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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쿠

빙신전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수모쿠
작품등록일 :
2017.11.30 00:48
최근연재일 :
2018.05.24 11:05
연재수 :
61 회
조회수 :
74,840
추천수 :
815
글자수 :
310,718

작성
18.04.23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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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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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삼켜버린 말

DUMMY

아버지가 내 쪽을 돌아보며(추워서 그런 것 같다 추워서) 씨익 웃어 보인다.

─물론 사정이 여의치 않기는 했지. 계모한테는 아들이 있고, 주변에는 위험한 놈들 천지인데 주력은 내가 다 데리고 나갔으니... 더군다나 놈들은 돈으로 칼을 사서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었지.

─...

─이제야 알겠구나. 네가 나만큼이나 노력해 왔다는 걸. 네가 이렇게 현명한 녀석이었다니... 다행이다. 너를 원망했던 적이 많았는데.

─으음... 예. 그러시면... 일단 그런 걸로 해둘까요?

아침햇살을 등진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너를 믿었다. 네가 이상한 새끼들이랑 어울려 천민 계집애들을 납치해 욕보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도, 알코올중독인 것 같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죄 없는 여자와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해 망가뜨리고 있다는 말이 들려올 때도...

그런데요 아버지, 그거는 누가 모함하려고 지어낸 얘기가 아닐 수도 있는데.

─나는 항상 너를 믿었다. 너만은.

─예? 정말... 요? 그럼 어제 제 침실에 칼 들고 들어오셨던 건...

─아이 씨! 조용히 하라고! 내가 말하고 있잖아 지금? 크흠! ...성 안에는 네 적들뿐이다. 물론 충성스러운 후원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같은 신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불신을 부단하게 연습해야만 하지. 이 연습이 네 삶을 오래 지켜줄 거다.

─예? 그렇지만 방금 저한테는 저를 믿으신다고...

─...아들. 요즘 근질근질한가봐? 지금 비무원으로 갈래?

─아닙니다. 아버님. 지당하신 말씀이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사람입니다! 딸랑딸랑.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너는 지금까지 해온 대로 계속 연기를 하면 돼. 당분간은 예전처럼만 해라. 어제오늘처럼 했다간 너는 금방 위험에 처하게 될 테니까. 시기와 질투는 실로 무서운 힘을 가졌다. 나는 익히 알고 있었지. 오죽했겠냐? 왕족이 아니면서도 능력만 가지고 별을 단 사람은 나 하나다. 너도 언젠가는 나처럼 중앙 정ㄱ...

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꾹 누르고 삼킨다. 어? 무슨 말을 삼키신 거죠?

─잘 해왔어. 지금은 억울하고 분해도 멍청한 척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해온 거랑 똑같이. 답답하겠지만 그것도 이제는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하면 돼.

─예? 그럼 언제까지...?

무슨 말인지 궁금한데 아버지는 휙 등을 돌리고 관사 쪽으로 걸어간다. 그러면서 갑자기 딴소리.

─내가 왜 칼을 좋아하게 됐는지 아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본 것도 아닌데.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이렇게 쉽게 던져놓으니 당황스럽다. ...왜 칼일까? 실전에서는 창이 더 유리할 텐데?

─글쎄요? ...살상력과 휴대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아버지가 고개를 젓는다.

─너보다 몸이 큰 녀석을 맨손으로 이기긴 어렵다. 생각해 봐라. 척인성 같은 놈을 맨몸으로 어떻게 이기겠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만 정말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잖아. 그렇지만 칼이 있으면 달라지지.

─그... 런가요?

─물론 무기를 들고 싸워도 체급이 낮으면 불리한 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맨몸일 때보다는 그 격차가 덜해지는 거지. 기술과 기량이 더 많이 작용하게 되니까. 나도 어릴 적엔 지금의 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주 작고 가벼웠지. 그런데 어느 날 비무를 하던 도중, 칼을 겨루고 있을 때만큼은 체급의 차이가 희미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어. 그 뒤로 평생 칼을 잡게 된 거다.

성벽 계단을 내려가느라 아버지의 말이 잠깐 끊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지금 예비역이 된 사람들의 다리 한쪽 만했으니까. 그 조그맣고 가벼운 꼬맹이가 자기보다 두 배 이상 덩치 큰 사람들 틈에서 얼마나 노력을 했겠냐. 그건 네 상상에 맡긴다.

언뜻 생각해도 답이 나오는 일이다. 남들 눈에 예뻐 보이기 위해서, 혹은 멋있어 보이기 위해서 체중의 앞자리숫자를 바꾸는 일조차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건 인생 전체의 행로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었으니 뭐.

─그런데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는 동안,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어마어마한 높이차를 나만의 장점으로 바꿔놓을 방법이 보이더구나. ...이건 비밀인데, 칼을 머리 위로 쳐드는 내 특유의 자세는 사실 눈속임 같은 거다.

─에엑? 정말요?

─정말이지 그럼? 하하. 그러고 보면 세상일이란 게 참 재미있지. 검으로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무인인 내가 정작 그 아들에게는 기술을 전수하지 못했으니... 그렇지만 네가 진작 검술에 열을 올렸다면 저쪽에서는 너를 더 귀찮게 만들었을 테니 나쁜 일만도 아니었다.

─그래도 전혀 모르는 건... 곤란하지 않을까요?

─전쟁 끝나면 전부 다 가르쳐줄 테니까 생각 있으면 말해. 체형도 비슷하니 배워서 써먹기도 좋을 거다. 그렇지만 너는 굳이 검술 같은 걸 배울 필요가 없게 될 거야.

─그건 왜죠?

─나는 평생 동안 지쳐 쓰러지기 직전까지 칼을 휘둘러왔다. 그렇지만 이런 걸 너한테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영주가 직접 칼질을 한다는 건 아직 세력이 약하다는 증거다. 칼은 선대가 지겹게 만졌으니, 네 대부터는 칼 대신 사람을 매만지면 돼. 오래전부터 나는 그것만을 원해왔다.

사람을 매만지면 된다는 말에 갑자기 벌거벗고 있던 ㅇ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게 뭐야 이 진지한 분위기에? 아버지에게 죄책감이 느껴진다.

그런 말을 들어가면서도 속으로는 그저 여자의 몸을 떠올리고 있는 내가 답답하고 한심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간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고 태생이 미천한 자라고 해도, 남들보다 나은 재주를 가지고 있는 한은 절대 좌절할 필요가 없다. 어느 구석에서든 남들보다 낫다는 자신감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지.

지금까지 누구도 내게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다.

─너나 나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출신성분이 좋지 않아도 좀처럼 발가벗겨지지 않는다. 자신감을 옷 대신 입을 수 있거든. 그리고 난관에 직면해도 쓰러지지 않지. 자부심을 지팡이 삼아 딛고 언제든 일어설 수 있으니까.

온몸의 솜털이 모두 곤두선다. 날이 추워서일까? 아니면 아버지가 한 “너나 나 같은 부류”라는 말 때문에?

─그렇게 하나 둘 넘기고 버티다보면, 자연히 야심이라는 게 생기게 된다. 야심은 자신감 위에서만 자라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 야심이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을 바꿔나갈 수 있게 되는 거지.

야심... 어쩐지 다른 나라의 말처럼 들린다. 그런 게 나 같은 인간에게도 허락되는 걸까? 이제까지 내가 거쳐 온 모든 곳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왔다.

학교도 군대도 직장도. 내 삶이 가진 가능성과 능력을 짓밟고 억눌러 체계 내부로 침몰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라. 자부심을 갖는 것이 모든 위업의 첫걸음이다. 일이 되고 안 되고는 그 다음 문제인 거야.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순간부터 운명은 너를 돕기 시작한다. 내가 볼 때 너는 이미 그 싹을 가지고 있어. 주력병기가 아니라고는 해도 오랜 연습 없이는 불가능한 경지 아니더냐. 안타까운 것은, 몰래 숨어서 재주를 익히려니 활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겠지만...

대답을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시골 촌놈이라고 모욕하는 놈들도 있었고, 전공을 가로채는 놈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것이 다 나를 꿇어앉히려 들 때에도, 그래 심지어 아군조차 나를 믿지 않을 때에도, 나만은 나를 믿었다. 언젠가 내가 저놈들을 다 밟고 위로 올라갈 날이 올 거라고.

앞서 걷던 아버지가 다시 등을 돌려 내 쪽을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맹수 앞에 서 있는 기분.

─이제까지 내가 품어온 야심은 모두 현실이 됐다. 누구라도 성벽에 올라가기만 하면 눈으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지. 출신 좋고, 배경 그럴싸하고, 가진 게 많던 놈들 중 그 누구도! 나만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나 아닌 어떤 누가! 일개 중대를 여단급 규모로 키워낼 수 있었겠냐?

방금 아버지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옷이나 지팡이 같은 것이라고 했지만, 그 말은 틀린 것 같다.

근육과 상처를 쌓아올려 만든 벽 같은 아버지의 몸, 아버지의 자부심은 그 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창칼처럼 무시무시하다.

─네가 물려받게 될 거다. 네 것이나 마찬가지야. 풍요로운 영지와 유능한 관리자들, 그리고 명령만 떨어지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충성스러운 가병家兵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 묻겠다. 너는 이것들을 가진 것으로 충분하냐?

누구나 지나가는 말로만 큰 꿈을 가지라고 말하던 세상을 살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들은 다 빈말에 지나지 않았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작은 우리 안에 갇힌 자들에게 그런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손톱만한 위안도 주지 못한다.

어느 쪽 철창도 들이받지 못하게 찍어 눌러 놓고 약을 올렸던 것뿐이잖아.

하지만 지금 아버지는 진짜를 요구하고 있는 거다. 내 진짜 그릇을 들여다보려는 거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창 진지하던 아버지가 슬며시 웃는다.

─그럼 너도 믿고 있는 거냐? 네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될 거라고?

─...예. 물론입니다.

─맹세할 수 있냐, 내 앞에서?

─맹세합니다, 아버지.

예. 맹세합니다. 저도 언젠가는 모든 난관과 역경을 뿌리치고 위대한 사람이 될 겁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하렘Harem의 왕이 되어 아버지 말씀대로 사람을, 그렇지 아주 예쁜 사람들만 편파적으로 매만지며 살겠습니다.

손자손녀들로 구성된 축구팀과 농구팀, 그리고 미식축구팀과 야구팀을 만들겠습니다. 매일 시합을 열겠습니다.

이 소설의 장르를,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스포츠 물로 바꿔 버리겠습니다. 또한 천하의 미녀들을 모조리 다 데려다가 찐한 베드신ㅇ... 읍읍!

응? 그런데 이건 누구 손인가...?

─그럼 됐다. 그거면 충분해. 나는 지금 너한테 줄 선물을 하나 생각 중인데... 이걸 네가 얻게 된다면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렇지만 얘기했다시피 이번에 장담을 할 수는 없는 성격의 일이니 답답한 일이지. 하지만 어제와 오늘 네가 보여준 모습에 나도 믿음이 생겼다. 확신을 가지고 일을 밀어붙일 수 있게 됐어. 기대해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런데 그게 어떤 선물인지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시면 제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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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발걸음 +4 18.04.12 565 6 11쪽
50 리얼타임 +4 18.04.10 735 7 11쪽
49 대면 +9 18.04.08 684 5 11쪽
48 목숨 +4 18.04.05 1,099 8 11쪽
47 교착 +6 18.04.03 685 7 11쪽
46 움직이는 인형 +4 18.04.01 945 10 11쪽
45 밤의 천사 +10 18.03.30 708 6 11쪽
44 꼬시다 +1 18.03.28 724 10 11쪽
43 악녀 +8 18.03.26 749 6 11쪽
42 아버지 +2 18.03.24 688 8 12쪽
41 꽃보다 화살 +10 18.03.22 801 10 11쪽
40 아첨 시작 +16 18.03.20 1,055 11 12쪽
39 바람이 분다 +5 18.03.18 723 14 11쪽
38 창 던지기 +8 18.03.16 790 8 11쪽
37 비무가 끝난 오후 +9 18.03.14 777 6 11쪽
36 접힌 투구 +6 18.03.12 874 13 11쪽
35 화염의 매 +10 18.03.10 1,176 10 11쪽
34 골육상쟁 +10 18.03.08 812 12 11쪽
33 아구창 +10 18.03.06 830 10 11쪽
32 판정 +13 18.03.04 811 12 11쪽
31 결전 +4 18.03.03 781 7 11쪽
30 엔터테이너 +7 18.03.01 1,013 10 11쪽
29 비무원 +6 18.01.30 933 15 11쪽
28 아부의 신 +4 18.01.28 910 11 11쪽
27 영웅의 귀향 +6 18.01.26 953 15 11쪽
26 자리다툼 18.01.26 865 13 11쪽
25 예복 +7 18.01.24 975 1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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