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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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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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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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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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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DUMMY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로비를 두리번거렸다. 바지 주머니 안에 넣은 손을 빼지 않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그 대상을 찾지 못했거나 그저 습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장의자에 앉아있던 노파는 시야가 지루하던 차에 우연히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로부터 쉽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모자챙에 가려져 눈빛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강한 속셈이라도 있는 것처럼 남자의 눈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뻔히 보일 정도였다. 그 길을 따라 남자가 보는 곳을 노파가 바라보았을 때, 실은 별것 없었다. 남자는 그저 벽기둥에 붙여진 안내판을 읽고 있던 것이었다.


“금새문 환자 보호자 분.”


간호사가 노파 곁으로 다가왔다. 거동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로 건강함에 감사하기는 했으나 자신이 며느리의 보호자라는 사실이 할멈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만들었다. 꺼림칙할 것까지야 없지만, 못마땅한 구석이 있어 더듬거리며 답한 노파가 일어서서 간호사를 따라갔다.

간호사의 어깨와 등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 걷던 노파는 문득 앞서 걷는 이와 체구가 비슷했던 나나를 떠올렸다. 바로 오늘이었다. 처음부터 무리한 부탁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종종 속상하거나 괴로웠던지라 여명에게서 전해진 소식은 무척 반가웠던 것으로, 아주 생생하게 떠오른 기억이다.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나와 도진이 분명히 여명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은 분명했다.


“들어가세요.”

“고맙소.”


간호사가 가리키는 방향의 진료실로 노파가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이든 이의 시선은 간호사의 등을 쫓고 있었기에, 뒤에서 자신의 등에 꽂히는 시선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노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 멀리 있었지만 때로 어디를 보고 있는지 잘 알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한 법이다. 아까의 남자는 노파가 몸을 틀어 안으로 들어가는 옆모습을 물끄러미 수많은 사람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을 게다.”


안으로 들어서니 방안에는 문이 하나 더 자리해서, 노인이 환자를 만난 곳은 진료를 기다리는 대기실이었다. 턱을 감출 정도로 고개를 떨군 환자는 위로의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세한 떨림 속에서 더욱 수그리는 것만 같은 게, 설 자리를 잃어버린 존재는 더 위축되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용기를 내어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병든 속내를 전부 알지 못하는 노인의 말은 다소 태평하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상대가 잠든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워, 어깨를 감싸 안자 툭 쓰러지는 것 없이 그 행동을 받아내는 것으로 안심해야 하는 노파였다.


“이렇게 병원에도 오고, 무엇보다도 오늘 여명이를 만나러······”

“어머니.”


아직 고개를 들지 않았으나, 며느리의 목소리만으로도 반가워 시어머니는 하던 말을 멈추고 기쁜 마음으로 연신 호응했다. 한참이나 그런 후에야 원하는 목소리를 다시금 들을 수 있었다.


“왜, 왜 저를 데려오신 거예요? 저는 이제 안 돼요, 안 된단 말이에요.”


말을 뱉을수록 불안은 커져만 갔다. 노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것은 아주 오랜 기간을 좌절한 이의 슬픔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안 되기는 무어가 안 된다고. 다 괜찮을 것이다, 그러고 말 거야.”

“돌아가야 해요.”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수북하게 가리고 있는 머리 사이로 핼쑥한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정해라, 진정해.”


아이를 달래듯 몸으로 감싸가면서 만류해보았으나 오히려 상대방의 감정만 자극할 뿐이다.


“안 돼요, 있으면 안 돼요··· 안 된단 말이에요. 여명이한테 상처만 줄 거예요. 안 돼요.”


고갯짓이 격해질수록 알 수 없는 울분과 이제는 익숙한 슬픔도 깊어져만 갔다.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안쪽에서는 이를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모른 척을 하는 것인지 안부를 물어오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게 더 다행이란 생각에 노인은 며느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며 자신의 손과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도 오늘만은 꼭 봐야겠지, 여명이가 원하는 일이지 않니.”

“안 돼요······”


분노가 될 줄 알았던 감정은 그저 눈물만이 되어 여자는 흐느꼈다.


“정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오늘만 보는 게다. 오늘만. 가족의 날이니까 오늘은 여명이를 봐도 될 게다. 그래야만 할 게고.”


단단하게 붙든 손 사이에는 빈틈이 없는 것처럼 노파의 어조도 꼭 그러했다. 그렇다고 해도 며느리의 슬픔까지 붙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력이 무색하지는 않았는지, 어멈을 울게 한 전율은 약간이라도 잦아들었다.


“어머니는 모르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그녀의 마음이 머문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무얼?”

“저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말이에요.”

“알다마다. 내 못난 자식놈 때문이 아니더냐? 그리고 모르면 또 어떻고.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


며느리는 얼굴을 허벅지에까지 묻으며 스스로를 어르고 있었다.


“내 눈에는 네가 자신을 탓하는 게 보인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


보이는 그 등을 쓰다듬은 것을 잊지 않으며 노파는 말을 계속했다.


“죄를 갚아야지, 죄를 갚아야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죗값을 치르는 것은 옳지 않다. 죄를 지은 아들놈은 이제 죽어 없고 그 영혼마저 없는 처지인데 왜 네 영혼과 여명이의 영혼까지 없애려 드는 것이냐? 죗값도 영혼이 있고, 삶이 있어야 갚을 수 있거늘.”


손길은 끝나지 않았다. 노파는 쓰다듬던 손바닥으로 여자의 등을 토닥거렸다.


“여명이의 고통을 몰라줬어요.”

“그건 누구나 그런 게야.”

“엄마로서 그 애를 위로해줄 수 없어요.”

“사람은 크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법이지. 그 애도 다 컸지 않느냐? 그러니 이렇게 용기도 내서 우리를 불러준 것일 게고. 나무라지 마라. 나무란다면 끝도 없지, 이 어미라고 살아 있을 자격을 따진다면 과연 있을 리라고.”


안쪽의 문이 열렸다. 아까 보았던 간호사가 눈짓으로 노파를 부르고 있었다. 며느리를 위로하던 손짓을 서서히 멈춘 노파는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이에 더 슬퍼하거나 더 외로워하지도 않고 자신의 자세를 지키고 있었다. 얼굴을 들지 않아서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노파는 작게 안도했다.


“갔다 오마.”


대답은 없었다. 작은 틈 사이로 간호사 어깨 뒤로 의사가 보였다. 노파가 떠나고 문이 닫혔을 때까지도 여명의 어머니는 등을 펴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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