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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쿠

빙신전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수모쿠
작품등록일 :
2017.11.30 00:48
최근연재일 :
2018.05.24 11:05
연재수 :
61 회
조회수 :
74,948
추천수 :
815
글자수 :
310,718

작성
18.04.14 21:24
조회
557
추천
7
글자
11쪽

그럴래

DUMMY

─...예?

─...흐어, 디다 숨겼어?

혀가 잔뜩 꼬여 있다.

─무, 무, 뭐를 숨겨요, 제가? 아니, 저는 아무것도...

─...거짓말을 해? 죽고 싶냐 진짜? 다 알아보고 왔는데 이 새끼가...

왜 내 턴은 맨날 잘리는 걸까.

내 말을 잘라먹더니 비틀거린다. 무심결에 아버지를 부축하러 한 걸음 다가서는데 바로 코앞에 검광이 흩뿌려진다.

쐐액!

─으아아악! 왜 이래요?!

목이 잘릴 뻔했잖아요! 아니, 그나저나 이렇게 잔뜩 취한 인간이 어떻게 이런 속도를 낼 수 있는 거지? 술에 취해 그냥 내저은 것 같기는 하지만, 가만 생각하니 이건 진짜 위험한 상황이다.

차라리 자객이 문을 차고 들어온 게 낫지. 그랬으면 그놈이 화살 맞고 뒹굴고 있든지, 아니면 내가 칼 맞고 죽어 자빠져 있든지 둘 중의 하나다. 50 대 50이란 얘기다.

그런데 칼 든 아버지에게는 화살을 쏠 수가 없다. 나만 죽어나는 상황인 거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술에 만땅 취해 거의 이성이 마비된 고려 최강의 검사가 지금 내 앞에 장검을 꼬나들고 비실거리며 서 있는 건데... 와, 이거 진짜 환장하겠네.

─저기... 아버지? 아니 저... 아버님. 일단 고정하시고 말로 하시죠...?

전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긴 하지만 일단 살과 봐야지.

이거 뭐지? 아까는 뭐였냐고? 연회장에서는 맨정신인 것 같았는데. 계모 옆에서는 할 말 다했잖아. 취한 척한 게 아니었어? 뒤늦게 술이 올라온 건가? 아니면 그 뒤로 2차를 한 거야 뭐야? 아 짜증나. 못살겠다 진짜.

칼을 든 아버지가 드넓은 침실을 휘젓고 다닌다. 뭔가를 찾는 듯한 움직임.

─너는! 이 새끼야, 끅? 내가 휴가 나온 날까지 계집질이냐? 어?!

히익! 어떻게 안 거지? 혹시 방 안에 CCTV라도 달려 있는 건가?

아니야. 그렇다고 보기에는 반응이 너무 느렸어. CCTV를 보고 온 거라면, 빼도 박도 못하게 현장을 덮치지 이렇게 한 박자 늦게 와서 방을 뒤지고 있을 리 없다.

뭘까? 어떻게 알고? 일단 증거를 가진 게 없다는 데 모든 것을 걸어야겠다.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없어. 결백한 표정을 짓자.

─제가요? 저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혹시 뭘 잘못 알고 오신 게 아닐까요...?

침대 시트를 샅샅이 손으로 훑어본 아버지가 옷장 속으로까지 들어간다. 차라리 이 틈에 도망치는 게 어떨까.

그럼 달리다 등짝에 칼을 맞겠지?

그나마 그 망할 검은 상자를 침대 밑에 숨겨둔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그걸 봤다면 정말 나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어쩌면 내일 아침 공개처형을 당했을지도.

옷장에서 나온 아버지가 거실로 걸어 나간다. 거실, 부엌, 복도, 화장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다시 침실로 돌아올 거라는 걸.

─흐어디다 숨겼써어?!

─오해하신 거예요! 저는 잠도 잘 안 오고, 배도 고파지고 해서 그저 야식을 먹은 것뿐이라고요. 아니 야식 좀 먹은 게 죽을죈가요?

ㅇ이 먹고 간 야식의 흔적을 손으로 가리킨다. 아까는 먹기만 하고 치우지 않은 게 좀 불만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땡큐 베리 감사.

─끄응...

아버지로서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으니까. 아버지가 숨을 고른다.

─...아, 그러니?

이렇게 빠른 태세전환이라니.

뭐가 이런 식이야? 미안하다고 말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했지만 반응 참... 와 나 진짜.

─그래, 사실은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처음부터 너를 믿었어 인마! 알지? 남들이 아무리 뭐라 그래도 나는 끝까지 네 편이라는 거.

나는 대답 없이 아직도 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는 칼을 바라본다. 내 시선을 느낀 아버지가 움찔, 하더니 머리를 긁적인다. 칼은 내려놓고 말씀을 하셔야지. 아들 두 번만 믿었다간 살인도 하시겠네요.

아버지가 겸연쩍게 웃어가며 칼집에 칼을 꽂아 넣는다. 그러고 보니 옷차림 참... 잠옷 바지에 칼집과 허리띠만 두르고 뛰쳐나온 모양이 참 우습다.

─그런 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네가 몸이 좀 약해서 내가 걱정을 많이 했었지. 밥을 잘 먹게 됐다니 잘 됐구나. 많이 먹어야 체력도 좋아지는 거야. 그러고 보니까 너 지난번보다 몸이 좀 좋아진 것 같은데?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눈으로는 계속 침실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다.

참으로 눈물겨운 부정父情이군요. 부정否定적인 방향으로다가.

그나저나 “남들이 아무리 뭐라 그래도 나는 끝까지 네 편이다”는 또 뭐래?

다시 생각해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간다. 분명히 아버지한테 가서 내 얘기를 한 사람이 있는 거다. 어떤 새가 가서 노래를 불러준 거겠지. 밤 말을 잘 듣는 새. 아이 씨! 도대체 어떤 새끼가?

뒤늦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온다. 어렵게 참아낸 보람이 있었던 거다. 작가를 욕할 일이 아니었던 거야. 만일 그때 정신을 못 차리고 ㅇ을 어떻게 하고 있었다면... 나는 여기서 개망신을 당했을 거고, 그 애도 고초를 겪었을 공산이 크다.

그게 다가 아니지. 어쩌면 성난 아버지 칼에... 으으.

─그래, 그럼 나는 가서 잘 테니까, 너도 푹 쉬어라.

하, 참! 겁나서 퍽이나 푹 쉬겠네. 기저귀 차고 자야 될 것 같거든요?

내게 등을 돌리고 침실을 빠져나가는 아버지의 움직임이 영 성마르고 어설퍼 보인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하지만,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항의는 접어두자. 일단 검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들키지 않은 것만 해도...

─어억!

갑자기 아버지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른다. 응? 뭐지?

쿠당!

침실 양탄자 바닥으로 추락한다. “나홀로 집에”에서 나온 도둑들처럼 나자빠진 거다. 만일 아까 승혜가 그 자리에서 똑같이 넘어지지 않았었다면, 나는 방금 투명한 적이 아버지를 습격한 줄 알았을 거다.

그러나 나는 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다가 바닥에 놓인 ‘그것’을 밟았다는 것을.

아아, 이놈의 몽둥이가 또! 주워서 상자 안에 넣는다는 걸 깜빡.

양탄자 바닥이고 칼이 칼집에 들어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천만다행이다.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지만

─우으으으윽...!

아버지는 쉽게 일어서지 못하고 누운 채로 신음하며 버둥거린다.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달리 할 말이 없으니 뭐. 일단 팔을 붙들고 부축해 아버지를 일으켜 세운다. 어엇! 두껍고 무거운 몸이라 다리가 휘청한다.

어휴, 하마터면 딸려 내려갈 뻔했네. 이거 근육 무게가 만만치 않군.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나니 아버지는 마치 몇 번이고 전력질주를 한 사람처럼 손을 무릎에 짚고 몸을 구부린다. 설마, 다친 건가?

─아버지?

아버지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 힘겹게 내 손을 밀쳐낸다. 아무 말이 없지만 나는 안다. 쏟을 거라는 걸.

추락 시의 충격이 위장을 뒤흔들어놓은 것 같다.

안 돼! 이건 아니야! 안 돼! 제바알! 양탄자에 토하지 마아!!!

─꾸어어어억!

처더더덕!

나이스 캐치. 나는 천재인 것 같다. 찰나의 순간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이불을 홱 끌어다 낙하예상지점에 깔 생각을 다 해내다니. 다행이다. 이불을 희생해 양탄자를 지켜 낸 거다.

─우어어억!

2차 폭격이 가해진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불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나저나 웃기는 상황이다. 이게 뭐예요? 연회장에서는 근엄하게 “술은 다 진심으로 마시는 거”라더니 이제 와선 아들 방에다 다 쏟아놓고 말이야.

어이없지만 그저 등을 두드려주는 수밖에 없다. 등이 너무 두껍고 넓어서 콘크리트 벽을 두드리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철이 들고 나서부터는 토하는 아버지의 등을 두드려준 적이 없었는데.

어린 시절, 변기에 얼굴을 파묻은 아버지 뒤에 서서 등을 두드리는 일은 어쩐지 내게 기꺼웠다. 물론 접대와 다음 접대와 그 다음의 접대 틈바구니에서 하루도 멀쩡할 날이 없던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보는 일이 즐거웠을 리 만무하다.

어린 내가 아무리 세게 두드려도 꿈쩍 않을 것 같던 아버지의 등이 좋았다.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전쟁 같은 직장이 몸속에 구겨넣은 신산함을 낱낱이 꺼내 확인해야하는 아버지의 심사 같은 걸 그때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죽고 죽이는 전쟁조차 손상시키지 못한 영웅의 등이다. 내가 아무리 주먹으로 두드려도 영영 무너져 내리지 않을성싶은, 탄탄하고 강한 등인 거다. 등을 한 번씩 두드릴 때마다 나는 한 뼘씩 작아진다. 이러다가는 다시 아이가 될 것 같은데?

살아 돌아온 아버지가 기뻐할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시간이다. 진정기미가 보여서 얼른 이불(과 토사물)을 싸 들고 화장실로 달려간다. 일단 변기에 토사물을 쏟고, 급히 이불 홑청을 벗긴다.

방수가 되는 홑청이었는지 내 대처가 빨라서 그랬는지 다행히 이불 속은 멀쩡하다. 속을 빼서 욕실 문밖으로 던져 놓고, 이걸 어떻게 세탁해야 할지 조금 고민을 해본다. 아무래도 토사물이 묻은 홑청을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욕조에 홑청을 넣고 물을 받아 손빨래 준비를 한다.

물이 받아지는 동안, 수건 한 장을 뜨거운 물에 적셔 들고 나온다. 아버지는 침대 위에 앉아있다. 그런데 그게 어젯밤 승혜가 앉아있던 자리라 조금 찔린다.

그러고 보니 은근히 둘의 동선이 겹친다. 같은 침대 같은 자리에 앉고, 똑같은 것을 밟고 넘어지고, 똑같이 나를 엿 먹이고 계시지.

아버지가 말없이 내 손에서 물수건을 받아든다. 멋쩍어한다.

─...야. 그... 그거 어떻게 할 거냐?

저런. 말까지 더듬으시다니 위신이 땅에 떨어지셨군요 영주님.

─얼른 빨아서 널어야죠 뭐. 금방 될 거예요.

생색내려고 그런 건 아닌데 대답에 하품이 섞여 나온다. 아, 졸려.

─...그거 그냥... 시종들 불러서 시키면 되잖아.

─지금 이 시간에 누굴 불러요, 다 자고 있는데?

인터폰을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그런다고 하면 칼을 맞을지도 모르니 이렇게만 말해두자.

─끄응...

응? 왜 이러지? 아버지가 내 눈치를 본다. 뭔가 말은 못하겠는데 심히 걱정되는 것이 있는 듯...

아하. 알겠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이건 제가 토한 걸로 할게요.

분명히 영주가 술 먹고 토했다는 소문이 날까봐 걱정하고 있는 거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닌데... 그럴래?

비로소 안도하고 반색한다. 허허, 참...

─그리고 그건 누가 이걸 봤을 때 얘기고요, 얼른 빨아서 널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 그렇지.

─무슨 술을 그렇게 드세요? 연회 끝나고 또 드셨어요? 여기서 좀 쉬고 계세요. 저는 빨래해가지고 나올 테니까.

─그, 그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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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래 +8 18.04.14 558 7 11쪽
51 발걸음 +4 18.04.12 567 6 11쪽
50 리얼타임 +4 18.04.10 736 7 11쪽
49 대면 +9 18.04.08 686 5 11쪽
48 목숨 +4 18.04.05 1,101 8 11쪽
47 교착 +6 18.04.03 686 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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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꼬시다 +1 18.03.28 725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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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아첨 시작 +16 18.03.20 1,057 11 12쪽
39 바람이 분다 +5 18.03.18 724 14 11쪽
38 창 던지기 +8 18.03.16 792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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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접힌 투구 +6 18.03.12 875 1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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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아구창 +10 18.03.06 831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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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아부의 신 +4 18.01.28 914 11 11쪽
27 영웅의 귀향 +6 18.01.26 955 15 11쪽
26 자리다툼 18.01.26 867 1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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