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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쿠

빙신전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수모쿠
작품등록일 :
2017.11.30 00:48
최근연재일 :
2018.05.24 11:05
연재수 :
61 회
조회수 :
74,958
추천수 :
815
글자수 :
310,718

작성
18.05.02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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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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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11쪽

말 타기

DUMMY

이러면 미션은 끝이다. 내 목표는 저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점심 인력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거였으니까.

다들 늦잠을 잤으니 곧 점심시간이 온다. 이렇게 버티고 있으면 곧 조리원들이 와 줄 거야.

이제부터는 과일을 깎을 거다. 사과 껍질을 벗길 시간이 없으니 그냥 그대로 틀에 넣어 쪼갠다. 다행히 잘 된다. 레몬도 꼭지만 잘라서 틀에 넣고 누르니 쉽다.

주방과 식당 사이에는 통유리로 된 넓은 창이 나 있다.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기에 부족함이 없는 장치다.

사과를 하나 쪼개고 고개를 드니 어느 샌가 영기 옹과 대대장이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응? 방금 전까지는 아버지와 계모뿐이었는데?

다시 사과 하나를 더 쪼개고 고개를 드니 그 옆에 연구소장과 승혜가 더해진다. 고개를 한번 들 때마다 식탁에 앉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멀리 유송과 진영도 보인다.

어 이거 꿈인가? 이게 몇 백 명이야 도대체? 만만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비로소 와 닿지만, 죽어라고 과일을 썰고 쪼개는 것 말고는 여기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

오래 기다리게 했다간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라. 시간을 아끼기 위해 수박은 그냥 반으로 잘라 속을 대강 떠내 손으로 으스러뜨려 넣는다. 파인애플통조림, 복숭아통조림도 따자마자 국 담는 통에 전부 다 때려 넣는다.

빈 음료수통이 부엌바닥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다가 쌓여 점점 높아진다.

그나저나 자리에 앉아있는 승혜가 아버지한테 어젯밤 썰을 풀지나 않을까 싶어 걱정이 태산이다. 어젯밤에는 기적적으로 들키지 않았지만, ㅇ이 내 방에 있었다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안 될 일이다. 절대로.

바퀴 달린 밀차에 첫번째 화채 통을 실어 식당으로 나간다. 진짜 더럽게 무겁네. 그리고 첫 그릇을 국자로 떠 아버지 앞에 놓는다.

─어흠! 숙취를 해소할 과일화채를 만들어봤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싱글거리며 묻는다.

─오, 그래. 그런데 점심은 언제쯤 되냐?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소린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아, 몰라요!

홱 돌아서서 씩씩대며 주방으로 들어가는데 아버지 주변에서 웃음이 터진다. 알게 뭐야. 나머지 인간들은 알아서 퍼 먹겠지.

깎고 또 깎아대는데 과일은 끝이 없다.


*


점심을 준비하려는 작은 사람들이 나타날 때까지 나는 혼자 쉼 없이 과일을 쪼개고 또 깎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개 이상은 되지 않을까.

평생 깎아온 과일의 수보다 더 많은 과일을 일시에 깎아내고 보니 몸도 힘들고 마음도 피곤하다.

나중에는 음료수가 다 떨어져서 우유까지 다 털어 넣고 설탕을 부었다. 그래도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잘 먹였으니 나도 대단한 인간이다.

소소한 위기 하나를 잘 넘겼다. 물론 화채 맛이 훌륭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겠지.

예비역들이야 원래 내 지지세력이었던 데다가 밤새 먹고 마신 뒤여서 굶주림보다는 숙취가 더 문제였을 것이고, 계모 일당은 또 그 나름대로 영주아들이 직접 만든 음식을 가지고 영주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을 수 없었던 것일 터다.

운이 좋았다.

으아아아... 하얗게 불태웠다. 하얗게. 이제 앉아서 쉬어야지.

뒤늦게 식당에 도착한 작은 사람들이 내게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의 말을 하지만, 뭐라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졸려서 그런가.

어쨌거나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쯤은 의심을 거둘 수 있을 것 같다.

뭐랄까. 그 황송(?)해하는 표정들이 조금도 작위적이지가 않고, 진심을 담은 것처럼 느껴진다. 적어도 그 사람들이 어제 내 방을 엿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느낌.

그럼 누구지?

아차.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나는 아버지 옆에 붙어 눈치를 보다가, 어젯밤 내 방에 ㅇ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한 놈을 찾아냈어야 하는 거였는데. 아버지는 이미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날 샜네. 뼈 빠지게 화채 만드느라 그것도 못하고 넘어갔다. 하아.

승혜가 굳이 연구소장 눈치를 봐가면서까지 주방 문을 밀고 들어온다. 조금도 공손한 맛 없이 고개만 까딱, 숙여 보이더니 고양이처럼 씨익 쪼갠다.

─잘 먹었어요, 도련님. 헤헷. 이제 여기서 일하셔도 되겠네요.

열심히 주방을 정리하다가 그 말을 듣고 식겁한 조리원들이 다시 내 눈치를 살핀다.

아오, 이걸 진짜! 대놓고 약을 올리는데 기운이 없어 화도 못 내겠다.

─오후부터는 뭐하실 거예요, 도련님? 같이 점심을 만드실 건가아?

말끝이 좀 짧다? 당연히 ㅇ이 어떻게 됐는지부터 얘기해줄 줄 알았는데 딴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왠지 나도 오기가 생긴다. 그럼 뭐 내가 애걸이라도 할 줄 알았냐? 모르는 척 해야지.

─검술수업을 받을 거야. 그리고 저녁에는 이것저것 공부도 좀 하고.

─흐응... 그 일정은 바꾸시는 게 좋을 텐데요오?

아니 이 새끼가 어따 대고 비음을 섞어? 때려버릴라 진짜 씨...

아니다. 지금 상태로 맞짱 뜨면 내가 질지도 몰라. 평소라면 당연히 이기겠지만 지금은 힘이 없잖아.

─아, 시끄러! 나 아침부터 개고생해서 피곤하다고. 낮잠부터 한숨 때릴 거야.

─어머? 그것보다 급한 일이 있으실 텐데?

─뭐? 뭐가 급해?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

승혜가 뭔가 대단한 거라도 알려주는 양 귓속말을 한다.

아오, 간지러. 꺄하핫.

─아까 영주님께서 지나가듯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요, 기마행진을 하루 미뤄야겠다고 하셨어요.

응? 혹시 여기서 기마행진이 뭐냐고 물으면 의심받을까? 아 복잡한 상황...

─이런 걸 만들어서 내놓을 줄은 몰랐다고 하시면서, 내일 도련님 하는 거 봐서 기마행진 끌고 나가야겠다고 그러시던데에? 헤헤. 그때 그쪽 분들 표정이 어땠는지 아세요?

응? 그럼 아버지는 나를 떠본 건가? 개고생하게 만들어놓고 지켜보다가 잘 한다 싶어서 그렇게 싱글거리고 있었던 거야?

─그럼 답 나오죠? 오늘 일정이요!

─응? ...나는 피곤해서 일단 낮잠부터... 아야!

앞치마 사이로 주먹을 뻗어 옆구리를 툭 친다. 아 이 새끼가 진짜? 은근히 사람 치네?

─아이 참! 답답하게 왜 그래요, 정말?

아오 씨!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내가 아침에 화채 만드느라 힘만 안 뺐으면 넌 진짜 오늘 초상 치르는 거였어.

답답하면 답답한 네 가슴을 쳐야지 왜 날 때려?

─도련님. 여태까지 도련님은 말이 불편하다고 맨날 차만 타고 돌아다니셨잖아요. 그런데 영주님이 기마행진을 내일로 미뤄주신 거예요. 그럼 오늘 뭘 하셔야 될까요?

─그럼... 이제 말까지 타라는 거야? 시간 하루밖에 없는데 하루 만에 말 타는 걸 배워서 내일 기마행진에 나가라고?

승혜는 내가 당연한 소릴 해서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아... 이러면 나는 행복해질 수가 없어. 이번에는 승마장으로 가서 구르라는 얘기 같다. 낮잠 한숨 자보려고 했던 계획은 당연히... 이런 씹하아알...

여기는 참 희한한 곳이다. 언뜻 보면 다 내 마음대로 될 것처럼 생겨 먹었는데, 알고 보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어젯밤, 그리고 그 전날 밤, 침대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보낸 건 그냥 그렇다고 쳐. 아침부터 체력이 넘쳐나는 여단장한테 걸려 웃통 까고 미친 듯이 달렸고, 그 다음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몇 백 명이 먹을 화채를 만들었는데! 이제는 팔자에 없는 승마까지 배우러가야 하는 건가.

이런 제기랄. 가야지 뭐 어쩌겠어. 영지를 물려받으려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잘 보이는 수밖에. 일단 씻고 옷부터 입자.


*


내 방으로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대대장과 영기 옹, 그리고 다른 예비역 노인과 승혜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승마는 어디서 하게 되는 건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섞여 가려는데 영기 옹이 앓는 소리를 낸다.

─끄으응... 도련님. 송구스럽지만 저는 오늘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제 무리를 했더니 술병이 난 모양입니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것 같다. 그러게 좀 살살 드시지 그러셨어요. 어제 연회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신 사람은 단연코 영기 옹일 거다. 그뿐인가. 분위기를 살피고 있다가 내가 곤란해지면 나를 구해주기까지 했지. 그리고 밤에 내 방으로 ㅇ을 데려... 으흐흐흐.

으흠! 나 이상한 생각 같은 거 안 했음. 정말임.

그러니까 앞으로 잘 보여야 돼. 작가가 혹시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된다면 나를 위해 큰일(?)을 해줄 사람이니까.

근데 나도 영기 옹 따라 어디 짱 박혀서 한잠 잤으면 좋겠다. 휴식이 필요한데.

─그럼 일찍 들어가서 푹 쉬셔야죠.

─감사합니다, 도련님. 오늘은 저 대신 호원이가 수행할 겁니다.

얼굴은 익히 봐서 아는 처지다. 검은 안대를 하고 있던 예비역 노인. 이름을 외우자. 마치 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도련님, 그럼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 맞다. 괴현이 형, 형도 가서 좀 쉬지 그래요. 형도 꽤 달리는 것 같던데?

─아니 나는 됐어. 어떻게 둘 다 가냐? 영기랑 나 둘 중 하나는 있어야지. 그나저나 술 몇 잔에 저렇게 맛이 갈 거면 다른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장례 날짜 받아놔야 되는 건데. 저 새끼도 갈 날 얼마 안 남은 것 같애.

흐음. 싸움을 걸고 있군. 또 몸싸움이 일어나려나?

음? 그냥 말 몇 마디로 끝나는 걸 봐서는 정말 몸이 안 좋은 모양이다. 이래서야 안 되지. 안 그래도 우리 편은 수적 열세에 처해 있지 않은가.

─일단 마음 편히 쉬시고요, 혹시 내일도 안 좋으시면 저한테 말씀마시고 의사한테 꼭 가보세요.

─예.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비를 건 다음에야 정말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대대장은 별 말이 없다. 되레 미안해하는 눈치다.

아... 이제부터가 문제네. 승마라니.


*


가만 보면 고대 성벽 안에는 중요한 건물들만 들어서 있는 것 같다. 관사, 지휘소, 식량창고, 발전소, 연구소, 식당, 예비군, 무기고, 승마연습장까지.

표지판이나 간판 같은 게 하나도 없는 곳이지만, 거기서 길을 잃는 사람은 아마 나 말고는 없을 거다. 건물들의 배치가 잘 돼 있어 모든 동선이 짧고 간결하다.

군사시설이기 때문만은 아니겠지.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경험이 이곳의 이동효율성을 끌어올린 거라고 봐야할 거다.

─다 왔습니다. 이리 들어가시면 됩니다.

막상 연습장에 들어와 놓고 보니 꽤 좁다. 이건 좀 놀랍네. 연습하는 사람들도 없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지만 의심받을까봐 못하겠다.

뜻밖의 일이지만, 나를 수행하는 인원 중에는 승혜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공식적인 직함이 기록관이라고 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닐 터이나 연구소장한테 걸려서 혼나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그 양반... 무력은 그렇게 대단치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무섭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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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꽃보다 화살 +10 18.03.22 803 10 11쪽
40 아첨 시작 +16 18.03.20 1,057 11 12쪽
39 바람이 분다 +5 18.03.18 724 14 11쪽
38 창 던지기 +8 18.03.16 792 8 11쪽
37 비무가 끝난 오후 +9 18.03.14 780 6 11쪽
36 접힌 투구 +6 18.03.12 875 13 11쪽
35 화염의 매 +10 18.03.10 1,176 10 11쪽
34 골육상쟁 +10 18.03.08 813 12 11쪽
33 아구창 +10 18.03.06 832 10 11쪽
32 판정 +13 18.03.04 813 1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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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비무원 +6 18.01.30 935 15 11쪽
28 아부의 신 +4 18.01.28 914 11 11쪽
27 영웅의 귀향 +6 18.01.26 955 15 11쪽
26 자리다툼 18.01.26 868 13 11쪽
25 예복 +7 18.01.24 976 14 11쪽
24 첫날 밤 +2 18.01.24 1,019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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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열선검 +3 18.01.19 1,015 14 11쪽
19 고산성 +4 18.01.19 972 1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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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다들 어디가 +3 18.01.15 1,628 1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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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수성치안대대 +5 18.01.10 1,385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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