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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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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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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작성
20.09.0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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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92화

DUMMY

“많이 바빴나 봐요.”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코코아는 충분히 따뜻했다. 코코아를 식히기 위해 손을 감싸고 그 타버린 노을 같은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흥미로운 것도 그 따뜻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램프를 문지르듯 컵을 감싼 손을 가만두지 못할 때, 도진이 맞은편에 앉으며 나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 삭신이 쑤셔.”

“내일도 일손이 필요하면 말해요. 가서 도울게요.”


나나는 그 말에 신이 나서 금방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쉽게 말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왜 그래요?”

“아냐. 그냥 넌 원래대로 움직여.”

“···바쁜 거 아니었어요?”

“그건 그런데, 괜찮을 거 같아. 직원이 네 명이면 더 북적여서 복잡해질 것 같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식탁 위를 두드리던 도진이 무음의 연주를 멈추고 나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일이야 왜 없겠어. 아주 많지.”

“···그래요, 그럼.”


나나의 태도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미묘하게 더 예민해진 듯한 대답에 도진은 자신이 모르는 속정이 없는 건 아닌지 그녀에게서 긴장감을 느꼈다. 그러나 취조하듯이 이 야심한 시각에 나나를 앞에 붙잡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마 자신에게 지금까지 털어놓았던 고민과 당장 내일의 일에 느끼는 부담감의 탓으로 예상한 그는 질문을 그만두었다.


“나도진.”


혼자 있는 편이 지금의 서로에게 더 좋을 거란 판단하에 일어나려던 도진은 자신을 부르는 나나의 목소리에 몸을 의자에 다시 앉혔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돼요.”

“백면은 왜 내가 여기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걸까?”


도진이 그녀의 질문을 이해하는 사이에 먼저 한 모금 들이킨 나나였다.


“때가 되면 알려주지 않을까요?”


그녀의 손길에 허공에 뜬 컵 대신에 얼마 전부터 식탁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던 화분을 응시하며 도진이 답했다.


“뭔가 자꾸 내가 해야 할 일은 늘어나는 것만 같은데, 그걸 왜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 기분이란 말이야.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슬럼프에 빠져버린 것 같아. 그리고 그 상태로 경기가 시작되어버린 거지. 그래도 내 나름대로 이유를 대며 살아온 인생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없어져 버렸잖아. 나는 이제 이유를 발견하는 입장도 아니고, 순전히 인생의 이유를 기다려야 하는 상태가 되어버렸어. 그런데 백면은 도통 소식을 전해주지 않으니까 허탈해.”


그녀는 말을 마치며 다시 잔에 입을 갖다 댔다.


“어쩌면 백면은 그걸 바란 게 아닐까요?”


도진이 팔짱을 끼며 나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방금 스스로 뱉은 말을 까먹은 건 아니지만, 갈피를 잡지 못한 나나가 “뭘?”이라며 되묻자 도진은 그녀가 컵을 내려놓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어갔다.


“나나 씨가 허탈한 감정을 느끼도록 말이죠.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저 역시 이유를 대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어쩌면 그걸 바라고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거겠죠. 백면은 제 앞에서도 그렇게 너그럽지는 못했었거든요.”


도진이 벙그레하게 웃었다. 맞은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무엇 하나가 떠오른 나나가 여태껏 잡고 있던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부채는 계속 써봤어?”

“부채요? 아, 여전히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소용은 없었어요.”

“나머지 물건들은?”

“나나 씨가 출퇴근용으로 쓰는 거울을 제외하면 다 그대로죠.”


돌아오는 대답이 성가실 정도로 간결해서 나나는 한숨지으며 씁쓸한 기색을 드러낸다.


“성인의 물건이면 성물(聖物) 아니야? 뭐가 이렇게 안 되는 게 많은지.”

“나나 씨가 있던 세계에 있는 신(神)이란 존재도 비슷하지 않나요?”

“신? 신······ 신을 만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난 믿지 않는 편인데, 우선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알고 있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대답하고 보니 자신이 한 말의 모순을 느낀 나나가 뒤이어 이를 정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전지전능한 힘으로 모든 인간을 도와주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그랬다면 나도 좀 독실한 신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딱히 신이 정말 날 도와주고 있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아. 아까도 말했지만,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난 정해진 이유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이유를 대며 살아왔으니까.”


어쩐지 골치가 아파지는 기분이다. 나나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털어버리려 했다.


“성인도 같다고 생각해요.”

“성인? 12성인도 신과 같다고? 하지만 사람이잖아.”

“모든 인간을 도와주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인간의 곁에서 인간의 일에 개입한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요. 어쩌면 세계와 월계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같은 존재를 두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하거든요.”

“난 신을 안 믿어.”


확실히 대화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나는 숨을 돌리기 위해 투정처럼 말을 달갑지 못하게 뱉어야 했다.


“상관없어요.”

“왜?”

“그래도 성인은 있으니까.”


그의 말에 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나나에게 있어 월계라는 곳은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지만, 어쨌든 아침 하늘에 달이 뜨는 이상 성인의 존재도 믿어야만 했다. 그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의 전생이었다.


“그렇네.”


결국, 아무 반론도 내지 못하고 나나가 수긍해버리자 도진은 유달리 더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어요.”

“그래야겠다.”


잔에는 아직 코코아가 남아 있었지만, 굳이 끝까지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나나가 다시 컵의 손잡이에 손을 끼웠을 때 그것은 잔을 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잔을 놓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분을 비추고 있는 전등 스위치에 손을 뻗은 건 도진이었다. 찍은 사진에 공간을 빼앗겨버린 것처럼 찰칵 소리와 함께 부엌은 어두워졌다. 어둑하면서도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공간은 얼핏 보이게 되었다. 야음(夜陰) 속에서 나나가 도진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넌 참 이상한 애야.”

“아마 우리 모두 그럴 거예요.”

“···그건 그렇겠지.”


문득 나나는 오늘 낮에 만난 진석을 떠올렸다. 첫 만남에서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꽃을 열심히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하더니, 오늘에 와서는 사실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는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건 그의 두 다리가 가짜여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비밀을 듣는 내내 나나는 기묘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나도진. 내일 잘 부탁해.”

“저도 잘 부탁해요.”


인사를 끝으로 이들은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하루의 끝까지, 부탁이 아닌 일이 없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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