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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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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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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작성
20.09.0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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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95화

DUMMY

“무슨 이야기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먼저 답답한 쪽이 물었다. 건물 주위를 느린 걸음으로 배회하는 광경이 그리 여유로운 산책처럼 보이지 않던 건 두 사람 사이에 맴도는 적막감과 묘한 긴장감 탓이었다. 건물의 반을 걸어왔는데도, 나나의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보아 꽃다발을 건네줄 생각은 읽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게요.”


은비의 말을 비꼬려는 저의는 없었다. 나나는 단지 자기의 이야기도 아닌 것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묻는 말에 대답은커녕 동조하며 자신을 비웃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옆쪽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은비가 줄곧 꽃다발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을 것처럼 그쪽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런 말 실례라는 건 알지만, 두 분 서로 사랑하시는 거예요?”

“네?”


은비는 처음엔 황당한 마음에 수치심까지 느껴 두 볼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낯선 사람에게서 자신의 속내를 떠보는 듯한 질문을 들었을 때 침착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순간에 자신을 달래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한 자신이 못내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손등을 갖다 대며 식히자 금방 살결은 진정되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로 온 질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왜 그런 걸 물으세요?”

“아··· 그게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손이라도 자유로웠으면 허공을 허우적대며 망설이기라도 했을 텐데, 나나는 꽃다발을 들고 있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오로지 꼬인 발걸음으로만 망설이는 마음을 들켰다. 당장 이 모든 약속의 의도를 실토하자니, 무엇도 밝힌 게 없었다. 그것이 이 둘을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게 만들었다.


“알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김진석 씨가 꽃을 안 좋아하세요.”

“그걸 알려주시려고 질문하신 거예요?”


딱히 놀란 것처럼 보이지도 않은 은비였다. 어제 자신도 저런 표정으로 진석을 바라봤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나나는 그게 전부는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충 짐작하곤 있었어요. 다리 핑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매번 그런 게 조금 이해가 안 가긴 했거든요. 그런 거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거 모를 리 없거든요. 만약 그랬다면 처음부터 사귀었겠나요. 그런데 매번 물러서는 걸 보고 알아낼 수밖에 없었죠. 이 남자, 꽃을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은비는 공손하게 묶어두고 있던 손을 풀어 뒷짐을 지었다. 바뀐 행동 하나만으로 오고 가는 분위기는 긴장이 풀어진 듯하였다.


“그런데 그걸 알려주시려고 제게 그런 질문을 하신 거면, 너무 사적인 이야기 아닌가요?”


그러나 상대방은 아직 의심까지 놓지는 않은 듯이 보였다. 무뚝뚝하고 서늘한 인상의 진석이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이쪽의 성격도 겉모습과 정반대인 것 같다고 나나는 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오해를 받는 건 저 역시 싫은 탓에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곽은비 씨가 알았으면 하는 게 있어서 그런 거였어요. 이런 질문까지 부탁을 받은 건 아니었는데, 제 딴에 말을 꺼내려다가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제가 알았으면 하는 게 있다고요? 그럼 저희에 관련된 건가요?”


나나는 그녀의 추리가 맞다는 눈치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두 팔을 쭉 내밀었다. 그걸 보고 은비는 이제야 꽃다발을 전해 받는 줄 알고 자신 역시 팔을 뻗어 꽃다발이 주인에게로 가는 순간을 기다렸다.


“맞아요.”


아무리 기다려도 꽃다발은 제게로 오지를 않고, 미묘하게 굳은 나나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어차피 제가 한 잘못도 아니니까 그냥 덤덤하게 말할게요. 고해성사는 제가 아니라 이 꽃다발 시키신 손님 쪽이 하셔야 하거든요.”


내놓듯이 은비 앞으로 다가간 꽃다발이 다시 나나의 품으로 돌아왔다.


“두 분이 만나기 전에 항상 장미꽃 한 송이씩 매일 선물 받으셨죠?”

“지난 일인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 진석 씨가 말씀드렸겠구나.”

“네, 맞아요. 그런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알게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그거 김진석 씨가 갖다 놓았던 꽃 아니에요.”


설렁설렁 앞을 보며 곧 걸은 것처럼 자세를 유지하던 은비의 몸이 굳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때 조금이라도 눈치를 채셨는지야 저는 알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김진석 씨 생각에는 곽은비 씨가 전혀 몰랐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거든요.”

“무슨······ 그럼 도대체 누가?”


진석의 생각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은비의 눈빛이 탁해지는 속도에 따라 나나의 마음 또한 좋지 않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죄책감을 느끼면 안 된다는 정신으로 꽃다발을 바짝 죄었다. 어제의 그 아쉬람인지 무언지 하는 장미로만 가득 채워져서, 손끝에서 노을이 옅어져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이름은 까먹었어요. 원래 그 꽃을 놓았던 사람 말이에요. 뭐였더라? 고··· 고···”

“고규빈이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 아, 죄송해요.”


발을 크게 동동거리며 반가운 얼굴로 은비를 마주하던 나나가 바닥으로 얼굴을 숙이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 은비에게는, 나나의 표정 변화까지 세심하게 살필 만큼의 여유는 없었기에 이는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어쩐지, 정말 친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서로 서먹하게 지내기는 했거든요. 그런데 설마······ 무슨 상황이었는지 알아야 하니까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은비가 나나의 한쪽 팔을 붙잡으며 간청했다. 떨떠름하게 이에 응하기는 했으나, 달리 전할 사실이 새로 남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나는 그녀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런데 이게 다예요. 김진석 씨는 그 고규빈이라는 직장 동료 때문에 은비 씨를 놓치기 싫었대요. 그래서 용기를 내고 행동한 게, 전부 그 꽃을 가로채는 짓이었대요. 마치 그때까지 자신이 선물을 보낸 것처럼, 꽃을 건네며 고백하는 것 말이에요. 꽃도둑이라고 하는데 어감만큼이나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그 때문에 말을 하면 할수록 작아지는 게 목소리였다. 이렇게 확연하게 드러나는 게 나나의 감정이었다면, 은비의 시선은 혼란스러워서 도대체 어디에 두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잠시 망설이다가 나나가 꽃다발을 도로 앞에 내밀었다. 나나가 예상했던 대로, 순간이나마 은비의 두 눈동자가 꽃다발을 향할 수 있었다.


“이거, 받을지 말지는 은비 씨가 직접 결정하세요.”

“제가요?”


어느덧 두 사람 모두 꽃으로 시선이 쏠렸다.


“그러려고 아까 바로 안 드린 거예요. 비밀을 알고도 이 꽃다발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시라고.”


한참이나 꽃다발의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가 끝까지 이 꽃다발의 주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안 받으실 거예요?”


나나가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너무 혼란스럽네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도리질을 하였지만, 그 탓에 은비는 더 어지러워지기만 했다. 내민 팔이 저려와서 나나가 꽃다발을 아래로 내릴 때도 은비는 이를 말리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정말 사실인가요?”

“그렇대요.”


대개의 비밀이 그렇다. 대개의 비밀은 사실이다. 전해진 것만을 들어도 가슴이 아프다면, 그건 사실이다. 충격에 못 이겨 화를 내지는 않을까 싶었던 은비는 오히려 더 잠잠하게 입을 다물었고, 그대로 슬픈 얼굴을 떨구었다. 사실에 속았기 때문이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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