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단 승격
아우, 깜짝이야. 얘 또 왜 이래?
─제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감히 영주님의 업적을 폄하하다니...
아, 난 또 뭐라고.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그것도 좀 그러네? 우리 아빠라며? 얘는 머리는 좋은데 입이 좀 문제인 것 같다. 나중에 주의 정도 주면 되겠지.
─아니, 없을 때야 뭐, 임금님 욕도 하는 거지, 안 그래? 그건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승혜는 안도하는 듯하면서도, 아예 마음이 놓이지는 않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내 눈치를 살핀다.
쌍꺼풀 없이 옆으로 긴 눈이 전에 없이 귀엽게 느껴진다. 그 불안한 안도를 지켜보고 있으려니 왠지 골탕을 먹이고 싶어진다.
아, 나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아.
─잠깐만, 승혜 씨.
─네?
─기록관이라는 건, 정확히 뭐하는 사람들인 거지?
─음... 성 안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기록? 그냥 기록만 하면 되는 거야?
─네. 엄정하고 객관적인 서술을 하는 게 저희 업무예요.
그거 어쩐지 조선의 사관을 모방해서 만든 것 같은데?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 좋아하지는 않을 듯.
─그렇구나. 가감 없이 기록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저 기록만 하면 된다는 사람이 굳이 조선 측에서 발간한 자료까지 싹 다 찾아서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있나?
안도가 싹 걷힌다. 다시 불안해한다. 으하하핫.
─아까 내가 듣기로는 조선 글자로 된 책만 가지고 있어도 고려보안법인가 하는 걸로 처벌받는다고 하던데?
─어, 그... 어디까지나 저는 하, 학술 목적으로...
역시 아직 어려. 얼굴에 나와 있다. 처벌받는 거 맞구나? 당황하는 표정이 너무 재미있다.
─그래요? 그런데 그게 우리 규정에는 어떻게 돼 있을까아?
그런데 갑자기 승혜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 이거 아닌데. 뭐야 이거?
혹시 고려보안법인가 뭔가 하는 그거, 어마어마한 중죄로 사람 조지는 법이었던 건가? 나 너무 많이 간 거 아니야?
털썩!
일부러 소리를 내려는 사람처럼 무릎을 꿇는다. 나는 도대체 왜,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 무릎 연골을 망가뜨리는 걸까.
강당 바닥이니 아까 편의점 돌바닥보다야 낫겠지만, 바람만 불어도 휘청거리게 생겨먹은 애가 아닌가. 그런 애를 이렇게 만들다니. 아, 나는 진짜 쓰레기인가 봐.
그냥 장난 한번 쳐보려던 건데. 미안해서 진땀이 날 지경이다.
─도련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어여! 살려주세요! 흐잉...
─아니, 아니야! 나는 그게... 그 뭐냐, 승혜 씨가 공부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장난친 거야. 내가 공부를 좀 많이 배우고 싶고 그래 가지고...
되는 대로 지껄이고 있는데 울던 승혜가 고개를 든다.
─...징짜여? 흑.
눈물보다 콧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웃으면 안 돼! 안 된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다. 눈물이야 짜낼 수 있는 거겠지만 콧물은 어떻게 못하는 거니까, 지금 이건 장난치는 게 아닌 것 같다.
─아니 나는, 이따가 일과시간 끝나고 혹시 시간 되면, 나 공부 좀 도와달라고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오늘 승혜 씨 덕분에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듣기는 했는데, 사실 공부라고 할 만한 건 하나도 안 했잖아? 그렇지?
고개만 끄덕끄덕. 진정 기미가 보인다.
─그리고 또, 기록관이니까 여기에 대해서 잘 알 거 아니야? 평소에 일이 안 바쁘면 나 이곳저곳 안내 좀 해주고 그래. 자, 그렇게 퉁 칩시다. 나 아무 말도 안할게. 금지서적 가지고 있는 거 아무한테도 안 이를게.
훌쩍! 저 코를 다 들이마시는군. 아이 씨... 자꾸만 웃음이...
─...원래 기록관이... 훌쩍, 하는 일이 밀착마크이긴 한데... 흑.
그거 들이마시지 말고 어디다 좀 풀지 그래? 더럽단 말이야...
─도련님이 오래 전에... 쿨쩍, 한 번만 더 와서 훼방 놓으면 죽일 거라고 막... 흑, 뺨 때리고 얼굴에 침 뱉으신 적도.. 훌쩍, 있었는데요...?
아오, 도련님 이 새끼 진짜! 도대체 착한 일 한 가지를 해놓은 게 없네. 멘탈이 어떻게 돼먹은 놈이야?
─아, 그거 정말 미안하게 됐어. 설마 그때 내가 본심으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장난 좀 쳐본 거야.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가 보려고... 아니, 내가 그렇게 쌍스러운 사람이야? 정말 그래?
고개만 도리도리 젓는다. 근데 콧물... 아 진짜 못해먹겠네. 그 모습 보니 완전 애 같다.
─그른데요... 쿨쩍! 기록을 단 한 줄이라도 남겼다간... 흑, 일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도 하셨어요...
하이고... 잘하는 짓이다.
─그때는 내가 술에 많이 취해서 그랬던 걸 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 다 거짓말이었어.
─줌말요? 쿨쩍.
진정한 것 같으니 화제를 좀 돌려야겠어.
─자, 그러지 말고 얼른 일어나. 장난이었어. 배 안 고파? 근오야, 배고프지 않냐? 우리 밥 먹으러 갈래?
근오는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도련님이 점심시간에 안 가셨으니까 아마 우리 찾아다니고 있을 거예요. 여기로 갖다 주겠죠, 뭐. 저도 그때 먹으려고요.
,,,새끼. 너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그런데
─...미리 연락도 안 했는데 알아서 점심 갖다 주려고 나를 찾아다닌다는 거야?
그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건데. 역시 반항아야. 차려주는 밥도 제때 안 처먹는군.
쿠당탕!
아이, 깜짝이야! 저 놈의 문짝을 어떻게든 해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내 고막이 떨어질 거야.
석구 옹이다.
─어? 도련님, 여기서 뭐하세요?
─예? 그.. 뭐시냐... 공부하고 있었죠.
─극장에 안 가셨어요?
─예. 아마도?
─형! 괴현이 형! 도련님 극장에 안 가셨었다는데?
뒤이어 대대장과 영기 옹, 지팡이노인 등의 예비역들이 안으로 들어온다. 아까와 같은 인원이다.
훌쩍! 눈이 잔뜩 붉어진 대대장이 코를 들이마신다. 뭐야, 이 양반도 울고 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석구 옹을 제외한 예비역들 얼굴이 다 이상하다. 혹시 전부 어디 가서 눈물 치료 같은 거 받다가 온 건가, 이 양반들?
대대장은 석구 옹 말을 듣지도 못한 것 같다.
─으아, 드디어 장군기 받으시는구나...
옆에 서 있던 영기 옹이 받는다.
─그래. 오래 사니까 이런 날도 오는구나. 그러면 우리 소속도 이제 여단이 되는 건가?
─그렇지. 훌쩍!
지팡이노인이 질문한다.
─근데 병력은 어디서 대요? 지금 지휘하시는 연대병력도 사실 가라로 부풀린 거였잖아요.
─야이 씨, 너 아까 방송할 때 뭐 들었어? 이번에 전사한 연대장 둘이 우리 영주님을 후견인으로 지목해가지고, 그 병력까지 영주님이 지휘하시는 거라고 했잖아.
─죄송해요, 형. 갑자기 눈물이 나와서 못 들었어요.
─새끼... 그 심정 나도 안다. 훌쩍!
대대장의 그 말에 영기 옹도 웃으며 눈물을 찍어낸다. 이 양반들 참... 그렇게 안 봤는데 감수성들이 참 풍부하시네?
─난 분은 난 분이지. 선대 시절에 이 땅에 뭐가 있기나 했나? 다 쓰러져가는 고대 성곽 하나밖에 없었잖아. 그때 전쟁 뛰러 가면, 산간영지 촌놈들 소리 어지간히 들었었는데... ㅈ만 한 새끼들이 씹할...
대대장도 옛 추억을 더듬고 있는 것 같다.
─아, 그 두어 대 쥐어박으면 다음날 아침까지 쓰러져 자던 새끼들? 그 병신들 요즘 어디서 뭐하려나? 그러고 보면 우리가 줄을 잘 선 거야, 안 그래? 군대 별 거 있나? 줄 잘 서면 장땡이지 뭐.
─야, 영주님 어릴 때 기억 나냐? 나중에 어른 되면 장군 돼서 별 다섯 개 달 거라고 그러실 때, 선대영주님이 혼내셨었잖아. 꿈같은 소리한다고.
─사실... 나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 아니, 다들 그렇게 생각했었잖아. 왕족도 아닌데 무슨 수로 별을 달겠냐고.
─그때는 꿈같은 소리였지.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까 도리어 그 시절이 꿈같다. 그때 우리 병력이라고 해봐야 뭐, 1개 중대나 됐나?
─그렇지. 그런데 어린 애를 잡아다가 그렇게 닦아세웠는데도, 텔레비전에서 그놈의 광고만 나오면 막 “별이 다섯 개!” 이러면서 뛰어다니셔가지고 내가 진짜...
─하하하하. 맞아, 그게 돌갑옷 CF였던가 그랬지 아마? 나도 기억나. 근데 너 그때 진짜 ㅈ나 병신 쫄보 같았어. 막 오줌 쌀 것 같은 표정으로 “도련님! 그러시면 안 돼요, 큰일 나요.” 이 지랄하고 다녔었잖아. 하하하핫!
─에에? 내가 언제, 이 새끼야?!
─까고 있네. 내가 기가 막혀가지고 그때 영상 찍어놓은 거 있거든? 왜, 집에 가서 그거 한번 찾아보랴?
─야 이 씹할! 쫄릴 수도 있지! 내가 그때 그렇게 붙잡아 말리지 않았으면 진짜 우리 큰일 났을 수도 있어. 그 얘기 위로 잘못 올라갔어봐라, 우리 역모로 다 싹 다 잡혀 죽었다니까!
─그야 그렇다만... 그래도 너는 병신이었어! 크하하하핫!
─아 이 씹할 새끼가...!
또 몸싸움이 시작된다. 말리는 사람도 없다.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 해산하는 분위기다. 내게 꾸벅 목례를 하며 나를 스쳐지나가는 노인들 대부분이 눈가가 젖어 있다.
그런데 저 정도의 일들을 겪어온 사람들이라면 행사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잠깐만, 그러면 여기서 이대로 그간의 사정들을 살짝 엿들어 봐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석구 옹은 성격이 급하다.
─아이, 괴현이 형! 내 말 안 듣고 뭔 소리하는 거예요? 도련님 극장에 안 가셨었다니까?
몸싸움 중인 대대장이 석구 옹 쪽은 쳐다도 안 보고 대답한다.
─뭐라고? 극장에 안 계셨다고?
─그렇다고요!
─아, 놔둬라 그냥. 그 놈 자식이 행사 참석 안 하고 술 퍼마시러 갔던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석구 옹이 꿈쩍, 놀라며 내 쪽을 바라본다. 주변 분위기도 냉각된다.
예. 맞아요. 저 거기에는 안 갔었는데, 내내 여기 있었어요. 여기 있다고요.
─...그래도 저, 행사가 있으면 가자고 말씀은 해주시는 게...?
그제야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몸싸움은 자연스럽게 중지. 익숙한 정적이 흐른다.
크하하하핫!
그러나 평상시와 다르다. 대대장 혼자 웃고 있다.
─제가 듣기로는... 저한테 ‘그 놈 자식’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평소에 저한테 불만이 많으셨던 모양이지요...
몸싸움 때문에 상기돼있던 대대장의 안색이 급격히 경직되어간다.
─아닙니다, 도련님! 잘못 들으신 거예요. 그럴 리가 있나요? 허허허헝.
영기 옹이 조심스럽게 돕고 나선다.
─예, 그렇습니다. 도련님께서 잘못 들으신 거예요. 제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놈 자식’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저도 귀를 의심했었는데, 도련님 보고 ‘그 새끼’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저는 이 새끼가 노망이 나서 미쳐버린 줄 알았습니다.
─아 이런 개쉐ㄲ...!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