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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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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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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86,707

작성
20.08.29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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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86화

DUMMY

“부탁이 뭔데요?”


자신 앞의 밥그릇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나나가 제일 먼저 물었다.


“아, 그게 말이죠······”

“천천히 이야기해도 된다.”


막상 말을 꺼내려니 떠듬거리게 되는 여명의 모습을 보고 그 옆의 노파는 손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감사해요.”


고개를 돌려 그런 그녀를 따스한 시선으로 보던 여명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노인에게 전한 말과는 다르게 눈에서는 긴장감이 잔뜩 느껴졌기에 도진은 나나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향하는 그 눈빛에 괜히 마른침을 한 번 삼켜야 했다.


“우선, 우선 말이죠.”


여명이 식탁 아래 자신의 두 무릎 위로 올려둔 손을 꽉 쥐었다. 그런데도 결심대로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았다. 거칠고 아쉬운 한숨으로 잠깐의 적막을 메꾸어도 보았지만, 감칠맛이 나는 쉼표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결국에는 고개만 이리저리 상하좌우로 고루고루 움직이기만 하던 여명이 마지막에는 타인의 면전에 대고는 할 수 없는 죄인의 고백이라고 떠안은 듯 얼굴을 바닥으로 푹 숙였다. 알 수 없는 그의 의아한 행동에 나머지 세 명은 서로를 번갈아 훑으며 눈치를 살폈다.


“아니에요, 아직은 할 이야기가 아닌 거 같네요.”


여명을 제외한 모두가 그를 기다리는 동안에 갑자기 얼굴을 고쳐 든 여명의 맹랑한 발언에 어쩐지 나나와 도진의 어깨는 축 처지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러시죠? 편하게 이야기하셔도 되는데···”

“그런 게 아니라··· 편하게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여명은 자신의 조모를 힐끔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맞닿았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명이 급히 회피하여 맞은편의 나나를 응시하였던 까닭이다.


“별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들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그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가면서까지 자신이 꺼낸 이야기를 없던 것으로 치부할 동안에 나머지 사람들의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특히 불안감이라고 한다면, 노파가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기도 했다. 노파의 동공을 가득 메운 것은 헤벌린 입술 사이로 아무 말이나 뱉으며 좀 전의 상황을 무마하려는 손자의 모습이었다.


“괜히 제가 식사 흐름을 끊은 것 같네요. 다시 수저나 들까요?”


얼른 분위기를 이전으로 돌리기 위해 솔선수범하여 숟가락을 드는 여명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나나와 도진, 두 손님의 움직임을 멈춘 것은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노파는 집 안에 있었기에 이 공간에서는 백면의 영혼을 나누어 가진 세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보니 자신은 꽤 전에 초영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그 길 위에 서 있음을 자각한 여명이다. 공연히 떠오른 그 기억에 민망해진 그는 입을 꽉 다물었다가 망설이는 사이에 입을 작게 열었다.


“왜 그러시죠?”


흑석의 거울을 넘기지 않으려고 장난을 치는 나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며, 짐짓 무게를 잡는 도진이었다.


“두 사람······ 잠시 이야기 좀 들어줄 수 있을까요?”


이미 그가 하려는 말이 대충 어떤 갈래의 이야기인지 식사자리에서부터 짐작했던 도진은 바로 이에 응했다만, 그의 부탁이란 게 무언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던 나나는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도진의 태연한 태도를 보고는 자신도 따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머니 앞에서 두 사람한테 비밀을 털어놓기 조금 힘들어서 그랬어요.”

“비밀이요?”


자리에 앉으며 나나가 물었다. 여명을 따라 들어온 공원에는 어둑어둑한 밤하늘 아래로 달빛을 물결로 담아내는 연못 하나가 크지 않은 크기로 공원의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향하다가도 다시 여명에게로 돌아가는 시선에 나나는 도진을 가운데에 두고 여명을 건너 바라보았다.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들은 그렇게 사람 혹은 사물을 계속 들여다보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꼿꼿하고 바른 자세로 고친 여명이 우선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요. 두 사람도 피곤할 텐데 이렇게 늦게까지 붙잡아 둬서.”

“그럼 저 내일 출근 늦게 해도 돼요?”

“음······ 그건 안 돼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심을 털어놓는 나나였지만, 이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는 여명의 탓으로 그녀는 바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입꼬리를 잔뜩 누르며 섭섭한 표정을 지어도 여명은 미안한 듯 눈웃음만을 지을 뿐, 별다른 위로는 건네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희도 드릴 말씀이 있었거든요.”


중간에 낀 도진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꿋꿋하게 본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야기해야 할지······ 두 사람에게 참 어려운 부탁인 것 같기도 해서 말을 꺼내긴 어렵지만, 아직은 혼자 해결하기는 조금 벅차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선, 내가 도진 씨와 나나 씨 두 사람에게 하려는 부탁이 뭔지부터 말할게요.”


사색하는 도중에 말하는 듯이 여명은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부탁하려는 건 말이죠, 그러니까 두 사람한테 참 염치가 없기도 하지만, 제 가정 문제에 조금은 개입해주었으면 하는 게 바람이거든요. 주···화에게 부탁할까도 생각해보았어요. 그렇지만 오래 제 곁을 지켜주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같은 인간이 아니란 점에서 그 아이에게 부탁한다는 게 꼭 송구해지는 기분이랄까, 여러모로 짐을 떠넘기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거든요.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내 마음의 짐을 떠넘긴다는 건 아니에요. 단지, 정말로 우리가 같은 영혼을 나눈 것이라면, 그렇다면, 어쩌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거였어요.”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매만지던 손을 내려놓았으나 여명은 이번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말이죠. 두 사람······ 괜찮다면 나의 화해를 도와줄래요?”

“화해요? 감정을 풀고 그러는 것 말입니까?”

“맞아요.”


도진이 확인차 묻자, 여명은 입술을 다물어가며 뭉툭하게 대답했다.


“누구와의 화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도진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여명이 화해하고자 하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처음인 척 물어봐야 했다.


“저희 어머니와의 화해요.”


목적을 드디어 밝혔다고 해도 아직 말을 마칠 생각이 없는 여명은 자신이 비밀로만 부쳐두었던 사연 하나를 꺼내려고 한 번 더 큰 다짐을 해야 했다.


“어머니와의 화해요?”

“맞아요. 화해라고 하기에는 딱히 다투었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모자 사이의 거리에 생긴 가슴 아픈 응어리를 풀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화해’라고 표현했던 거예요. 정말 화해가 필요하기도 할 테고.”


부끄러운 마음에 여명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요?”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닐 것을 떠올리자 그는 곧 머리를 쓸어가며 다시 다듬었다. 옆으로 눈을 돌렸을 때, 자신에게로 오롯이 향하는 두 명분의 시선이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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