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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쿠

빙신전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수모쿠
작품등록일 :
2017.11.30 00:48
최근연재일 :
2018.05.24 11:05
연재수 :
61 회
조회수 :
74,841
추천수 :
815
글자수 :
310,718

작성
18.01.2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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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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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글자
11쪽

백병

DUMMY

칼이다. 쭉 곧은 양날이다. 십자형 코등이가 달렸고, 자루는 두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길다.

그렇지만 아까 본 석구 옹의 열선검이나 다른 열선병기들에 비하면, 아니 그럴 것이 아니라 예비역들이 하나씩은 다 차고 있던 장검들과 비교해도 날렵하고 날씬하고 작은 칼이다.

그렇지만 뭔가 이상하다.

아하, 이상한 점이 뭔지 알겠다. 금속성의 느낌이 없네.

뭐지? 칼인데 금속 느낌이 안 나? 이거 혹시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형 칼인가...? 아니다, 칼날을 잘 보니까 아예 플라스틱 같지는 않고 표면을 매끄럽게 가공한 세라믹의 질감에 가깝다.

어쨌거나 메탈의 질감은 아니다. 이건 확실하다. 칼인데 금속 느낌이 아니라니...

신기하네? 날과 손잡이에 아무런 장식도 없다. 칼 중앙에 커다란 보석이 박혀있을 뿐이다. 전기가 들어오는 건가?

타는 담배 끝에 매달린 빨강처럼 진하고 붉은 빛 덩어리들이 둥근 보석 속을 천천히 움직이고 유영한다. 칼자루와 코등이, 칼날이 한 몸으로 이뤄진 것 같다.

뭐야, 이거 뭔데 얘가 이러는 거지?

─아니, 저게 뭔 줄 알고 만져보겠다는 거야?

─이 근방에 저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보검 백병이잖아요, 모르면 간첩이죠.

아함. 그러니까 이 칼 보러 내 침실에 들어온 거구나? 공부 가르친다는 것도 그냥 구실이었던 거야?

왠지 심통이 난다.

─보검이라고? 내 눈엔 그냥 작대기로 보이는데?

─에엑? 도련님, 정말 간첩이었어요?

─아니, 나는... 어제 술 먹고 머리를 다쳐서 기억을 잃었잖아. 모르지. 뭔지 알겠냐, 내가?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이까짓 게 뭐라고?

─아, 답답해... 저게 우리가 가진 모든 열선병기의 이상형이란 말이에요! 우리나라에 저런 물건은 하나밖에 없어요.

─칼 같이 생겨먹지도 않았는데? 플라스틱 아니야, 저거?

─어휴... 저거 보여요, 도련님?

─응? 뭐 말하는 거야? 저 보석?

─네. 저게 사실상 발전소라고 보면 돼요.

─뭐라고? ...혹시 너도 어제 술 먹고 머리 맞았니?

─아, 정말 깜깜하신 분이네... 저건 초소형 원자로라고요. 발전소급 전력이 나와요.

─에이, 저만한 거에서 어떻게...?

─당연하잖아요? 그만한 전력은 끌어다댈 수 있어야 열선검계 최강병기가 될 수 있는 거죠.

─열선검이라고 저게...? 그럼 아까 본 것들처럼 충전 안 해도 되는 거야?

─물론이죠. 전원만 넣으면 계속 유지돼요. 파워팩이 없으니까 휴대도 간편하고요. 저건 스스로 백열을 하는 칼이에요.

─백열...이라는 건?

─아이 씨... 도련님은 그것도 몰라요? 금속을 적열 상태에서 계속 달궈가지고 1000도씨 이상으로 온도를 올리면, 금속이 새하얗게 빛나요. 일반 열선병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온도까지 올라가는 거죠.

─뭐야, 그럼 녹아서 없어지지 않을까?

─다른 열선검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백병의 초합금 검날은 그걸 너끈히 견뎌낸대요. 백병이라는 칼 이름도 그 백열 때문에 붙은 거라던데?

─이름은 또 무슨 뜻인데?

─흰 백자에 병풍 병 자요. 하얀 병풍이라는 뜻이에요.

─흐하하. 그건 좀 웃기네. 칼에 왜 병풍이라는 이름을 붙인대?

─전원을 넣고 백열 상태에서 칼을 휘두르면, 그 모습이 마치 하얀 병풍을 친 것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랬어요. 모든 걸 자를 수 있대요. 심지어는 열선검들이나 전자병기들까지도 자를 수 있다고 들었어요.

─허, 대단한 물건이었구나...

─우리 엔지니어들이 저거 역설계하려고 오랜 세월 달라붙어서 피땀 흘렸지만, 아무도 성공 못했대요.

─그런데 왜 충전기 같은 거에 꽂혀있는 거야? 발전소급 전력을 낸다면서?

─아, 진짜! 그게 궁금해서 제가 도련님 부른 거잖아요. 이거 왜 이런 거예요?

아는 바가 없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글쎄다? 나는 기억이 잘... 그보다, 그런 귀한 물건이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젊은 시절 영주님께서 아메리카의 무기 장인에게서 얻으신 거랬어요.

─그런데 이거,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칼로 안 보이는데. 혹시 레플리카 아니야? 칼이라는 건 써야 맛이잖아, 안 그래? 그런데 전쟁 뛰고 계신다는 분이 가장 좋은 칼을 집에 놓고 다닌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왜 여기다 모셔놓은 거냐고?

승혜가 입을 꾹 다문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 붉은 입술을 잘근거린다.

─저 칼은... 반드시 도련님한테 물려주실 거라고 이제껏 한 번도 안 가지고 다니셨대요. 전장에서는 아마도 일반 열선병기 쓰고 계실 거예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아... 그런가.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한가지인 것 같다. 내가 말이 없으니까 승혜가 내 얼굴을 흘깃거리더니 딴소리를 한다.

─그도 그렇겠지만, 워낙 귀한 가보이다 보니까 험히 쓸 수 없다는 생각도 하셨겠죠.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재산인 거예요. 저라면 성 하나랑 바꾸자고 해도 안 바꾸겠어요.

있지도 않은 성을 칼 한 자루와 바꾸겠다니, 실소가 나온다.

이제는 아예 무릎까지 꿇고 앉아서 칼과 눈높이를 맞추고 바라보고 있다. 자세를 봐서는 기도하는 소녀 같지만, 얼굴만 놓고 보면 오줌 마려운 강아지 같다.

─이거 어떻게 만지는 건지 진짜 도련님도 몰라요? 히잉...

실망하는 기색이 너무 노골적이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보니까 해주고 싶은 일이 생긴다.

─그러니까, 저 칼 만져보는 게 평생 소원이었다 이거지?

─그럼요? 그렇지만 여기는 엄중경비구역이어서 한번 들어봐 보지도 못했어요.

─그럼 한번 꺼내 볼까. 뭐 별일 있겠어?

인큐베이터(?) 안으로 불쑥 손을 넣어 칼자루를 잡으니 기겁을 한다.

─에엑? 그렇게 함부로 만지면 어떡해요? 안돼요, 도련님! 안 돼요! 큰일 나요!

승혜가 당황할수록 괜히 신이 난다. 뽑아들면 아예 기절해버릴 수도 있겠어. 응? 잘 안 나오네? 힘을 좀 줘서 뽑아볼까...!

뭔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나기는 했는데 다른 이상은 없다. 백병은 온전히 뽑혀서 한 손에 들린다. 외양은 칼이 아닌 것 같았지만, 무게는 오히려 더 무거운 것 같다. 뭐야, 아무 일도 없잖아.

─자, 들고 찬찬히 봐.

승혜는 바바리맨을 만난 여고생처럼 바짝 긴장한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을 못하는 것 같다.

─정말 그래도 돼요? 정말?

그런데 승혜의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침실의 모든 불이 나간다.

─어? 정전인가?

빈틈없는 어둠이 주변에 가득 들어찼지만, 칼의 붉은 보석에서 나는 빛이 있어 방 안이 어느 정도는 식별 가능하다.

─무거우니까 조심해. 어디 다치지 말고.

─네, 네! 도련님...

고맙다는 소리도 없이 칼부터 넙죽 받아든다. 저렇게 좋을까. 깜깜해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눈을 바짝 대고 칼을 들여다보고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이곳저곳을 더듬는다.

승혜의 오랜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 내게는 승혜의 실루엣만이 남겨진다. 육감적인 몸의 윤곽이 코앞의 어둠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거다.

갑자기 몸 내음이 확 짙어진다. 불이 꺼져서 그런가? 보이는 게 없으니까 대신 후각으로 지팡이를 삼으려는 거겠지. 아찔하다. 온몸의 피가 한 순간에 끓는점을 뚫은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킨다.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커서 나도 놀란다. 이런 제기랄. 승혜도 들은 것 같다. 아, 미치겠네 진짜.

승혜가 칼을 내게 돌려준다. 응? 뭐야, 한 한두 시간 들여다볼 것처럼 굴더니 싱겁게 왜 이래?

─...도련님. 아까 고마웠어요.

─응? 무, 뭐가?

─망토 씌워준 거요. 정말 추웠거든요.

─아, 그거? 에이, 뭐 그런 걸 가지고...

그 뒤로 대화가 끊긴다. 아,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나 지금도 좀 추운데.

─아, 그래? 방금 정전돼서 난방도 꺼졌나 봐. 잠깐만, 이거 옷장인가? 조금만 기다려. 옷 꺼내 줄게.

한 손에 칼을 들고 그 빛을 손전등삼아 옷을 찾는다. 그런데 이거 이렇게 써도 되는 칼일까?

─야, 이거는 너도 입을 만할 것 같은데?

얘가 어디 갔지? 짧은 털외투를 들고 세 걸음을 걸어 나온 뒤에야 승혜가 보인다.

어? 어느 틈엔지 승혜가 침대 위에 걸터앉아있다.

툭─

옷장에서 꺼낸 옷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러나 승혜는 나무라지 않는다.

어...? 춥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칼을 떨어뜨리지나 않은 게 다행이다. 그리고 어두워서 다행이야. 아마 나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병신같이 서 있을 테니까.

따지고 보면 옷장과 침대 사이의 거리가 멀 리 없는데 이상하게 멀어 보인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있는 여체는 흐릿하다.

이런, 제기랄. 다행이라는 거 취소. 어두워서 불행하다. 정황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시각적으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나는 그녀의 상태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건 불공평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내의 광원光源은 단 하나다. 내 손에 들린 칼 한 자루.

가까이 다가가면 더 잘 보일 거야.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

한 걸음 다가간다.

앉아있어서 그런지 엉덩이와 넓적다리의 윤곽이 더욱 도드라진다. 낮에 본 걸로는 키에 비해 어깨가 넓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제 보니 그 어깨보다 골반이 더 넓어 보일 지경이다.

승혜는 상체를 약간 뒤로 젖힌 채 등 뒤로 뻗은 두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딴전을 피운다.

다가서는 나를, 고개를 외로 꼬고 외면하고 있다. 저 외면은 승낙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역시 기다리고 있는 걸까? 손만 뻗으면 즉시 확인할 수 있을 듯싶은 밤의 얼굴이, 그녀의 표정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궁금하다.

한 걸음 더.

아니, 아직은 모르겠어. 저 얼굴을 내 눈앞에 돌려놓고 눈을 봐야 알 수 있을 거다. 아무래도 들여다봐야겠어, 저 얼굴을.

가능하다면 밤새 눈에 담아두고 싶은데,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아, 무엇으로든 저 몸에 엮여 엉키고 싶다. 온몸이 녹아서 영영 없어져버린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기 흐르고 고이고 스미고 싶어.

─저기, 너... 이, 이러시면... 곤란하다?

─...

대답은 없다. 대신 숨소리가 들려온다. 가지런하지 않은 숨소리가 마법의 주문처럼 들린다. 갑자기 온몸이 노곤해진다.

피곤하다. 왜 이러지?

아, 맞다. 오늘 하루 종일 개고생했잖아. 잠깐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나? 저기 저 허벅지 에 가만히 얼굴을 묻고...

아니, 역시 그런 건 어렵겠어. 칼이고 뭐고 다 내던져 버리고 저 어둠 속으로 성큼 뛰어들고 싶다.

또 한 걸음.

목이 가늘고 길다. 가까이 오니까 알 것 같다. 승혜는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침대 위로 드러누워 버릴 거야. 그럼 나는 저 목에 입 맞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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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창 던지기 +8 18.03.16 790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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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접힌 투구 +6 18.03.12 874 13 11쪽
35 화염의 매 +10 18.03.10 1,176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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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아구창 +10 18.03.06 830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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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아부의 신 +4 18.01.28 910 11 11쪽
27 영웅의 귀향 +6 18.01.26 953 15 11쪽
26 자리다툼 18.01.26 865 13 11쪽
25 예복 +7 18.01.24 975 14 11쪽
24 첫날 밤 +2 18.01.24 1,017 10 11쪽
» 백병 +3 18.01.21 1,007 1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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