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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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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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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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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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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91화

DUMMY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거꾸로 거스르면서 직원과 손님 사이에 어떤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대로 불편했다. 정류장에서 자신에게 계속 말을 붙이던 것과 별개로 움직이는 공간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진석이 낯설어 나나는 앞에 앉은 그의 지팡이만을 자꾸 흘끔거렸다. 그가 뒤에 앉은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사실이었다.


“저······ 혹시”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어 부탁했던 진석과 다르게 다가온 버스를 보며 대충 얼버무린 기억에 오는 내내 그것이 마음에 걸려 괴로웠던 나나였다. 두 사람은 드디어 버스에서 내렸다. 그때까지도 둘 사이에 던져지는 눈길은 있었어도 버스에 오른 이후부터 말문은 막혀버린 상태였다. 도착한 이후에도 어색한 눈인사로 헤어지는 것이 전부였다. 지팡이를 짚으며 은행 쪽으로 걷는 진석을 불러 세운 것은 찜찜한 기분을 버리지 못하는 나나였다.


“그, 혹시 여자친구 분 만나러 가세요?”


자신이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나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주먹을 꾹 쥐는 것으로 간신히 인내했다.


“네, 맞아요.”


남자는 순순히 답했다.


“그러시구나, 하하. 좋으시겠어요.”


민망함을 달래려 자신의 허벅지를 때려가며 웃는 나나였다. 그러자 진석은 삐걱거리면서도 성큼한 걸음으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일 잘 부탁드려요.”


나나를 마주하면서 아까와 같은 말까지 하는 진석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 네··· 뭐 제가 만드는 건 없지만, 알겠습니다. 노력할게요.”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듣고 있자니 머쓱해도 대답할 수밖에 없는 나나는 직답을 내놓아야 했다. 뒷머리를 긁적여야 할 만큼 꽃다발을 만드는 데 자신의 영향력은 조금도 없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럼 말이죠.”


용건이 끝난 줄 알았던 나나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진석의 다음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문득 그가 지팡이를 더 세게 쥐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부탁이요? 저한테 하셔도 별 소용은 없을 텐데, 아니면 요청사항 있으신 거면 따로 적어서 사장님한테 전해드릴까요?”


앞치마 주머니에 먼저 오른손을 넣어 주화에게서 받은 쪽지를 꺼내 들었지만, 그다음에 왼손으로 아무리 뒤적거려보아도 필기를 할 만한 도구를 찾지 못하자 나나는 표정이 구겨지지 않도록 최대한 밝게 웃으며 쪽지까지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의 이런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고도 조금도 웃지 않은 진석은 오히려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사뭇 달라진 그의 태도에 걱정스러워진 나나가 물었다.


“이런 부탁을 해도 될지 몰라서요.”


무어라 대꾸하면 좋을지 몰라 그녀가 망설이는 동안에, 진석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본래 그가 하려던 부탁에 대한 설명이었다.


“내일 말이죠.”


진석은 다시금 숨을 가다듬었다.


“꽃다발을 전해주실 때, 저 대신 어떤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네?”

“주문과 관련된 부탁이기는 한데, 가능한 한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적었으면 해서요.”

“하지만 제가 꼭 배달을 가리란 법은 없는데······.”


나나가 말끝을 흐려가며 확신 없는 투로 답했으나 진석은 퍽 확고한 태도로 얼굴을 흔들었다.


“그쪽이 가주셨으면 해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던 나나가 의아함에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을 정도로의 확고부동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청혼하려고 하시는 거 아니에요? 제가 배달을 가서 제가 말을 전하면 저의 청혼이 될 텐데······.”


머릿속에서 달갑지 않은 상황을 그려가며 이야기한 나나가 반사적으로 몸서리를 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결혼하자는 말은 제가 직접 할 테니까.”


손사래를 치며 진석은 웃었다. 그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다.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직접 은비한테 전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차마 직접 말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까 그쪽을 보니까 마치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어요. 마치 성인 태강이 눈앞에 기적을 만들어준 것 같단 생각까지 들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신이 아닌 성인을 찾는 월계인의 사고방식에 감탄하기도 전에, 태강의 이름을 듣자 나나의 미간 간격이 더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저지른 사고를 애써 잊고 모른척하려고 노력 중이었으니 반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를 티 내지 않기 위해 주머니에 두 손을 감추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분명히 자신이 아래로 내려다 봐야 하는 시선의 차이였지만, 진석은 부탁하는 사람의 입장인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고 눈을 아래에서 위로 뜨며 우러르듯 나나를 바라보았다.


“들어드릴 수는 있는데 아시다시피 내일은 바쁜 날이잖아요. 게다가 내일 가져가실 꽃다발은 모두들 직접 가져가시는 거로 알고 있을 텐데.”


나나는 투덜거리려던 건 아니었지만, 몇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곤란해지는 일을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비밀만 지켜주신다면 사례금이라면 드릴 수도 있어요.”

“네? 아니, 돈을 받겠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나나가 두 손을 급히 빼내어 휘저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비밀이길래 직접 말씀하시지 못하는 거예요?”

“말하기 참 부끄럽네요.”


진석은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얼굴을 푹 숙였다.


“부탁하는 주제에 송구스럽지만, 먼저 승낙해주셔야지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순간 왜 모두 자신에게 부탁을 해오는 것인지 모르겠단 생각에 혼란스러워진 나나였다. 부탁이 뭔지도 모른 채 부탁을 들어줄 것을 약속해야 하는 것일까? 진석의 언탁은 여태껏 무례하지도 않고 겸손했던 것은 맞다. 부탁을 청하는 사람의 태도는 딱히 나무랄 데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지는 별개의 일이었다. 게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부탁을 들어줄 생각을 하자니 일을 맡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떠맡는 것처럼 불편한 책임감까지도 따르는 감정이 들었다.


“이야기만 전해드리면 되는 거죠?”

“들어주시는 건가요?”

“노력해볼게요.”


진석이 함박웃음을 짓는 사이에 나나의 눈에는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모를 일을 해야만 하는 자의 엄숙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뭐예요? 전해야 할 이야기, 그 비밀이라는 게.”


그녀가 까먹지 않고 비밀을 풀어헤치려 하자 진석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까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망설이면 안 된다는 집념에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기에 1분 정도 자신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가 나나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는 아예 그녀의 시선을 피해 밑의 땅바닥만 보고 있었을 때였다.


“제가 사실 꽃을 싫어하거든요.”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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