 같은 거. 그냥 내려갈까? 아니지, 지금 내려가면..’


이대로 내려가면 동네슈퍼에서 소주 한 병과 컵라면을 사 들고 청승을 떨 게 분명하였기에 그는 내려가진 않았다.


‘정상까지는 너무 멀고.. 저기 저 길은 어디로 이어진 건지도 모르겠고.. 아, 죽겠네.’ 참 넓고 넓은 산에 있건만, 저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유가 뭘까?


혼자만의 망상 속 따가워지는 눈초리를 의식하며 약수터의 가장자리를 서성이던 그는 마침 수풀에 가려진 샛길이 눈에 들어오자 일단 들어섰다. 그리곤 “어? 여기에도 길이 있었네? 오늘은 이리로 가볼까?”라고 괜히 큰소리를 내며 쫓기듯 걸음을 옮겼다.


만일 그때 이 샛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더는 약수터에 오지 않았겠지. 샛길을 따라 십여 분 정도만 오르면 장정 10명은 엉덩이를 걸칠 만한 바위가 나온다는 것도 몰랐을 테고.. 그 바위 위에서 그 자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었겠지.’


무성한 수풀에 묻혀 좁다래진 길 끝에서 걸음을 멈춘 젊음은 잠시 호흡을 정리하며 바위 위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방금 들려온 괴성의 주인공이자 유일한 대화 상대인 덩치가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명진이 형!”


작가의말

제2장, 엽인들을 이끌어가는 남명진의 등장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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