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장내에 정적이 촘촘히 자리 잡는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참 어색하고 떨떠름한 순간이다.
눈치를 살펴가며 자리에 앉으니 구석진 곳에서부터 박수치는 손이 하나 둘 생긴다. 손은 점점 늘어나서 결국에는 장내가 박수 소리로 꽉 찬다.
응? 이건 뭐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빛으로 찔러 죽일 것처럼 나를 노려보던 아버지의 표정이 백팔십도 바뀌어 있다.
─잘 생각했다. 그래도 끝까지 자리는 지켜야 된다? 오늘이 마지막인 거야, 알았어?
어? 뭐지? 무슨 상황이지?
...잠깐만. 일부러 험하게 인상 써가면서 나를 떠본 거였나? 우와, 진짜 너무하네...
박수를 치던 영기 옹이 갑자기 냉면이 담긴 대접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는 대접에 담겨있던 면과 국물을 물 마시듯 홀랑 마셔 버린다. 이건 또 무슨 상황입니까.
─크으, 시원하다! 영주님! 언짢아하실 거 뭐 있습니까? 여기에다가 꽉 채워서 한 잔만 하게 하시면 되지요. 흐하하하하핫!
─그거 재미있겠네! 야 여기! 제일 센 술로 한 번 가져와봐!
아부의 신이 다시 1승을 추가한다. 주변에서 시샘어린 눈길들이 쏟아지는데 정작 영기 옹은 태연자약하다. 오오, 이 아첨꾼들...
그 독한 술이라는 게 순식간에 대령된다. 아버지가 냉면그릇에 무턱대고 술을 붓는다. 대접이 워낙 크다 보니 두 병을 넘어 거의 세 병 가까이 들어간다?
─자, 일어나! 한 잔만 하실 거라며? 이거 마시면 되겠네.
─아니, 이걸 다요? 진심이신가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술은 다 진심으로 먹는 거야, 쏟기 전까지는.
일단 그릇을 들기는 하는데 독하다. 냄새만 맡아도 진저리쳐지는데? 혹시 공업용 알콜 떠온 거 아니야, 이거? 아... 홱 도네 진짜.
혹시 나를 암살하려는 특정세력이 이걸 준비한 건 아닐까...?
─야. 원샷 못하면 각오해라. 곧바로 나랑 비무원으로 간다.
어, 어떻게든 마셔야 해! 눈을 질끈 감고 그릇에 입을 가져간다.
꿀꺽, 꿀꺽, 꿀꺽...!
한 모금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환호성 볼륨이 올라간다.
─크아아악! 커헉!
식도만 따로 떼어 숯불에 구운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다 비우기는 했네. 빈 그릇을 머리 위에서 뒤집어 보인다.
아버지가 몸을 꺾어 가며 웃는다.
─크하하하핫! 정말 다 마셨어! 미쳤냐? 먹으란다고 그걸 다 먹어?
예? 뭐가 어쩌고 어째요? 아 나 여기 분위기 정말 적응 안 되네.
내일 아침 숙취 때문에 죽어나겠군. 그래도 분위기는 확실히 좋아진 것 같다. 연회장이 다시 시끌시끌해지면서 알딸딸하게 끓어오른다.
─아들. 뭐 갖고 싶은 거 있냐?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가 보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들이라는 말 때문인지 순간 긴장이 확 풀린다.
─저는 이미 가질 수 있는 걸 다 가진 것 같습니다. 더 필요한 물건 같은 건, 없어요옹.
벌써 혀가 꼬이네. 아버지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치켜뜨더니 희미하게 웃는다.
─그러냐. 알았다. ...그래도 소원 같은 건 있겠지?
─소원이야 뭐... 빨리 전쟁이 끝나서 다들 무사히 돌아오시는 것 말고는...
그런데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아무런 이유 없이 승혜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어? 왜 이러지? 승혜가 떠오르자 이상하게 말끝이 힘없이 풀려버린다. 그러자 아버지가 피식 웃는다.
─생각나는 거 있으면 말해. 오늘은 아무거나 다 들어줄 테니까.
이거... 눈치가 빠르시네?
그렇지만 나도 눈치가 빠른 편이라 역시 망설이게 된다. 아까 내가 승혜에게 화살을 건넸을 때 아버지가 보인 태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피를 나눈 형제나 마찬가지라는 말, 간단한 것 같지만 그것만큼 복잡한 관계가 또 없으니까.
어째서 아버지는 모든 일을 얼버무리고 틀어막으려는 듯한 행동을 했던 걸까? 혹시 연구소장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면 장차 군수산업에 뛰어들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봐서?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반대가 돼야 맞는 거 아닌가? 혈연을 통해 관계를 강화하는 쪽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아,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걸 시켜먹으려고 잔머리를 그렇게 굴려?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말하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감추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저도 이번에 아버님을 따라서 출정하고 싶습니다. 아직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조금이라도 좋으니 군 경험을 쌓으면서...
전혀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이건 나에게도 놀라운 일이다.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상한 말을 둘러대고 나니까 그제야 알 것 같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말도 안 돼.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여자를? 너 이렇게 쉬운 남자였어?
아버지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이번에도 장난일까? 어허? 장난이 아닌 것 같다.
─개념 없는 소리 하지 마. 새끼야.
술기운이 확 달아난다.
꿀꺽, 내 목이 침을 넘기는 소리가 내게까지 들린다.
─거기가 뭐하는 덴지 네가 알아? 알면서 개소리 지껄이는 거냐? 너한테 그 짓을 안 시키려고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왔는지! 네가 알기나 해? 안전한 후방에서 팔자 좋게 늘어져 있더니 이제는 뇌까지 다 썩어버린 거냐?
뭐라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시끌벅적한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나 혼자만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냥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할 걸 그랬지. 그럼 욕을 덜 처먹었을 텐데.
그때 갑자기 영기 옹이 술잔을 쥐고 자리를 박차고 우뚝 선다. 고함을 지른다.
─하하하하핫! 풍악을 울려라!
둠칫, 둠칫, 둠칫, 둠칫!
뭐야 이건? 누가 봐도 국악이 나올 분위기인데 80년대 디스코음악 같은 게 흘러나온다. 분위기 ㅈ같았는데 정말 다행이다.
─부처핸섬! 부처핸섬! 오우 예!
영기 옹에 이어 손가락으로 데빌혼Devil Horn을 만든 대대장도 일어난다. 질세라 소리를 지른다.
─록큰롤! 꺄오오!
아, 안 돼! 제발 그러지마!
암만 생각해도 이건 관광버스 분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척인성은 물론 연구소장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요상하게 흔들기 시작한다. 오오, 이 아첨꾼들...
영기 옹이 보일락 말락하게 윙크를 한다.
음? 설마. 이쪽 분위기를 다 지켜보고 저 추한 짓거리를 시작한 거야? 어떻게 하면 저 수준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하다...
영기 옹이 아버지를 보고 댄스에 동참해달라는 손짓을 보낸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웃음이 터진 아버지가 조금 누그러진다. 고마워요, 영기 옹. 또 신세지게 되네요.
승혜는 안 보인다. 쉬러 들어간 모양이다. 그런데 자리에 없는 승혜가 자꾸만 눈에 들어와서 나는 당혹스럽다. 승혜를, 아니 정확하게는 어젯밤 침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뭐랄까,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게 된다.
투명하던 마음의 물에 붉은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마음 한복판이 붉게 물들며 찰랑거리는 거다. 내 몸에 스스로 불을 붙여 버리고 싶은 기분.
...잠깐만. 이건 그냥 욕망일 뿐이잖아. 누군가를 진지하게 마음에 두고 있는 게 아니라 하룻밤 상대를 찾고 있는 거 아니야?
신중해야 하는 성격의 일이 아니던가. 평소에도 그랬지만 이런 알 수 없는 곳에서는 더욱 그렇지. 여기서 멋대로 일 저질러 놨더니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갑자기 원래 세계로 원복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려고?
지금은 일단 접자. 압축해야 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을 반으로 접고 또 접어 애써 의미를 축소시켜 본다.
물론 잘 되지 않는다. 승혜는, 설령 그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고 해도 한번쯤은 몸을 밀어 넣어 보고 싶은 물이다. 하지만 그 아버지인 연구소장을 보고 있으면 그런 의욕이 싹 사라져 버린다. 신기한 한편 다행스럽기도 하다.
─넌 여기 있어야 돼. 아직 혼인도 안 한 놈 데려다가 귀신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저는 그저...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에...
─현대 전장에서 활은 이미 밀려난 지 오래다. 활 재주라는 건 유물에 불과하지. 물론 너라면, 옛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새의 눈알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만, 그거 가지고는 어림없다. 살아남기 어려울 거야. 거기는 정말이지... 지옥 같은 곳이니까.
─...
아버지는 말없이 들고 있던 술잔을 비운다. 나는 조금 주저하다가 그 잔을 채운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이해가 잘 안 되지? 손바닥만 한 산간영지에서 태어나서 이제는 왕족에게만 허락되는 자리에까지 오른 인간이 말이야. 맞아, 전쟁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을 거다. 그저 흙과 작은 담벼락뿐인 이 촌구석에 주저앉아, 평생 너를 두들겨 패면서 지냈겠지.
나로서는 움찔할 수밖에 없는 얘기다. 워 워. 릴렉스하세요, 아버지.
─그러나 전쟁이 반갑고 기뻤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다시 잔을 채운다. 천천히 좀 드세요.
─이곳이 싫었어. 시골영지를 벗어나 어떻게든 멀리 도망쳐보려고 평생 발버둥쳐왔지. 그렇지만 북으로, 또 북으로 치고 올라가도 고향을 잊어버릴 수가 없더구나. 그토록 기억에서 지워 없애버리고 싶던 작은 영지가, 난공불락의 성처럼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는 거야. 나를 전쟁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종종 허탈해질 때가 있다. 알고 보면 나는 이 작은 땅조차도 제대로 무너뜨리지 못했던 거야. 봐라, 지금도 여기 이 지겹도록 똑같기만 한 곳에 퍼져서 술이나 빨고 있지 않느냐.
잔을 너무 빨리 비우시네. 안주라도 좀 드시면서...
─쉰을 넘기면서부터는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지. 전쟁이고 뭐고 다 모르는 척 고향에서 생애를 보냈다면 어땠을까... 전쟁이란 건 살아있는 재해다. 끝없이 사람을 집어삼키며 제 몸집을 키우는 괴물이지. 처음에는 만만해 보였지. 나 역시 처음 승전했던 날, 전쟁은 삼 년 안에 끝날 줄 알았다. 하하하.
맑은 술을 들이켰는데 흘러나오는 웃음은 맑지 않다. 술병이 비어 병을 바꾼다. 아버지의 눈도 텅 비어간다. 이제는 멀리 지나가버린 젊은 시절의 한 조각을 바라보고 있기라도 한 걸까.
─내가 뛰어들면 판이 달라질 거라고 확신했다. 금방 다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러나 전쟁은 어느덧 10년으로 훌쩍 키를 늘이더구나. 물론 휴전과 정전을 했던 기간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나 빨리 지나갔지.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가 다 세어있었다. 괴물한테 먹이로 내줘버린 거지, 인생 가장 소중한 시간을 말이야.
─주제 넘는 소리입니다만, 당분간은 좀...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흐하하하. 휴식? 그런 말랑말랑한 소리를 해대니까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욕을 먹는 거야. 이대로 내가 여기 틀어박혀 버리면, 북녘 땅에서 죽어넘어진 부하들이 가만히 있겠냐? 진흙탕에 빠졌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돈 나오는 곳을 찾아 혼인을 했던 거고. 아마 너였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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