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이 없다니
오픈 소스? 이쪽 세상에 스마트폰은 없는 것 같지만, 이건 어째 애플하고 안드로이드 같이도 들리는데.
─초창기에는 에너지 효율이 열선검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에 애용됐지만, 안전성 문제가 고질적이었지요. 하지만 생포위주로 하는 작전에서는 이게 필수입니다. 그래서 경찰병력들이 많이 채택을 해요.
─그렇구나. 다른 전자병기들이 더 있나?
─사실 전자병기의 소스가 공개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영주님처럼 관리하시는 게 정석이지요. 그래도 여러 소문을 조합해 보면, 유럽과 아메리카 쪽에서는 레이져로 절단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무기가 실전 배치됐다는 소식이 있었고, 명이나 남송도 비밀병기 개발 중이라고 해요. 생화학병기도 현장에서 쓰이고 있고요.
─그렇지! 그 말 잘했다. 북방 여진족 새끼들이 그걸 쓰고 있습니다. 뭐 지들도 밀리고 밀리다 보니까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국제협약이라는 게 있는데... 사실 이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죠, 어, 그... 민간인거주지 습격하고 싹 빠지는 것도 그렇고요. 여기처럼 성곽을 널리 확장한 곳이 북쪽에는 흔치 않거든요. 그렇지만 이것 말고는 딱히 위협적인 게... 영주님께서 현장 뛰시기 시작한 뒤로는, 여진족하고 조선은 기병으로도 우리한테 털리고 있거든요.
─기병으로도요? 어? 여진족하고 조선 기마궁병이 만만한 전력은 아닐 텐데?
영기 옹이 자랑스러운 듯 씩 웃는다.
─에헤이, 도련님. 활은 충전식 전자무기로는 운용이 불가하답니다.
그도 그렇겠다. 활에 열선을 달아봤자 써먹을 데가 없고, 안정성이 부족한 고압 전류를 흐르게 해봐야 쏘는 놈만 잘못되니까. 화살을 달구거나 전류를 흐르게 할 수도 없을 거다. 그러자면 화살에 충전기를 달아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쏜담?
─내열성이 강화된 탄소섬유 갑옷과 마갑이 나온 요즘에는, 화살을 아무리 많이 쏴봐야 타격을 못줍니다. 턱 당기고 잠깐 땅 쳐다보면 땡이에요. 재래식 불화살도 마찬가지죠. 아예 꽂히질 않으니까 대체로 땅으로 떨어져 버리거든요. 그리고 걔네가 짜증나고 까다로운 게, 말 타고 움직이면서 막 쏴대니까 그런 건데, 불화살을 들고 와 쏘려면 기동성이 아무래도 떨어지게 되니까요. 그래서 우리한테 ㅈ발리고 있는 겁니다.
─그렇군요.
─현재 고려 기병의 주력은 창입니다. 사실은 저랑 영기도 보병으로 시작해서 거기로 주특기 변경한 거였거든요. 그리고 개량종 한혈마를 타기 때문에 순발력과 전술구사력 면이 더 보완됐고요.
─그렇지만 옛날, 유럽 기사단 창기병들이 몽고 경기병들한테 전부 당하지 않았나요?
─그거랑은 다르죠, 도련님. 우리는 산성이 있지 않습니까? 유럽 성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아하, 그렇군. 성의 면적이 다르다. 오래 버틸 수 있겠지. 그냥 다 성안에 때려 넣고 버티고 버티다가 가끔 성문 열고 기마병으로 들이 받는다 이 개념 같은데?
─옛날에는 전투병들이 많이 당했는데, 요즘엔 공병들이 많이 죽죠. 어떤 땅이든, 성이 올라가면 사실상 끝장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여진족들도 죽기 살기로 덤비거든요. 물론 그래봐야 장비 열세를 뒤집지는 못하지만요.
─열선병기는 가장 진화된 파괴무기입니다, 도련님. 영주님께서 젊은 시절 재정적 위기를 무릅쓰고 무기 산업에 투자하셨던 건 신의 한수였습니다. 전쟁의 판도 자체가 바뀌었거든요. 전자병기하고 탄소섬유갑옷이 없던 시절에야 우리가 쫄렸지만, 지금은 정반대입니다.
─그리고 도련님, 요즘 냉각무기에 관한 소문이 자꾸 뜨고 있어요. 이건 제가 연구소에도 한번 알아봤었는데, 그냥 전설일 공산이 크다는 반응이었어요. 왜냐하면 검날을 달궈서 공격하는 방식도 에너지 효율이 매우 안 좋은 편인데, 날에 닿는 걸 얼려서 타격을 주는 건 정말 엄청난 전력이 필요해서 현실에 구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셨어요.
설명을 듣고는 있는데... 들으면서도 뭔가 자꾸 마음에 걸려. 뭔가가 부자연스러워.
뭘까, 그게?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어쩐지 이 방어체계가 중요한 거 하나를 빼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예? 그게 뭡니까, 도련님?
─...탄소섬유 갑옷의 방어력은 어느 정도죠?
─그야, 뭐...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 가장 가볍고 튼튼하죠. 충격흡수 면에서도 기존 철갑옷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기존 철갑옷 같은 건, 저 같은 사람한테 맞으면 날에 베이지 않아도 그대로 죽을 수가 있거든요.
─그리고 기본 재질이 탄소섬유인데, 일단 가볍고 충격분산도 확실합니다. 특수처리를 한 갑옷은 열에도 강하죠. 열선검으로 찢어놓을 수는 있습니다만, 숙련자가 아니면 꽤 어렵습니다.
그래도 아닌 것 같아. 이것 가지고는 부족해.
─그럼 그걸로 총알도 막을 수 있나요? 그리고 이 성벽들도 마찬가지예요. 포 사격을 막아낼 아무런 방법이 없잖아요.
셋 모두 나를 보고 눈을 깜빡인다. 말이 없다. 또 귓전에 대고 시끄럽게 웃을까봐 움찔했지만, 대대장은 조심스럽게 묻는다.
─총이 뭡니까, 도련님? 포는 또 뭐죠?
어어? 뭐지 이거?
─총포가 없어요? 화약무기 말하는 거예요. 화약은 아실 거 아녜요?
셋이 동시에 고개만 도리도리.
─금시초문입니다, 도련님. 먹는 약인가요?
아... 그랬구나. 하긴 그래야만 말이 된다. 성곽 방어니 청야니 기병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화약무기가 있는 세상에서는 말이 안 된다. 이제야 뭔가 맞아떨어지는 기분이야.
그러고 보니 몽골의 공성용 화포무기 운용능력이 꽤 수준 있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도 난다. 고려의 성벽을 못 깨고 물러났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걸까? 그것이 아닌 다른 변수를 쉽게 떠올릴 수 없다.
총이 없는 세상.
총이 없는 세상인 거다. 총과 화약이 아예 발명되지 않은 건가? 잠깐 그래도 그렇지. 아침에 본 텔레비전에서는 수송열차까지 나왔었는데?
잠깐만... 이거 잘하면 나는 이 세계를 다 정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화약만 만들어내면 되는 거잖아.
아, 맞다. 화약을 못 만들지? 재료하고 비율을 알아야 말이지. 진짜 그것만 알고 넘어왔더라면 세계정복도 꿈은 아닌데.
아으악! 그것만 알고 있었다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휘청, 너무나 큰 안타까움에 다리가 풀리고 숨이 막힌다.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은 게 다행이다.
─도련님? 괜찮으신... 거 맞죠?
맥이 완전히 풀려버린 마당이기는 해도, 대대장과 영기 옹의 걱정스런 얼굴이 눈에 들어오니 정신이 좀 돌아온다.
평생 날 이렇게 걱정해준 사람이 있었나. 내 말이라면 꺼뻑 죽는 시늉까지 할 사람들이 여기는 쌔고 쌨다. 개념만 좀 챙기고 살면, 어렵지 않게 그들의 응원과 칭찬을 받으며 살 수 있어.
그리고 여기는 시市 규모의 영지잖아. 그런 영지의 영주 아들 정도면 금수저 제대로 물고 태어난 거 아니야?
맛있는 밥, 꽤 많을 성싶은 재산, 아무리 미친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사람들.
나는 그 도련님이라는 미친놈 연기만 잘 해주면 되는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정도면 여기 돌아가는 상황도 나름 숙지한 것 같은데. 이러면 할 만하지 않나?
그냥 공부하라면 책 읽고, 운동하라고 하면 하면 되는 거잖아. 아니, 이게 뭐가 어려워?
어디 보자. 그럼... 직장 다니는 동안에는 돈이 없고 시간이 없어서 못했던 몸만들기나 좀 해볼까? 그럼 이 사람들 감동해서 눈물을 쏟을지도 모르지.
─그럼 이제 어디 체육관 같은 데 가서 몸 좀 풀어도 될까요? 운동 좀 해보고 싶은데.
대대장이 놀란 얼굴로 영기 옹과 시선을 교환한다.
─예? 어... 그... 지금은 안 됩니다.
─어? 왜요?
─여기 와 있는 사이에 저녁시간이 벌써 끝났거든요.
─아이고, 그럼 아까 그분들 또 밥상 들고 저 찾아다니시겠네요?
─음... 그런 건 도련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니지만, 일단 저녁부터 드시는 게 좋겠네요. 식당으로 가시죠. 다 준비돼 있을 겁니다.
─예. 앞으로는 제 시간에 가야겠어요.
─아, 그리고 도련님, 저는 당직실을 너무 오래 비워 놔가지고 곧바로 그쪽으로 가 봐야합니다. 근무 때문에요.
─그래도 저녁을 드셔야...
─괜찮습니다, 도련님. 제가 그쪽으로 저녁 갖다 주라고 말해놓겠습니다.
─어, 영기야. 고마워. 그리고 네가 나 대신 도련님 운동 좀 봐드려라.
갑자기 대대장이 이를 다 드러내며 씩 웃는다? 왜 이러지? 영기 옹의 표정도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예, 도련님. 식사하시는 대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아주 성심성의껏 지도편달해 드릴게요. 흐흐흐흐.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겁니다, 도련님. 흐흐흐흐.
─어머, 명복을 빌어요 도련님, 호호호호.
응?
*
이 미친 늙은이들! 이런 제기랄! 씹어먹을! 함정이었구나 그게. 저녁 먹기 전부터 계획돼있었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양반들이 짜고 나를 엿 먹인 거야.
으아아아악! 침대에 누워 몸만 뒤척인 건데 온몸의 근육과 인대가 비명을 지른다. 아아으아아아...! 오늘 진짜 장애등급 나올 뻔했네. 모든 게 계획적이었어. 아까 식당에서 있었던 일...
─도련님, 이거 더 드세요, 더요. 여기 있는 거 다 드셔야 체구가 커집니다.
속았지, 그 말에. 아침 거르고 점심을 시원찮게 먹어서 안 그래도 배가 고팠으니까.
─어... 그럼 식사 준비하신 분들은 뭐 드시고요?
─아, 걱정 마세요 도련님. 쟤들도 다 먹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분들 눈빛이 좀...?
─야, 내 말 맞지? 너희들 저녁 먹었냐, 안 먹었냐?
─...먹었습니다...
암만 봐도 아닌 것 같았어. 속지 말았어야 했는데.
─보셨죠, 도련님? 그리고 그런 거 자꾸 신경 쓰시면 체통이 안 섭니다. 자, 이것도 드세요, 다 드세요. 근오처럼 쳐묵... 아니 맛나게 드셔야 힘이 올라옵니다.
일단 영기 옹 말은 따라주되, 최대한 남기려고 노력을 했었지. 그럴 게 아니었는데. 그걸 다 남기고 일어섰어야 했어.
그러더니 체육관 들어가자마자 안면을 싹 바꿨지. 이 가증스러운 노인네...
─자... 아직 소화가 안 되셨을 테니까... 간단하게 PT 좀 할까요, 도련님?
─예?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버핏부터 할 거니까요, 일단 저기 가서 엎드리시면 돼요. 소화촉진에는 그게 최고죠.
─...에헤이. 장난이 좀 과하시네? 왜 그러세요, 갑자기? 저 도련님이잖아요. 아이 참...
─아이, 씹할 진짜 안 되겠네.
스릉!
─아니, 왜 칼을 뽑고 그러세요? 무, 무섭잖아요!
─도련님, 아무려면 제가 도련님이 미워서 이러겠습니까? 애초에 체육관 규정이 이렇게 돼 있는 걸 어쩌겠어요? 이게 다 도련님을 아끼는 마음에서 어쩔 수 없이...
Commen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