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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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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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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86,707

작성
20.08.31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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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88화

DUMMY

“저희가” 도진이 말했다. “무엇을 도우면 되는지 알려주시겠나요?”


“그게······”


유달리 말꼬리가 길어지는 여명은 오른손의 엄지로 반대쪽 손을 쓸었다. 가문 날에라도 달은 뜨고 있었을 테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그가 마치 기억이라는 시간이 이제야 성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더 높이 올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


“달이 뜨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다면 그때는 모든 눈물을 그칠 거예요.”


화분을 정리하느라 어깨 밑으로 고개를 푹 수그린 주화가 바닥에 대고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예요?”


멀지 않은 곳에서 대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던 나나가 이를 놓치지 않고 다가와서 물었다.


“음? 아, 노래예요, 노래. 엄청 유명한 노래거든요.”

“정말요? 전 처음 듣는 노랜데.”

“그거야 당연하죠. 세계에서 온 나나 씨는 들어본 적 없을 테니까.”


주화가 싱긋거리며 놀림조로 대답하자, 나나는 자신이 무심코 이곳 생활에 적응했다는 것을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곧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젠 괜찮았어요?”


먼저 주위를 둘러본 주화가 가게 밖에서 손님과 대화 중인 여명을 발견하고는 나나 옆으로 더 가까이 붙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비밀리에 더 자세히 듣기 위해서다.


“괜찮은 걸까요? 잘 모르겠지만, 괜찮았던 것 같아요.”

“하긴, 괜찮지 않고서야 사장님 표정도 저렇게 상쾌해 보일 수는 없겠죠. 드디어 다 털어놓았나 보네요.”

“네. 그리고 부탁할 게 있다고도 이야기했거든요. 그리고 나도진은······”


구김살 하나 없이 잔잔하던 나나의 얼굴에 짜증이 번졌다.


“왜요?” 말을 잇는 중간에 금세 주화가 물었음에도 그녀의 질문을 기다렸던 나나는 미적거리기는커녕 서둘러 대답을 털어놓았다.


“나도진이 말해준다고 했던 걸 아예 비밀로 만들었거든요.”

“무슨 비밀이길래 그렇게 화가 나 있어요?”

“비밀이 어떤 건지 알아서 화가 나는 게 아니에요. 비밀 자체를 알아서 화가 나는 사람은 없을걸요. 화가 난다고 해봤자 그 비밀과 관련된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건에 화가 나는 거겠죠. 저는 지금 그 비밀이 뭔지 모르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나나가 어설픈 발동작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나 소리 역시 미약했기에 도리어 우스운 꼴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 그녀는 왼쪽 입꼬리를 배뚤게 내렸다.


“어제 분명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뭔가를 알아 온 것 같은데, 말해준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여명 씨한테도 말하지 않더니 집에 가서도 그 누구한테조차 말하질 않는 거예요. 왜 말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글쎄, 오늘 밤에 셋이서 대화를 해보니 아직은 말하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고! 그러면서 당분간은 비밀이라고 하더라고요.”


떼를 쓰는 아이가 된 심정에 자신에게 화가 난 나나가 걸레를 툭툭 밀었다. 어차피 도진이 지금까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던 그녀였다. 게다가 당장 내일로 다가온 가족의 날을 생각한다면 도진의 선택이 옳은 방법이었다는 것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진이 잠시 동안의 기간을 정해놓고 만든 비밀 같은 것에 성질을 부릴 일도 아니었다. 나나는 알고 있었다. 당분간 미루어놓기로 한 이야기를 가진 도진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버린 것임을 나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께죽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닌 거 아니에요?”


시큰둥한 표정으로 벽면을 쳐다보는 나나의 옆에서 주화가 바람을 불어넣듯 말을 붙였다.


“뭐가요?”

“비밀이 뭔지 몰라서 화가 난 거 같지가 않아서요. 비밀이 뭔지 몰라서 화가 난 게 아니라, 그 비밀도 모를 만큼 한심한 나나 씨 자신한테 화가 난 거잖아요.”


정곡을 찔린 나나가 움찔거렸다.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마요.”

“그렇지만··· 나도진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그렇고 마치 제가 해결할 것처럼 절 으쌰으쌰 추켜세워줬는데, 막상 전 한 게 하나도 없는 거 같거든요. 이렇게 꽃집에서 일하는 것도 잡일이나 하고. 이게 보람차지 못하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뭐랄까 좀, 있잖아요. 부지런히 뭘 하기는 했는데 정작 해결해야 할 일에 다가가지는 못하고 그 주변만 맴돈 것 같은 느낌.”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죠.”

“그렇겠지만, 전 안 그래도 괴롭다고요. 백면 이 인간은 월계에 있어야 할 이유를 알려준다면서 코빼기도 안 보이고, 고여명 씨한테 어떻게 다가가서 친구가 되어야 하나 그런 생각밖에 없었는데 오히려 상대 쪽에서 선뜻 다가오고, 그 상대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여기에 머무르는 이유를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한 감정도 들고. 도대체 감당할 수도 들어줄 수도 없는 부탁을 들고 오는···”

“들어줄 수도 없는 부탁?”


나나가 묻지도 않은 말까지 쏟아내는 도중에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놓친 대걸레가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음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몸을 빳빳하게 굳히며 눈동자만을 굴리며 밖을 내다보니 여명은 이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쪽까지 들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 이건 실수······”


주화의 눈빛이 의심하는 동시에 탐색하는 탐정의 것으로 바뀌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머릿속을 하얀 백지로 바꾸어놓고 얼떨떨하게나마 해말간 웃음을 지어보았지만, 소용은 없는 일이었다.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을 한 사람이 있어요?”

“네? 아니요, 아니요, 없어요.”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말이죠.”

“네?”


같은 말을 대답으로 하면서도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 나나가 우스워서 주화가 입술을 오그리며 웃음소리를 간신히 내었다.


“뭐, 굳이 말 안 해도 아는 사실이죠. 비밀이랄 것도 없는 애라니까요, 태강은. 걱정하지 말아요. 나나 씨가 말실수하기 전에 이미 알게 되었으니까.”


자신의 실언으로 인해 태강에게 또 시달리게 될까 봐, 끔찍한 얼굴을 한 나나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을 조금 놓은 듯 보였다.


“태강은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든지 자기 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이번엔 그 대상이 나나 씨였다니 의외면서 조금 섭섭하고 아쉽기도 하네요. 아마 영월이 아니라 태강이 먼저 와서 그런 부탁을 했다면 나도 협조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영월? 그 사람이 알려준 거예요, 그럼?”

“맞아요. 어찌 되었든, 태강은 자기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이라고 생각은 했겠죠?”


나나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것이 웃겼는지 주화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웃음을 참았다.


“태강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너무 속상해하지도 말고요. 지금 당장에 나나 씨가 도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도와야 할 사람이요?”


나나는 저도 모르게 밖을 내다보았다. 대화를 마친 후의 악수를 끝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여명의 눈길과 맞닿는 시선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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