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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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나.
─거기 나가서 눈물 보이고 영주님께 혼나느니, 차라리 어디 피해 계시는 게 더 낫겠다고 그러시면서... 하아... 오늘도 안 나가겠다고 고집 부리시는 걸 제가! 주임원사인 제가! 이러시면 안 된다, 이렇게 아예 안 나가시면 영주님께서도 오해하실 거라고 다른 사람이 아닌 제가! 한참이나 공들여 설득을 해가지고...
어어? 내가요? 언제요?
─이 사람아. 그런 건 말을 해줘야 알 거 아닌가.
─아니이, 저도 진작에 말씀드리려고 했죠오! 제가 어디 영주님께 사소한 거 하나라도 숨긴 적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다 말씀을 드리고 그러면 사내가 어디 부끄러워서 살 수가 있겠냐 이러셔 가지고오! 어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영주님께 그런 말씀 올렸다간 다시 예전처럼 막 술 퍼마시고 사고 치면서 돌아다닐 거라고 협박을 하시는데...! 아아,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헐. 이거 뭐지?
─뭐야, 그럼 요즘에는 성에 가만히 붙어 있었다는 거야?
─그럼요! 요즘엔 술도 안 드시고, 공부도 많이 하십니다. 아, 그렇지! 어제는 운동도 하시겠다고 해가지고 제가 두 시간 동안 빡세게 굴려ㅆ... 아니 그... 운동 봐 드렸었거든요.
영기 옹의 현란한 아부에 말려든 아버지가 내게서 약간 멀어지자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불쑥 나와 손수건을 내민다.
─도련님, 이거 쓰세요.
─...고마워요.
손수건에서 좋은 향내가 난다. 일단 먼지가 들어가 있던 눈을 닦고 코를 왕창 푼 다음에 겨우 고개를 든다. 부끄러워서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흐흑! 하는 소리가 난다.
─...아버님!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시어 다시 뵙게 되니 저도 기쁨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아잇, 깜짝이야. 이 씹새끼가 진짜... 넌 아까 했잖아 새끼야. 내 거 훔쳐서.
─아... 그러냐. 고맙구나.
그러나 아버지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내 얼굴을 돌아보고 싱긋 웃는다. 눈으로 웃고 있는 거다. 억지웃음이 아니다.
아버지는 별 말 없이 다음 사람에게 눈길을 넘긴다. 영기 옹이 그 뒤에 찰싹 붙어 서서 내 칭찬을 한다.
아, 정말... 저러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닐 텐데. 아버지의 눈을 피해 내 쪽을 보고 양손 엄지를 척 펴 보인다. 입을 벌려 활짝 웃으며 혀를 내민다.
이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아첨의 화신이네 정말...
─잘 하셨어요, 도련님.
응? 이게 누구야?
─어? 이 손수건 승혜 씨 거였어?
손만 쏙 내밀어 내 손에 쥐어줘서 몰랐던 거다. 시종이 와서 준 건 줄 알았는데. 반가운 마음에 어제 잘 들어갔냐고 물어보ㄹ...
잠깐만. 승혜가 여기 와 있다는 건?
으힉!
승혜 아버지가 예복을 차려 입고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아, 나 저 양반은 좀... 불편행.
─어허, 연구소장이면 연구만 해. 바쁠 텐데 뭐하러 여기까지 나왔어?
아내와 아들에게 하는 것보다 더 길고 다정해 보이는 인사다.
원래 돈독한 사이였던 건지, 아니면 내가 사고를 안 치고 얌전히 지낸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그러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아닙니다. 칼이라는 것이 원래 쓸 줄 아는 주인이 있어야 의미 있어지는 물건 아닙니까.
─고생이 많아. 건강하지?
─예. 영주님께서도 좋아 보이십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어제 낮술에 취해있던 교육관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비로소 어깨를 편다. 초면에 한 대 쳐맞았던 아픈 기억이 과도한 경계심을 품게 했던 것 같다. 승혜 아버지는 어제와 달리 무테안경을 쓰고 있는데, 안경을 쓰니 인상이 더 차가워 보인다.
그럼 의전서열이 나, 계모, 다음이 연구소장 이렇게 되는 건가보다. 허어... 서열이 가족들 바로 다음이라는 건데, 정말 그냥 단순한 연구소장인 걸까?
아, 근데 나는 왜 하필 그런 사람 딸을 건드려가지고... 에휴. 완전 찍혔을 건데.
아버지가 다음 인물에게 넘어간다. 나는 슬쩍 등을 돌려 승혜를 바라본다. 가엾게도 눈이 팅팅 부어 있다. 어젯밤 어지간히 울었던 모양이다. 너 진짜 오지게 쳐맞았던 모양이구나.
─도련님.
으잇! 깜짝이야! 승혜 아버지가 말을 건다.
─우, 예? 왜 그러시죠?
─...어제 일은...
아 왜, 또!? 우이 씨... 팍 그냥...!
─정말이지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오해를 했더군요. 부디 용서하십시오.
─아하하하... 뭐 그런 말씀을 다...
─딸도 저도 주제 넘는 짓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시길 빕니다.
─아닙니다, 제가 무리한 요청을 했던 거죠. 저도 결례를 저질렀던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만일 저한테 딸이 있었다면, 저도 같은 행동을 했을 겁니다.
─딸 둔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따님 말씀을 믿어주시는 것 같아서 다행스럽네요. 저는 믿지 않고 오해를 하실 줄 알고 많이 걱정을 했었거든요.
─아닙니다. 사람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거짓말 탐지기를 돌렸습니다.
에엑?! 자기 딸한테?
나 원 참... 하긴 생겨먹은 모양새를 봐서는 전기고문을 했다고 해도 뜻밖의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딸을 후드려 팰 때도 곤장 때리는 기계를 만들어서 틀어놓고 일하러 갈 거 같은 느낌?
─...사실 저도 처음에는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글자를 잊으시다니...
─예. 그래서 요즘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원래 교육관님께 따로 부탁을 드려볼까 했었던 건데요.
─제 아비는 술을 즐기는데다가 늙어서 총기가 흐려졌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신 가르쳐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게... 어느 분이든 상관은 없지만... 소장님은 좀 무서운데요.
뜻밖이라는 얼굴로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이야기를 했던 거다.
어쩐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애.
─방금 한 얘기는 농담이었고요, 어차피 공부를 하는 게 중요하니까 어떤 분이 오시든 상관은 없겠죠. 소장님께서 오셔도 괜찮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싫다고 말씀을 하셨으니... 제가 적당한 사람을 물색해 보내드리는 건 어떠신지요?
─예,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사이 인사를 받던 아버지는 벌써 멀찍이 가 있다. 여기도 조금 있으면 정리가 될 것 같은데. 아버지가 인사를 받는 동안, 먼 길을 달려온 말들은 어딘가로 치워져 보이지 않는다.
인사가 다 끝나자 아버지는 같이 도착한 병력들과 함께 걸어서 다시 광장을 빠져나간다. 응? 관사로 들어가서 쉬는 거 아니었어?
계모는 뭔가 못마땅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수행인원들과 함께 그 뒤를 따른다.
방금 전까지 아버지 뒤를 바짝 쫓아다니던 영기 옹이 나한테 달려온다. 신나는 얼굴이다. 활짝 웃는 대대장과 예비역들은 물론, 석구 옹까지도 나쁠 것 없다는 표정들이다.
─도련님! 제가, 그러니까 주임원사인 제가! 단단히 말씀을 드려놓고 왔습니다. 그동안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은데 이제는 마음 푸시라, 앞으로는 걱정 끼쳐 드릴 일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된다 이렇게 딱! 못을 박아가지고...
못 말리는 사람이다. 하하하.
─고생하셨어요, 주임원사님.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죠? 지금... 제가 보니까 북문으로 도로 걸어 나가시는 것 같은데요.
─아, 체육관으로 가셔야 하니까요.
정오의 나른함에 슬며시 몰려오던 잠이 달아난다.
─에엑? 또 운동해요? 아니 왜요 왜요 왜요 왜애?
기겁하는 나를 본 영기 옹이 좀 한심하다는 얼굴을 한다.
─허허. 안심하십시오, 도련님. 어제 그 체력단련장으로 가시는 게 아니고요, 고대 성벽 밖에 있는 실내체육관으로 가시는 겁니다. 거기서 행사가 있거든요. 도련님도 가실 거죠? 멀지 않습니다. 말 타고 내리기도 번거로운 거리라서 걸어가시는 겁니다.
환영행사를 요란뻑적지근하게까지는 안 한다고 해서 간소하게 하고 말 줄 알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닌 모양이네. 대대장이 말을 거든다.
─조금 전에 음식도 잘 풀었다고 하고, 분위기도 좋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니까요. 딱히 신경 쓰실 일은 없을 겁니다.
─거기서는 뭐해요?
─검술시합을 합니다. 여기는 워낙 후방이다 보니까 방비태세 점검 같은 건 따로 안 하지요. 그냥 검술시합으로 퉁치는 겁니다. 천민들까지 들어와서 다 볼 수 있는 자리인 만큼 저희도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허허.
무료 음식에 무료 입장까지? 어째 로마 검투경기가 생각나는데.
─하지만 누가 시합을 하죠? 젊은 사람들은 다 싸우러 올라갔을 텐데요.
─허허허. 물론 남아있는 예비역들이 하는 거지요. 많이 기대하지는 마세요. 그냥 늙은이들 학예회라고 생각하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대대장. 그럼 오늘 대진 어떻게 되는 거냐?
─아, 미리 짜놓은 건 없어. 가서 되는 대로 엮으면 되니까.
─야. 그럼 오랜만에 나랑 붙을래?
─글쎄다. 너 영주님께서 다음 휴가 나오실 때 장례식 날짜 딱 맞춰놓기가 어려워서 그러는가 본데... 그래, 그럼 오늘 내 손에 죽는 것도 방법이 되겠네.
또 시작이군. 익숙한 전개다.
─에헤이. 자연사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있나? 너는 내가 왼손만 써도 쩜이거든? 요즘 안 맞아서 근질근질했나 보다?
─어허허허허. 이 씹새끼가 노망이 났나?
멱살을 잡겠지? 좋은 칼 놔두고.
역시, 내 생각이 맞네. 이거 구경하기 시작하면 한참 기다려야 할 테니 그냥 빨리 가야겠다.
씩씩대는 숨소리와 오가는 고성을 뒤로 한 채 나는 걷는다. 벌써 앞서 걸어 나가는 연구소장의 뒤를 따라가는 승혜가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도살장 끌려가는 송아지 모양이군.
안쓰럽지만 어쩌겠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애. 무섭단 말이야, 나도 개털릴 것 같다고.
아, 그렇지. 내 뒤에 무서운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다. 주의가 매우 산만하고, 규율에 대한 감각이 없으며, 단체생활의 개념은 깡그리 무시하고 살아가는...
─저기, 석구 옹. 저 좀 행사장까지 데려다 주실래요?
멍하니 뭔가 딴생각을 하다가 내 말을 들은 것 같다. 멍한 얼굴로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내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간다. 여러 해 전 나는 발달장애가 있는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줬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석구 옹에게서 드러나는 행동양식이 그때의 아이들의 행동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서 긴장도 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래도 석구 옹 뒤를 따라가자. 시합을 한다니까 아무래도 넓은 장소겠지? 관중석도 있을 테고. 전쟁 때문에 많이들 이곳을 떠났겠지만...
어제 여기 들어오는 길에 본 걸로는 꽤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작은 건물일 리는 없겠다.
대대장은 늙은이들의 학예회일 뿐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기대가 된다. 걸음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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