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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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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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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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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6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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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73화

DUMMY

아침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달빛은 안을 넘보지 않고 있었기에 새벽녘은 오늘만큼은 부재였던 것 같다. 방 바깥으로도 조용했다. 오늘은 무엇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날인가 보다. 달아나지 않은 잠기운에 허하게 등을 구부려 침대 위에 앉은 나나가 반쯤 감긴 눈으로 시선을 대충 몇 걸음 건너로 두었다.


“···꿈을 꾸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밤사이에 자신에게로 온 꿈 하나가 흐릿하다. 빛도 의식도 희미하여서 무엇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는 심정이다. 이 몽롱함은 불쾌하기보다는 나른하여서 자꾸만 그녀를 재우려고 한다. 목덜미를 두어 번 긁은 나나가 이불 위로 가려졌던 무릎 아래의 다리를 바깥으로 내놓았다. 옆을 보니 도진에게서 받은 노트 한 권이 그대로 있다. 그 옆으로는 이제는 무용지물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 부채가 덩그러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쉬운 밤의 끝자락에서 자꾸만 매만졌던 탓에 먼지는 쌓이지 않았다.


“쓰읍.”


마른침을 크게 삼킨 나나가 노트를 들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조금 어둑한 탓에 창문을 열려고 했기 때문이다. 몇 걸음만 걸으면 방안에 불을 켤 수 있었지만, 모처럼 종일 쉴 수 있는 날이기에 아직 자신의 기상을 바깥에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창문을 두 뼘 정도 간격으로 열어두었으나 상쾌한 공기가 충분히 들어온 것에 비교하면 빛은 충분하게 아침을 데려오지 못했다. 어쨌거나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한 나나가 다시 노트를 집어 펼쳤다. 낡은 모서리도 구태여 쓸기도 하면서.


[망가지는 건 애초에 문제가 아니었어. 망가지는 동안에 내가 끌어안아야 할 삶이 없다는 게 문제였어.]


운치가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휘갈겨 써 놓은 필기체에서는 시원시원한 고뇌가 묻어 있는 듯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읽는 것이었지만, 다시 봐도 그러하다. 마치 아이가 글씨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크고 불규칙한 정렬로 한 페이지에 가득 담긴 그 말에서는 그만큼 섬뜩한 고통의 분출이 느껴졌다. 나나는 그 종이 한 장을 정갈하게 받치듯이 다음 장으로 넘겼다.


[엄마가 미안해.]


나나가 왼손으로 자신의 볼을 짓누르듯이 쓸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자그맣고 촘촘하게 쓰인 문장 하나만 공허하게 윗줄을 장식하고 있었다. 반듯한 글씨가 더욱 작아 보였다. 곧바로 나나는 그 옆으로 눈길을 옮겼다. 그 쪽에는 첫 페이지에서 보았던 그 글씨체와 크기로 다른 문장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래도 행복하다고들 하는데, 이래도 행복하지 못한 건 불행이겠지?]


근심에 길게 몰아 내쉰 숨은 나나의 얼굴을 창가 쪽으로 향하게 했다.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맑은 숨을 갈망한 것이다. 움직이지 않던 풍경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작은 움직임만으로 그 전체를 움직이는 존재 하나가 나나의 시야도 움직여 놓았다. 나비였다.


“하얀 나비네.”


들고 있던 노트를 잠시 침대 위로 둔 나나가 깨어난 뒤 처음으로 일어서서 다가갔다. 나비는 이쪽의 기척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 주위만을 배회하며 날더니 어느덧 사라져버렸다.


“잘 가.”


나비가 있던 자리에 대고 손을 흔든 그녀는 간결한 동작만으로 자신이 있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노트 역시 까먹지 않았다. 중간에 흐름이 끊겼기에 다시 그 구절을 반복해서 읽었다. ‘이래도 행복하다고들 하는데, 이래도 행복하지 못한 건 불행이겠지?’ 그 무서웠던 여인이 한 질문이었을까. ‘이래도’라는 건 도대체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까. 행복과 불행의 구분은 쉬웠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이 문장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마 처음 읽었을 때도 당황한 마음에, 대충 그러려니 이해했다는 착각으로 다음 장으로 넘겼던 것 같다.


“이래도··· 이래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반복해서 부른 나나가 이후 다시 손바닥으로 받친 종이 한 장을 정성스레 넘겼다. 그 뒷장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담하고 말끔한 글씨가 위에 가지런하게 새겨졌다.


[그래도 행복해질 수 있어.]


그 다음으로는 ‘그래도’였다. 나나는 그 옆으로 자리한 다른 커다란 문장을 바로 읽어버렸다.


[죄책감은 책임감이 아니라 그냥 죄인가 봐.]


이 문장을 끝으로 그녀는 뒤로 자리한 페이지들은 와락와락 대충 넘기며 마지막 장을 펼쳤다.


[비록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잘 지내기를.]


작은 문장이었다. 목이 메이더니 눈가에 찔끔찔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 나나가 생기침을 토해 냈다. 그러자 목이 말라왔다. 누구도 쉽게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노트였다.

누군가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대답을 들은 비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들켜버린 비밀이기 때문이다. 아마 오른쪽을 차지한 큰 문장은 모두 여명의 것일 테고, 그 뒤의 왼쪽을 차지한 작은 문장은 모두 그 여인의 것일 테다.

초반에는 한 사람이 글을 쓰는 순간마다 기분이 달라서 그렇게 다른 글씨체로 쓴 줄로만 알았다. 왜냐하면 그 여인이 있던 방에서 갖고 온 것이니까 당연히 모두 그 여자로부터 나온 문장으로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읽을수록 이 노트는 두 사람의 것임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거칠게 새긴 문장들은 누구의 것인지, 그 뒤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찬찬한 문장들은 또 누구의 것인지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나는 노트를 부채 옆의 제자리에 두었다. 당분간은 이 자리가 노트의 제자리가 될 것이다. 입술을 맞물린 나나가 드디어 기지개를 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느낀 갈증에 밖으로 나가 물 한 잔을 마셔야겠단 생각으로 문 쪽으로 다가섰다. 방 안으로는 아까보다 밝은 빛이 흘러왔다. 그녀가 등을 보일 쯤이었다.


“어?”


문을 조심히 연 나나는 둥그렇게 뜬 눈을 몇 번이나 껌벅거렸다.


“어머, 일어났어요? 일찍 일어났네요!”


잠옷 차림의 조이가 머리를 묶으며 이쪽으로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네에.”


당혹감에 말꼬리를 늘어뜨린 나나가 그대로 후진하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바짝 들고 쳐다본 시계는 지금이 아주 이른 시간대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새벽 5시 30분이 지난 그쯤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나나가 문고리를 잡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조이는 아까 아침인사를 건네던 그 자리에 없었다.


“뭐지?”


아침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새벽녘이 먼저 왔기 때문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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