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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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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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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86,707

작성
20.08.17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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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74화

DUMMY

“나도진.”


이를 알아차렸던 처음에는 조금 억울했다. 하지만 도진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순간에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나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침도 거르려는지 외출 준비를 마친 모습으로 나타난 도진이 곧바로 현관문으로 향하는 것을 나나는 서두르지 않으며 붙잡았다.


“예?”


도둑질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도진이 등잔만 한 눈으로 나나를 당목(瞠目)했다. 시간을 서두르는 데 여념이 없었기에 그녀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탓이다. 축 늘어진 어깨를 고친 나나가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도 데려가.”


신발로 향하던 도진의 발길이 멈추었다.


“나 오늘 쉬거든.”


실로 얼마만의 대화인지 이런 이야기를 제때 통보하지 못한다는 게 나나는 조금 낯설기도 하였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어쩔 수 없이 도진과 좁혀진 거리를 인정해야만 하는 때였다.


“어디로 가는 줄 알고···”

“언제는 알려주고 데려갔어?”


자신의 말을 싹둑 자른 나나의 야심에 눌린 도진이 입을 닫아맸다. 무언의 승낙이었다.


***


동틀 무렵의 생각이 쓸데없었을 정도로 날을 화창했다. 세계의 봄을 꼭 닮은 월계의 봄은 계절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창을 사이에 두고 봄과 나나는 생이별을 체험해야만 했다. 책을 한 무더기나 되게 들고 온 도진이 책상 위로 모두 내려놓았다. 이를 날카롭게 지켜보던 나나가 마침내 책 위로 자리한 도진의 얼굴로 따가운 시선을 꽂았다. 도진은 에둘러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자리를 떠나 나무처럼 나란히 간격을 지키고 굳게 버티는 책상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이에 분에 못 이긴 나나가 그가 만들고 간 탑 가장 위에 자리한 책을 약탈하듯이 잽싸게 가져갔다. 아무려면 좋았다. 도진을 골려주고 싶은 의도에만 부합하다면 이런 치사하면서도 유치한 짓쯤이야 한 번은 쉽게 할 수 있었다.


『난연시의 도시 역사와 문화』


책의 제목을 읽은 나나는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이곳에 따라왔을 때는 난연에서의 도서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도서관의 규모에 감탄하여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한 자리에서 진득하게 시간이 따분히 흘러가는 것에 부질없이 순응해야 한다는 것은 나나에게 있어 퍽 괴로운 일이었다. 이미 겪어봤던 일이기에 더욱 곤혹스러운 일이다.

도진이 다시 책 세네 권 정도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를 보고 놀라 진저리를 치며 싫어하는 나나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져온 책 중 하나를 펼치며 독서에 몰입했다.


“혼자 조사하고 싶다고 한 게 이거였어?”


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도서관 건물 뒤로 늘어진 그늘 안에서 쉬고 있던 도진은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지루함에 조금이나마 울적해진 얼굴의 나나가 있었다.


“···아직은 계속 배우고 있는 단계예요.”


도진이 자신의 구두코를 보며 대답했다.


“책으로 찾는다고 나오는 건 맞아?”


벽에 기댄 나나는 반대로 하늘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열녀가 아직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니, 책으로 만나볼 수밖에 없······”

“그런다고 제대로 아는 사람이 쓴 책이 있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도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나가 새치기를 했다. 그의 말을 자르기로는 오늘로 두 번째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들은 이야기를 적은 거 아닐가? 그럴 바에는 그쪽 집안 사람들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잘 모른다고 해도 어쨌든 그 피를 이은 사람들이기도 하니까. 물론 그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거란 확신은 나도 아예 없지만. 너도 봤을 거 아니야. 네가 나한테 준 노트니까. 그런데 왜 그걸 다 나한테 맡기려는 거야?”


이번에는 나나 역시 도진의 구두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떠오른 백면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도진이 아까보다는 소심해진 소리로 운을 떼었다.


“저는 이해하려고 해도 못할 거예요.”

“뭐? 어째서?”

“노트를 가지고 온 날에 느꼈거든요.”

“느꼈다고? 뭘 느꼈는데?”


그는 나나의 질문과 동시에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여명 씨 가족에게 얽힌 그 사연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제게는 없다는 걸 느낀 거죠.”

“그게 무슨 소리야?”


그가 대답을 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건 나나 쪽이었다.


“언젠가 예전에 나나 씨한테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제가.”


도진이 긴 이야기를 꺼내려 회상을 시작했다.


“제가 고아라고요.”


아무 대꾸도 없이 나나는 굳은 얼굴로나마 그의 옆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명 씨의 어머니가 절 붙잡고 절규하는 모습을 보는데··· 참 슬픈데, 이해할 수는 없는 기분이었어요. 슬프기는 슬프고, 그 분의 슬픔이 제 심장에까지 와 닿는 기분이었는데 그래도 절대 그 슬픔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은 저의 한계를 느낀 거예요. 그래서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말을 마치며 도진은 앞머리를 쓸었다.


“그래서 나나 씨한테 떠넘기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고요.”


한동안 나나는 입 밖으로 말을 뱉어내지 않았다. 그녀가 답했을 때는 도진이 다시금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을 때였다.


“미안해요.”

“그런 이유라면 나도 마찬가지야.”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진, 너는 고아였고 이걸 비교하는 게 맞는 건지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도 항상 부모님이 내 곁에 있었던 거도 아니거든.”


나나는 중간에 한 번 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우리 엄마도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 아빠는 언제 떠났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내 곁을 아주 오래전에 떠났고.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너처럼 이 일에 관여할 자격도 없을 거야.”


그리고 도진의 구두코를 향해 가벼운 발길질을 하였다.


“오히려 지금 내 상태로는 고여명 씨보다 널 더 이해할 수 있을걸? 그런 이유에서 나한테 맡겨버린 거라면 너도 이쪽으로 넘어오는 게 어때? 나도 전문가는 아니니까, 서로 꿀릴 일도 없을 테고.”


나나의 말에 감명을 아로새긴 도진이었으나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겁이 나기도 하거니와, 아직은 그런 위로에 익숙해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없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나나 씨라면 괜찮을 거예요.”

“너라도 괜찮을 수 있잖아.”


도진에게 주화에게서 들은 그늘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나나는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가슴에 묻어두어야만 했다. 돌아오는 도진의 말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내가 아직은 괜찮지 않아요.”


나나가 뜻 모를 끄덕임을 반복했다.


“그래, 그럼.”


그에게는 더 짙고 더 큰 그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나가 그를 애써 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달도 애써 물러서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달은 그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한낮을 기리고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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