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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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육은 여기서 마칠게요. 처음 한 것 치곤 대단히 잘하신 거예요. 어차피 내일 행사는 평보나 속보로만 진행이 될 테니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예. 고생하셨습니다.
말에서 내린다. 거의 하루 종일 말에 올라 앉아있었더니 이제는 땅의 느낌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새로운 느낌이다. 흙 속에 푹푹 빠지는 발이 내 것 같지가 않다.
그렇지만 트램펄린에서 한참 방방 뛰다가 내려왔을 때랑은 뭔가 다르다. 트램펄린에서 놀았을 때는 다리에 힘이 없어져서 점프를 힘껏 뛰어도 몸이 조금밖에 떠오르질 않았는데, 지금은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간다.
제자리에서 몇 번 뛰어올라본다. 괜찮네. 승마가 의외로 운동이 많이 되는구나. 비육지탄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계속 말만 타고 돌아다녀도 허벅지에 살은 안 찌게 돼 있는 거야.
내가 제자리 뜀을 하자 앞서 가던 교관이 뒤를 돌아본다. 입을 가리고 웃는다.
에이 씨. 그냥 가만히 있을 걸. 어쨌거나 내 예상과는 달리, 말 타는 건 무턱대고 팔자 좋게 늘어질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오늘도 한 가지를 배운다.
호원 노인이 보란 듯이 기지개를 켜고, 대대장은 초원의 사자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대대장도 호원 노인도 그리 좋아 보이는 기색은 아니다.
하긴 그럴 법한 일이다. 열 살짜리 애들도 할 줄 아는 걸 오늘에야 처음 해보는 사장아들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는가. 지금이라도 시작하는 것이 기특해서 아무 말 않고들 있는 거겠지.
틈틈이 짬을 내서라도 반드시 배워놔야겠다.
─내일부터는 이렇게 밥 가져오지 마세요. 제가 식당으로 가서 먹을 테니까요.
─예에?
모두 깜짝 놀란다.
─아... 그... 딱히 조리원들이 고생할까봐 이러는 게 아니고요, 이제부터는 저도 사람들 많은 곳에 자주 드나들어야 될 것 같아서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이렇게 가다가는 자칫 있으나마나한 사람으로 취급될 수도 있다.
물론 매일 내 얼굴을 보면서 밥을 먹게 되면 소화가 잘 안 될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 가만 생각하니 그것도 괜찮네? 하하.
그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조리원이 머리를 조아린다.
─식당에 그렇게 일러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식사는 여느 때처럼 영양가 있고 맛이 좋다. 운동도 한참 해서 그런지 밥에서 꿀맛이 난다.
며칠 전까지 자취를 하면서 직접 차려먹던 것과는 완전 딴판이다. 식단 변화만큼 내 인생도 괜찮아진 거 아닐까. 어쩌면 처음으로 전성기를 맞게 된 건지도 모른다.
성의껏 열심히 하면 내일도 오늘처럼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후계구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거다. 계속 그렇게 해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살던 곳은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는 곳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 여기서 내가 누리고 있는 기회들도 마찬가지. 노력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주어지는 것들은 아니다. 이것들이 영주아들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것만 놓고 보면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드르륵!
갑자기 승마연습장 문이 열리고 거대한 사람 하나가 안으로 들어선다.
─어? 근오야. 여기는 어쩐 일이야?
얼굴이 안 보인지 얼마 안 됐는데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진다.
─밥 먹으러 왔어요, 도련님.
─응? ...아니 그래도 오랜만에 아빠가 휴가 나오셨는데 가족들이랑 같이 먹지 그랬어?
─아빠가 나랑 안 놀아준단 말이에요! 어젯밤부터 술 마시고 아빠는 잠만 자요. 목도 졸라보고 올라가서 밟아보기도 했는데 꼼짝도 안 하던데.
근오야. 그런 행동은 조금...
어쩌면 네가 네 아버지를 죽인 건 아닐까? 한 번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얼른 와서 이거 먹어. 그런데 있잖아, 너 나중에 내가 안 일어난다고 목 조르고 발로 밟고 그러면 안 된다?
음식이 모자라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좀 모자라면 또 어떤가. 성내에는 얼마 없는 내 편들 중에 가장 어린 친구다. 내가 좀 덜 먹으면 되지. 쫄아서 이러는 거 아니다.
근데 좀 수상쩍은 구석도 있는 애다. 처음 만났을 때 말하던 걸 봐서는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알 거 다 아는 것 같았는데. 여기는 대체로 좀 조숙한 편인가? 고려시대 성 풍속이 화끈했다는 이야기는 나도 주워들은 적이 있지만.
어찌 됐건 전투력 면에서는 믿음직스럽다. 그리고 활터에서 활을 쏜 뒤로는 나를 좀 달리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아, 그리고 상황실 할아버지가 심부름 시켰어요.
─뭔데?
─저기... 오늘 영기 할아버지가 몸이 계속 안 좋으시다고, 대대장님이 오늘 당직 땜빵하셔야 된댔어요.
대대장이 잠깐 밥숟갈을 놓는다.
─아 왜 내가...! 미치겠네 진짜. 인사계 이 개새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삼일 연짱으로 당직을 박아놔?
근오가 천연덕스럽게 받는다.
─왜요오? 어차피 늙어서 밤에 잠도 잘 안 오잖아요.
지금 웃으면 칼을 맞게 될 지도. 조용히 있자.
그러나 호원 노인은 하나 남은 눈으로도 실실거리며 잘 웃는다.
─축하해요, 괴현이 형. 이 기회에 당직사령 최장기록도 한 번 세워보지 그래? 크하하핫.
─...너 뒈질래?
─아, 당직사령 아무나 하는 거 아니잖아. 알면서 왜 그래요? 그럼 뭐 척인성이랑 영주님보고 하라고 하게?
─아이 씨 진짜! 도련님, 이거 꾀병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따가 찾아가서 내무검사 한 번 해주면 씻은 듯이 나을 수도 있거든요?
여기는 뭐 이래? 아픈 사람한테 문병이 아니라 내무검사를 하러 간다니. 허참.
─그럼 오늘은 쉬시죠.
─예? 아니, 그래도 어떻게...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호원 노인이 숟가락을 땅에 떨어뜨린다.
─잘 못 들었습니다?
─당직이요. 제가 한다고요.
모두 말이 없다. 호원 노인이 어렵게 입을 뗀다.
─도련님. 그럼 우리는 내일 아침해가 뜨기 전에 다 멸망해 버릴 겁ㄴ...
따악!
대대장이 뒤통수를 후려치며 다급히 그 입을 틀어막는다.
─뭐 안 될 게 있겠습니까? 어차피 CCTV 돌아가는 것만 보고 앉아 있으면 되는 건데요. 딱히 해야 할 일 같은 것도 없습니다.
─형! 뭔 소리야 지금? 이렇게 막가면 우리 다 ㅈ되는 거ㅇ.. 읍읍!
─허허허허. 걱정 마십쇼, 도련님. 제가 다아 알려드리겠습니다. 허허허허.
일이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걸 보고 있자니 불길한 생각도 든다.
식당 조리원들에게 아침식사 준비를 한 번 쉬게 했다가 오늘 아침 화채 만드느라 진을 뺐는데, 이번에 하루 당직을 쉬라고 하면...
에이 설마. 이렇게 평화로운 영지에서 별 일 있겠어? 그리고 나에게는 당직근무를 통해 반드시 알아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궁금했지만 의심받을지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자연히 알 수 있게 될 거다. 그러니 나에게는 좋은 기회다.
대대장은 신이 나서 호원 노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다. 그동안 나는 목소리를 낮춰서 식사를 가져온 작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한다.
─저기... 주임원사님이 몸이 안 좋으신 모양이니까, 몸에 좋은 걸로 죽을 쑤어서 가져다 드렸으면 좋겠는데... 아, 꼭 죽이 아니어도 괜찮겠네요. 아마 술병 나신 걸 테니까요. 어제 진짜 많이 드셨거든요.
─그럼... 언제쯤 가져다드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예? 어... 아무래도 여러분 퇴근시간 되기 전에 가져다 드리는 게 좋겠죠?
조리원이 조금 당황한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인지 잘... 저희에겐 퇴근시간이라는 게 따로 없습니다.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아무 때나 편한 시간에 갖다드리세요.
─알겠습니다, 도련님.
이전의 세계에서라면, 나는 그저 거대한 체계의 한 부품에 지나지 않을 거다. 쓰다가 다 되면 그냥 집어던져버리면 그만인 1회용 소모품. 그렇지만 여기서는 영주의 아들이고,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리고 있다.
허나 내 지위가 격상된 만큼 추락해버린 사람들도 있는 거다. 이런 면면을 지켜봐야하는 심정은 얼마간 고통스럽다.
아, 일단 밥이나 먹자. 당직 서려면 힘들 테니까. 같이 힘들면 이 불편한 마음이 좀 나아질까.
응? 교관 눈이 동그래져 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왜? 개차반 도련놈이 조리원들 신경 써주니까 새로워 보이나? 대단한 일도 아닌데 뭘. 이런 거 가지고 놀라면 나중에는 어쩌려고?
앞으로는 많이, 더 크게 바뀔 텐데.
그나저나 승마연습만 끝나면 곧장 숙소로 돌아가 쓰러져 잘 요량으로 졸려도 참고 견뎠던 건데. 이런 씨양 노무 거.
일과 끝나자마자 또 당직이라니 환장하겠다. 잠깐만. 당직이 끝나면...? 잘 수 있을까. 내일 기마행진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아차... 깜빡했네. 그냥 모른 척할 걸 그랬나? 땜빵은 다른 날 해도 되는 거잖아. 너무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 같다. 졸려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아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남자가 지금 와서 말을 바꿔?
에라, 모르겠다. 그냥 눈 딱 감고 하루만 더 고생하자. 학비 벌자고 공장에서 2교대 돌던 적도 있었는데 뭘.
갑자기 밥알이 깔깔해지는 것 같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방금 전까지는 꿀맛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역시 마음먹기 달린 거다.
원효대사 해골물! 끽해봐야 15시간밖에 안 될 거 아닌가. 그 정도야 뭐!
드륵.
조용히 의자를 빼며 교관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련님.
식사를 다 마치고 일어나라고 권유하기가 좀 어려운 상황이다. 이건 순전히 근오 탓이다. 근오는 무서운 속도로 음식을 전멸시키고 있다. 얘는 무슨 음식물 처리긴가?
근오가 먹어치우는 양이 워낙 많다보니 교관이 여기서 계속 밥을 먹기가 어려워진 거다. 나도 배가 고프지만 적당히 먹고 숟가락 놔야겠다.
그런데 잠깐만. 우리 아직 얘기 안 끝났잖아?
─교관님, 그럼 다음 교육 일정은 언제로 하실 건가요?
─일단... 내일은 행사가 있으니까요, 시간 나실 때 언제든 연락주세요. 그보다 좀 주무셔야 할 것 같은데. 눈 충혈 됐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애초에 가시 같은 건 없는 말투였지만, 지금은 더 보들보들해진 것 같다.
내가 열심히 교육을 받아가며 노력하는 모습을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방금 조리원들을 신경 쓰는 모습을 봐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 대한 인식이 조금쯤은 좋은 쪽으로 바뀐 느낌이다.
─하하. 이 정도야 뭐...
─네. 그럼 저는 이만... 아참, 아까 이름 물어보셨죠? 제 이름은... 윤남이에요. 그... 다음번에 교육대로 연락주실 때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윤남? 이름이 윤남이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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