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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다.

신석기 제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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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작품등록일 :
2021.05.12 20:32
최근연재일 :
2021.08.04 19:07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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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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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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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48. 조상신(21)

DUMMY

“떨어져라.”


쿠르릉!


벼락 몇 줄기가 반얀 마을을 향해 떨어졌다.


[크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악령들은 각자 비명을 지르며 벼락이 떨어지는 인근 범위에서 벗어났다.


굳이 벼락을 맞지 않아도, 벼락이 가진 본연의 사악함을 태우는 힘이 있다. 그것에 스치기만 해도 녀석들은 피해가 막심하리라.


[벼락이 떨어진다!]

[다들 피해!]


악령에 씌인 반얀 부족원들이 미친 듯이 발을 놀린다.

움집 몇 채는 벌써 불에 타고 있었다.

다만 숲에 기운에 눌려 불은 금새 꺼져버렸다.


“후우...”


오늘치 영력이 벌써 떨어졌다.

나는 영력을 거두고 숲으로 돌아갔다.

이 짓만 벌써 며칠 째였다.

녀석들을 벼락으로 위협하며, 반얀 부족에 씌인 원력을 정화하는 것이.


‘부족하다.’


하지만 벼락 한두줄기를 찔끔찔끔 내리는 것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한 번에, 깨끗하게 정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레미르의 신력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우레미르...’


하지만 정작 녀석은 내게 힘을 빌려주지 않는 중이었다. 난 녀석이 가진 기본적인 중계기로써의 기능만을 쓸 뿐.

더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후우...”


며칠동안 우레미르와 교신하려 시도했지만, 녀석은 전혀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전사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사하시와 대전사들에게 가르침도 받아보는 중이었다.


그러나 창술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고, 기적처럼 무기와 하나된 경지에 진입하는 일도 없었다.

진정한 전사가 무엇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얌전히 숲을 걷던 중, 익숙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아샤였다.


“무슨 일이니, 아샤?”


“주술사님.”


아샤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주술사 님처럼 주술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해요?”


“뭐?”


“사실 주술사 님을 따라해 봤어요.”


아샤는 부끄러운 듯, 손에서 다진 약초 덩어리를 꺼내들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약초 덩어리가 꿈틀거리더니 점차 주술문양의 형태를 취했다.


버력 떨치기 주술이었다.


“이거, 네가 만든거니?”


나는 그 문양을 손으로 꾸욱 눌러보았다.


퍼엉!


약초덩어리로 만든 주술문양은 잠시간 따끔한 붉은 빛을 내뿜으며 터져 버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이었다.


“놀라운 재능이구나. 한 번 보고 여기까지 따라하다니.”


“하지만, 주술사 님은 그냥 손짓만 하면 문양이 허공에 생겨나잖아요. 저는 세티아가 주술을 쓸 때 자주 사용하는 약초를 기억해서, 한참을 따라그려서 성공한 거에요.”


영력이 넘쳐나는 제사장과 달리, 일반인 주술사는 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피나 약초 등을 매개로 주술을 펼친다.

하지만 이 어린 나이에 공격 주술을 이 정도까지나 따라했다는 건 분명 엄청난 일이었다.


‘잠재력만으로는 소슬바람에 버금가는군...’


엄청난 잠재력이다.

녀석이 꾸준히 수련한다면 매개체 없이 주술문양을 만드는 수준까지 올라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좋아 아샤. 나처럼 되고 싶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보려무나.”


사실 나와는 큰 상관도 없는 이방 부족의 아이였다. 하지만, 길을 알려주는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귀신목 하나에 등을 기대고, 나처럼 앉거라.”


나는 다리를 꼬아서 앉았다. 하상진의 세계에서 책상다리 내지는 가부좌라고 부르는 자세였다.

아샤는 유연하게 책상다리를 해냈다.


“다음으로, 눈을 감아라. 그리고 호흡을 최대한 깊게 들이쉬려무나.”


아샤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마 정중앙. 정수리. 뒷목. 척추와 명치 사이. 허리 부분. 네 성기 아래. 그리고 내가 짚어주는, 곳들...”


나는 아샤의 몸 곳곳을 만져주며 말했다.


“인간의 몸에는 일곱 개의 [문]이 있다. 이 문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흘러다니며 세상과 통하는 것이지.”


정확히는 인간의 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영혼이 인간의 몸을 흐르는 방향 같은 것이었다.

영혼만 인간의 영이라면, 문의 위치와 영이 흐르는 속도는 모두가 동일했다.


“이 일곱 문의 위치를 기억하고, 네가 앉은 땅의 촉감을 기억해라.”


주술사들이 영력을 수련하는 방법은 주변환경에 따라 전부 달라졌다. 물에 영기가 많다면 물 속에서, 땅에 영기가 많다면 땅에 발을 디디고, 공간 자체에 영기가 충만하면 그냥호흡만으로도 영력을 수련했다.


“네가 앉은 땅 밑. 그곳에 있는 수많은 나무 뿌리를 느껴보려무나.”


“예? 어떻게 땅에 앉아있는데, 그 밑에 나무뿌리를 느껴요?”


“넌 할 수 있다 아샤. 왜냐하면 넌 반얀 부족의 사람이기 때문이지. 숲이 너를 도울 거다.”


아샤는 내 말에 입을 다물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은은한 녹빛의 영기가 아샤가 앉은 자리에서 올라왔다.


“이게...”


“느껴라, 아샤. 입을 닫고 귀를 열어라. 눈을 감고 녹빛에 집중해라. 그 녹빛에서 목소리가 들려올 거다.”


“.....”


“그 목소리야말로, 반얀 숲 조상신들의 목소리다. 너희 터전의, 너희 조상의, 너희 신의 목소리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면... 바얏크, 혹은 세티아가 모든 걸 가르쳐 줄 거야.”


아샤는 더 이상 내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귀’를 열어주었으니 더 가르칠 건 없었다.

이 숲이 아샤의 스승 역할을 대신해줄 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반얀 부족 방향을 바라보았다.


“... 아까 분명 상당히 원력을 정화했는데.”


어째서인지 정화했던 것 만큼의 원력이, 다시금 마을에 팽배해 있었다.


촤르륵!


손을 휘젓자, 수백 개의 눈알 문양 주술이 떠올랐다.

눈알 문양 주술들은 허공으로 녹아들며 반얀 부족으로 향했다.

얼마 후 반얀 부족의 전경이 내 눈 앞에 드러났다.


“...?”


낙뢰로 인한 불은 꺼졌고, 부족원들의 몸에 들어간 악령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악령들은 부족원들의 몸을 일정한 배치로 도열시키고, 자신들 부족의 언어로 주문을 외우게 시키는 중이었다.

떨어져 있어 통역주술도 안 통하니 무슨 주문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무슨 주술이지...?’


무언가 원령의 힘을 증폭시키는 주술의 한 종류인 것 같았다.

주술을 관찰 할 때였다.


“...!”


부족원들과 부족원들 간.

그 사이사이가 마치 줄무늬처럼 변하는 듯 싶었다. 그리고, 무언가 흉폭한 짐승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정탐주술들이 모조리 깨져 버렸다.


“이 것들이...”


당장이라도 가서 벼락을 날리고 싶었지만, 오늘 벼락을 날릴만한 영력은 전부 써버렸다.

숲의 영력을 쓰고 싶었으나 숲의 영력을 함부로 쓰면 놈들이 가진 힘이 더욱 해방된다는 사실에 자제하는 중이었다.


“뭔가를 꾸미고 있군...”


나 역시 최대한 빨리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아샤를 놔두고 사하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늘, 그들과 사냥을 같이 가서 제물이라도 바쳐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우레미르가 제물을 받아먹고 힘을 빌려줄지는 몰랐지만.


최소한 제물을 바치는 순간 신계의 문을 열어서 녀석과 다시 대화할 수는 있을 것이다.



* * *



아샤는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세티아가 샤크티와 숲으로 들어간 후.

오랜만에 들어보는 세티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밖에, 죽었던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역병이 돌았을 때 죽었던 친구 파르한도. 옆집 아저씨 라주도. 세티아보다 나이가 많았던 샤말다스 할아버지도.

그리고 아주, 아주 나이가 많은 듯한 할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 할머니는 자신을 바얏크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샤의 몸 속 영혼을 이끌었다.

아샤의 몸은 아주 개운해져 있었다.


“으... 아... 꿈은... 아니겠지?"


아샤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르쳐준 문양을 허공에 그려보았다.


파앗!


주술문양이 그려졌고, 아주 작은 녹빛이 아샤의 손에 머물렀다.

마치 반딧불이 같은 녹빛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비록 금세 꺼지긴 했지만.


“와아...”


아샤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녹빛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금세 울적해졌다.

자신의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연기가 보였다.


며칠 전, 이방 주술사님과 마을의 검은 영혼들이 부딪힌 후.

마을은 저런 검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아샤는 마을에 두고 온 친구들과, 어머님들, 전사님들이 절로 떠올랐다.


세티아가 갑자기 나타나서 끌어당기지만 않았어도 친구들 정도는 데리고 오는 건데...


하지만 세티아나 주술사님에게 물어봐도, 주술저항력 때문에 너만 무사하다는 등...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만 설명해 주었다.

아샤는 검은 안개에 잠긴 마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 * *



“안개가 짙어졌군...”


나는 반얀 마을 방향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사하시가 의아하다는 듯이 반얀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안개따윈 안 보일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안개라니...”


“쉿, 잠시만... 기다리시오. 보고 올게 있소.”


나는 사하시를 조용히 시키고, 저 멀리 귀신목 사이를 향해 뛰어갔다.

그곳에 세티아가 서있었다.

그녀는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나이들어보이는 모습이었다.


샤크티와 같은 나이라는 것이 확연히 이해되는 모습이었다.


“샤크티는 잘 배웅했나?”


[예. 거기에다가 바얏크께 저들이 쓰는 주술에 대한 조언을 듣고 왔습니다.]


“그래. 왜 녀석들의 원력이 점차 불어나는 거지?”


[불어나는 게 아닙니다.]


세티아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저어 수십 개의 녹빛을 만들어내었다. 녹빛들은 한데 도열하더니, 반얀 부족원들이 취한 주술진의 형태를 취하였다.


[저들의 주술사는 저들의 영혼에 주술을 걸었지요. 저들이 가진 원력으로 이 숲을 오염시키기 전까지는, 저들이 이 숲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주술입니다.]


“안다.”


[그리고 저들의 주술진은, 숲을 오염시키는 중인 원력을 끌어 모으는 주술진입니다. 한 마디로 힘이 불어나는 게 아닌... ‘원래’의 힘입니다.]


“골치 아파졌군.”


하지만 동시에 안도되기도 했다.

증폭되는 게 아니라, 숲을 오염시키던 힘을 끌어오는 것이라면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끝도 없이 불어나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만, 그건 아니었나보군.’


끝이 없는 게 아니라면, 언젠가 전부 정화시킬 순 있다.


“그럼 혹시, 바얏크가 내 신과 대화를 나눈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나?”


내 기억으로는 바얏크가 우레미르와 교신한 후부터, 놈이 내게 전사의 자격을 요구한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건...]


세티아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


세티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다급히 어느 한 쪽을 바라보았다.


[안 돼. 아샤...!]


그녀는 다급히 허공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져버렸다.

이 숲 어딘가로 이동한 듯 했다.

나는 영력의 족적을 훑어 세티아를 쫓아갔다.


아무래도 아샤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 * *



아샤는 잠시 마을 가까이에 다가갔다.

이상하게 검은 안개는 마을 멀리서 보았을 때는 뚜렷히 보였는데, 가까이 가자 점점 옅어지더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샤는 마을과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마을을 구경했다.


마을은 조용했다.


다들 집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은 평화로운 것 같았다.

하지만 피부에 닿는 기분 나쁜 파동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절대 정상적인 환경은 아니었다.


아샤는 씁쓸한 눈으로 마을을 둘러본 후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아샤...! 아샤니?”


“...!”


아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이 아샤를 부르고 있었다. 사하시의 짝. 아샤가 가장 자주 찾는 어머님이었다.

사실상 아샤는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어머님!”


“아샤야, 어딜 갔던 거니. 이리 오렴.”


“어머님! 괜찮으세요?”


아샤는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이방 주술사님의 충고를 떠올리며, 숲 안에서 어머님을 불렀다.


“어서 숲 속으로 들어오세요! 숲 안은 안전해요!”


“아샤야, 이리 오렴. 발이 다쳐서 숲 안으론 들어가기 힘들어. 나를 부축해주렴.”


사하시의 짝이 애처로운 얼굴로 아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샤는 뭔가 수상쩍은 기색을 느끼고, 눈에 힘을 집중했다.

숲 속의 목소리들이 가르쳐준 대로 힘을 움직이니, 힘이 눈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아샤는 활짝 웃었다.

‘어머님’에게선 어떤 검은 기운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샤야, 어서, 어서 오렴.”


아샤는 달려갔다. 어머님 역시 구해가면, 사하시는 크게 기뻐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아샤!!!!]


등 뒤로부터 세티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힘’이 불어닥치는 것이 느껴졌다.


“세티아?”


“아샤, 너무 아프구나. 어서, 어서!”


아샤가 세티아를 보자, 사하시의 짝이 아샤에게 손을 뻗었다.

아샤와 사하시의 짝, 라티는 이제 손 하나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네 이년! 썩 꺼지지 못하느냐!]


환한 녹빛이 아샤의 등 뒤에서 폭포같이 쏟아졌다. 그리고, 라티의 얼굴이 마치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아샤! 빨리 날 잡으라고!”


쿠구구구!


동시에, 아샤는 마을을 뒤덮던 검은 안개가 실체화되는 것을 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뚜렷히 보였지만 마을 가까이 오자 희미해지며 사라진 안개.

그 안개가, 점차 라티의 한쪽 팔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을 가까이 오자 보이지 않던 안개가, 한 팔로 압축되자 다시금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라티의 손이 아샤와 그녀 사이에 있던 ‘무언가’를 뚫고 들어왔다.

아샤는 놀라서 물러서려 했지만, 안개가 손의 형태로 길어지더니 아샤의 목을 부여잡았다.


“잡았다!”

[사라져라!]


세티아와 라티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녹빛의 주술이 라티를 덮쳤고, 라티가 빠르게 아샤를 끌어당겼다.


“크아아아악!”


라티는 주술을 맞고 거의 스무 걸음은 넘게 날아갔지만, 그녀의 품에는 아샤가 안겨 있었다.


“해냈다! 해냈어!”


라티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흐하하하하하!”


움집에 숨어있던 악령들이 부족원들에게 깃들어 걸어나왔다.

그 중 센유엔 부족 족장의 혼이 깃든 아이가 외쳤다.


“바얏크, 최초의 조상신. 그 직계(直系)를 손에 넣었다!”


[네 이놈들,,,]




“아샤!”


나는 빠르게 세티아의 곁으로 달려갔다.

악령들이 아샤의 몸을 붙잡고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너무 아샤를 신경쓰지 않았다!


“세티아, 정화의 힘을 넘겨다오.”


[알겠습니다, 부디...]


“아니, 잠깐.”


정화 주술을 짜낼려던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영안으로 반얀 부족원들의 곳곳을 살폈다.


“....?”


이상하다.

어째서인지, 악령들의 흔적이 그들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은 분명 악령에 씌인 채였다.


“잠깐 세티아. 악령들이...”


세티아 역시 눈치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보이지 않는군요... 잠깐, 설마...]


세티아의 신체가 파르르 떨렸다.


[아, 안 돼...]


“무슨 일이지...?”


세티아가 고개를 저었다.


[‘하나’가 된 겁니다.]


“‘하나’? 설마 그 말은...”


[예.]


세티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완전히 저희 부족에 스며들어, 부족원들의 아주 깊은 곳까지 잠식했다는 뜻입니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저것들을 소멸시키려면, 숲의 모든 신력과 정기를 끌어써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 숲의 신비와 결계는 영원히 힘을 잃겠지요.]


“...방법이 없는거냐.”


[.....]


세티아는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 후, 그녀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변했다.


[자네의 신이 도운다면, 할 수 있네.]


바얏크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세티아의 입을 통해 뜻을 전하는 듯했다.


[자네의 신과 대화를 나눴지. 자네의 신은 자네가 진정한 전사의 뜻을 품을 때에만 힘을 빌려주겠다고 했었지.]


“그게 무슨...”


[나 역시 말이 안 되는 소리라 설득하려 했지만, 자네의 신이 그러더군.]


바얏크가 내 머리를 가리켰다.


[자네의 뇌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전사의 형상을 얼핏 보았다고.

그리고, 자신의 제사장은 위대한 전사의 태를 품은 자라고. 그러니, 분명히 자신이 힘을 빌려줄 자격이 있는 자로 거듭나리라고 말이야.]


“.....”


[자신의 제사장이, 진정한 전사의 형상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진정한 전사가 원한다면 자신은 우리 부족을 도울 것이라 하였었어.]


진정한 전사의 형상.

아무래도, 내가 서슬뱀의 기억을 읽는 것을 우레미르가 알아차린 것이었다.


‘우레미르...’


하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레미르가 말하는 진정한 전사란, 기억의 원주인이 말하는 서슬뱀일 터.

내가 어떻게 서슬뱀의 형상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는 나의 [근원].


제사장 된 자로서는, 자신의 [근원]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다.

거기에 그는 내 스승 우레노을을 단명하게 했고, 큰버루를 두 번이나 뒤엎으려 했으며, 결국 소슬바람을 잠들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용서될 수 없는 녀석의 존재를, 녀석의 기상을 받아들이라고?


‘못 해.’


뿌드득!


이가 갈렸다.

나는 반얀 부족에서 고개를 돌렸다.


“여기까지인 듯 하군요.”


[뭐라?]


“신력은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축복은 가져가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니, 지금 가겠다는 건가?]


“반얀 부족의 일은 반얀 부족이 알아서 하시길.”


서슬뱀의 기억을 감상한 이유는, 녀석의 추한 의지가 내 의지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놈의 존재를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잠깐. 기다리게.]


나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우레버루가 아직 저 안에 있긴 하지만 상관없다. 다른 탈것을 구할 것이다.

그때였다.


바얏크의 목소리가 울렸다.


[시도조차 안 해 보는건가!]


“... 충분히 도와드렸습니다.”


[아니네.]


바얏크가 내 앞에서 나타났다.

이번에는 세티아의 영체를 통한 것이 아닌, 자신의 신체를 직접 조종해서 나타난 것이었다.

제사장의 최종 경지의 힘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내 말은, 자네가 진정한 전사가 되는 것을 말한 것일세. 자네는 전사가 되려 시도조차 않으려 하는 것 같군.]


“지금껏 사하시와 다니며 그와 전사에 대해 토론한 것을 모르십니까?”


[그럼 더욱 말이 안 되는군. 왜 갑자기, 내 말을 듣고서 일을 포기한단 말인가?]


“.....”


[자네는 지금, 뭔가 받아들이기 싫은 것이 있어. 하지만 사하시와 토론하면서, 수없이 많이 들어왔을 텐데?]


바얏크가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진정한 전사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자’라고. 자네가 지금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것이라도, 자네가 지금 시도조차 회피한다면 자네는 결코 전사가 될 수 없어.]


“잘 들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신력과 축복은 알아서 거둬가십시오.”


바얏크를 뒤로하고 내 짐을 챙겼다.


[피하는 것으로 전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자네는 신의 힘을 빌리지 않을 셈이야?]


“다른 방법을 찾을 겁니다.”


[돌아가는 걸로는 답을 찾을 수 없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귀신목 숲을 나섰다.

이제 이 숲과도 작별이다.







한참을 걷던 중.


나는 어느 한 자리에 도착했다.

아샤에게 [문]을 알려준 자리였다.

아샤가 내게 보여주었던, 약초 덩어리가 아직도 자리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약초 덩어리를 집어들었다.


“...정말, 많이 노력했나보군.”


이 작은 약초 덩어리에, 무수히 많은 주술을 시도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와 비슷한 주술문양을 그려낼 때까지, 끝없이 노력한 것이다.


두근


문득, 뇌리에서 이상한 흐름이 느껴졌다.

서슬뱀의 기억에, 이상이 생겼다.

나는 의식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실생활에, 한쪽은 녀석의 과거를 읽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기억을 읽던 중. 놈의 기억의 흐름이 멈췄다.


우레가람.

내 반쪽이 태어나 그 이름을 짓는 부분에서, 녀석의 기억이 더 흘러가질 않는다.


녀석의 기억이, [그 다음]을 되돌아보기를 극렬히 거부하고 있었다.

강력한 고통과 회한의 감정이 [이 다음]의 장면을 막고 있었다.


“후우...”


나는 자리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지금껏, 서슬뱀의 기억을 읽으면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슬뱀과 우레가람의 아버지, 우레별이 어떤 사이였는지를.

그와 우레노을이 본래 어떤 사이였는지를.

마필리라는 여자가 가진 수상쩍음을.

큰버루의 과거를 생생하게 알게 되었다.


서슬뱀이 본래 내 대부라는 것조차 알게 되었으니, 충격적인 건 전부 알게 된 셈이었다.


“소슬바람, 알고 있어? 사실. 서슬뱀은 우레별, 내 아버지와 친구였데.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라고 할 정도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저 멀리 폭풍우가 몰려온다. 오늘 밤은 추울 것 같았다.


나는 소슬바람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녀가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는, 서슬뱀의 기억 중 신기한 점들을 말해갔다.


“소슬바람. 서슬뱀과 검은바위는 원래 사이가 조금 안 좋았던 거 같아. 그리고 원래 대모였던 억센꽃. 억센잎의 누이 말이야. 그 분도 서슬뱀하고 사이가 안 좋았던 거 같아... 재밌지?”


내 옆에서, 당장이라도 소슬바람이 내 말에 맞장구를 칠 것 같은 밤이었다.

하지만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을씨년스런 귀신목들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귀신목 숲을 벗어나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아샤가 남긴 약초 덩어리는 놓지 않고 구경하며 걸었다.


어느새 수많은 귀신목들 사이를 벗어나, 일반 숲에 들어섰을 때였다.


“....?”


바얏크는 내게 내린 신력과 축복을 거두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의 힘이 느껴진다.


“마음도 넓군. 더 안 도와준다고 했는데...”


특별히 오랫동안 정을 쌓은 마을도 아니고, 기껏해야 온 지 이레(일주일) 정도만 지난 마을일 뿐이었다.

도와줄 이유도, 필요도 없다.


[정말 그런가?]


“...우레미르?”


나는 문득 들려온 우레미르의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녀석과 교신을 시도해 보려 했지만, 여전히 녀석의 신계는 내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숲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이 마을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이냐. 내가 저곳을 도와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저들이 내게 신력과 축복을 주었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는 거냐. 우레미르? 난 이레 동안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너 뿐이야. 네가 신력을 빌려주었다면 모든 게 해결 될...”


나는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주절거리는 것이 굉장히 찌질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젠장! 그래, 난 찌질하다. 추잡하다. 그래. 그런데 어쩌라는 거냐?

네가 지금 나더러 서슬뱀의 정신을 이어받으라, 뭐 그딴 소리를 하는 거냐?

나와 녀석의 관계는 나와 네 관계 같은 게 아니야. 본질적으로 놈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설정되어 있어. 그게 제사장과 [근원]의 관계라고.

네가 놈을 전사라고 추켜세우고, 놈의 정신을 본받으라 한다면, 난 네 힘을 빌릴 생각이 없다. 그냥 다른 방법을 찾아볼 것이야!”


씨근거리며, 숲을 빨리 나서기로 했다.

그때였다.


[불가능한 일에 손을 뻗어라.]


우레미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너는 진정한 전사가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으리라.]


“뭐...?”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다시 침묵했다.

나는 녀석과 또 다시 교신해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불가능한 일? 그건 내가 서슬뱀을 받아들이는 거다.”


나는 이를 악물며 숲을 나갔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폭풍이 몰아친다. 곳곳에서 새찬 바람이 불고, 물이 뚝뚝 떨어진다.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게 전사라면, 난 전사가 되지 않겠다. 그런 게 전사라면 그런 힘은 필요없어!”


제사장은 합리적인 존재다. 비합리적인 전사의 길을 굳이 받아들일 필요 없다. 나는 나만의 방법을 찾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밤을 버틸 온기주술을 짜냈다.


그리고, 서슬뱀의 남은 기억을 감상하려, 녀석의 기억에 남는 미약한 사념을 뿌리칠 때였다.


-불가능한 일에 손을 뻗어라.


불가능한 일. 나는 서슬뱀의 기억에 의식을 뻗었다. 놈의 기억이 극렬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날뛰었다.

[다음]은 절대 보이기 싫다는 듯이.


“불가능한 일이라...”


문득, 서슬뱀의 기억 속에서, 그 기억을 감상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놈은 이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이것 역시 불가능한 일 중 하나인가...?”


나는 녀석의 기억에, 의식을 밀어넣었다.

기억의 저항은 빠르게 잦아들고, 기억의 흐름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서슬뱀이 가진 큰버루에서의 기억이, 마지막 순간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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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51. 조상신(24) +2 21.06.21 232 10 18쪽
51 50. 조상신(23) +1 21.06.20 224 6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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