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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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러고 나갔다간 얼어 죽어. 옷장에서 아무거나 꺼내서 입고 가.
고양이처럼 발끝을 세운 ㅇ이 옷장 앞으로 달려간다. 쩝. 나는 백병이나 쳐다보고 서 있어야지.
─이거 입어도 돼요?
─아무 거나 입어도 돼. 그런데 여자 옷은 없을 텐데... 거위 털 집어넣은 옷 있으면 그거 입고 나가라. 도로 안 갖다 줘도 되니까 추울 때 입어.
나 같으면 아무 거나 걸쳐 입고 얼른 이 기분 나쁜 곳을 빠져나가 버릴 텐데, 얘는 또 그 중에 나은 걸 고르고 있다. 뭐가 좀... 인생관이 다른 것 같애.
옷 두 벌을 꺼낸 ㅇ이 그걸 내 쪽으로 내보인다.
─둘 중에 어느 게 나아요?
─왼쪽. 물론 내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안 입는 게 제일 예쁘지만.
ㅇ이 키득거린다. 이제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아예 옷장 안으로 들어가 계속 달각거리며 옷을 고르는 ㅇ에게 나는 주절거린다.
─...그리고 앞으로 또 편의점 주인이 짜증나게 굴면, 내가 너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고 그랬다고 해. 안 그래도 지난번 커터칼 사건 때문에 기분이 몹시 언짢아 보이더라고.
할 말이 딱히 있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침실 구석에 콕 박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소리다.
─피, 그런 걸로 겁 먹을 것 같아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머리가 나빠서 오래 기억도 못할 걸요?
정신없이 옷을 고르는 것 같더니 내 말에 대답을 할 때는 옷장 밖으로 빼꼼 머리만 내민다. 아, 귀여워. 오늘 그냥 보내면 오래도록 후회하게 될 것 같은데.
그래도 할 수 없지.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냐?
─음... 저기, 나리. 나랑 잤다고 말하고 다녀도 돼요? 그럼 아무도 나한테 함부로 못할 것 같은데.
─야!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왜 그런 엉뚱한 소리를...
─안 돼요? 흐잉... 아... 아까 목 졸린 데도 아프고... 진짜 무서웠는데...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는 이 신세...
─...그 영주님 댁 도련님이라는 놈은 이제부터 정신 차리고 새로운 삶을 살 계획이지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
─정말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
─아, 또 뭐 그런 걸... 뭔데요?
볼멘소리를 해도 귀엽네.
─그 얘기를 할 때는 항상 두 가지를 같이 얘기해야 돼. 영주 아들이 죄를 뉘우치고 앞으로는 새 사람이 될 거라고 했다는 거, 그리고 네가 마지막이라고 했다는 거. 그게 내 조건이야.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 안 할 거라고.
─사람들이 믿을까요? 나리가 워낙 개차반으로 살아와서...
─야 이 씨...! 그래도 얼굴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히힛. 그치만 저는 사람은 안 바뀐다고 생각해요. 귀족은 끝까지 귀족이고 노비는 끝까지 노비, 뭐 그런 얘기는 아니고요. 나쁜 사람은 끝까지 나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내가 아까 말했잖아. 나 여기 살던 그 놈 아니라고.
─흐음... 잘 믿기지는 않지만, 암튼 시키신 대로 할게요.
─아, 맞다. 그리고 어디 가서 네가 커터칼 휘둘러서 내가 넘어지고 그랬단 얘기 하지 마라. 소문내면 죽는다 진짜. 놀라서 그랬던 거지 쫄아서 그랬던 거 아니거든? 너도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그것도 잘 믿기지는 않지만, 알았어요.
드디어 옷을 골라 입었는지 ㅇ이 옷장 밖으로 걸어 나온다. 제대로 차려입었나 싶었는데 고작 낡은 외투 하나를 걸쳤을 뿐, 속에는 아무것도 안 입은 것 같다. 아니 그럴 거면서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아이고. 알아서 해라 이제. 모르겠다 나도.
─신발은 저기 있는 거 아무거나 신어. 발에 맞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무거나 다 괜찮다고 했는데 굳이 슬리퍼를 꺼내 신는 이유는 뭐지? 이상하게 쳐다보니까 한 마디를 한다.
─...치수가 안 맞아서요.
맘대로 하렴. 화장 하나도 안한 민낯이 싱그럽다. 눈이 토끼눈처럼 붉다. 왜 옷장 안에 그렇게 오래 들어가 있었던지 알겠다. 들킬까봐 그 안에 들어가서 울었던 건가.
응? 잠깐만. 그럼 옷에다 코 닦았을 거 아니야? 하아... 내 죄가 크다...
─그럼 잘 있어요, 나리.
씩씩한 척하긴. 가슴 한 구석을 사포로 문지른 것처럼 쓰리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온다.
─잘 가. 꼬맹아. 가급적이면 우리 다시는 얼굴 안 보는 걸로 하자.
─그래요 우리. 별로 보고 싶지 않을 것 같네요.
─...아까 일은 정말 미안하다. 참, 네 언니 얘기는... 언제 해줄 거야?
ㅇ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그건... 나중에 들려드릴게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과는 모순이 되는 말이지만, 정말 끔찍한 일을 당했던 건지도 모르는데 마냥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아까 왜 나를 때리려다 만 거야? 라고 묻고 싶지만... 그것도 엄두가 안 난다.
둘 다 말이 없다. 하여간 이 도련님이라는 놈 진짜... 최고 나쁜 놈 같애. 물론 두 번째로 나쁜 놈은 작가 놈이고. 이게 뭐야, 대체? 이틀 연속으로 침실에 미인이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못했잖아.
그래도... 악당들이 미인 잡아다가 최음제 먹이고 잘 문질러 놓으면, 갑자기 주인공 나타나서 싹 다 죽여 버린 다음에 날름 주워 먹는, 그런 무협지 식 사건들보다는 좀 낫다. 나는 최소한의 양심은 지켰으니까.
아니지. 그냥 미수에 그쳤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한심해. 한심하다. 권력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가? 약자의 고통에 무감해지는 거.
그런데 왜 얘는 안 나가고 머뭇거리기만 하는 거지?
─...나리. 그런데 밖에서 군인들이 저 잡으면 어떡해요? 통행증 같은 거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 그러네? 그런데 지금 당장 만들어 주기는 좀 그러니까... 이 방에 있는 거 아무거나 가지고 나가서 보여줘. 그래도 뭐라고 그러면 내 방 인터폰으로 전화해보라고 해.
─그럼... 저거 가지고 나가도 돼요? 만약 못 나가게 하면, 저거 보여주고 보내달라고 하게요.
기념 삼아 놔두려던 화살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건 조금... 곤란해질 것 같은데...? 그런데 다른 거 뭐 줘서 보낼 만한 게 영 안 보인다. 커다란 칼을 들려서 보낼 수도 없는 거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ㅇ이 하는 말을 거절하기가 어렵다.
─...그래, 가져가.
내게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얼굴을 내보이며, ㅇ이 화살 한 대를 집어 든다. 그리고는 익살스러운 동작으로 구십도 인사를 한다. 집에 간다니까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나도 마음 언저리가 얼마간 맑아지는 느낌이다. 한 차례 고비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뭐. 이 정도면 선방한 거 아니야? 진짜 악당이 되진 않았잖아.
─나리. 저 진짜 가요.
저 소리 두 번만 더하면 백 번째인 것 같은데?
─오냐. 잘 가라.
예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또 미련이 생길 것 같다. 일부러 과장된 동작으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아예 등을 돌려 버린다. 좀 자야겠어. 침실 문을 닫지도 않고 거실로 걸어 나가는 ㅇ의 가벼운 발걸음이 귓가를 간질인다.
그나저나 편의점주인 이 새끼 언제 한번 조져놔야 되겠는데. 밥 먹는 애를 때려? 혹시 강간한 적도 있는 거 아닐까? 상상조차 하기 싫다. 이 개새끼...! 저렇게 착한 애를!
소리죽여 화를 삭이는데 갑자기 ㅇ의 슬리퍼 소리가 뚝 멈춘다. 어제 예비역 노인들이 떨어뜨린 철문 앞인 것 같은데. 문이 아예 떨어져나간 자리인데 왜 거기서 멈춘 거지?
─나리... 저기요...
─야, 안 나가고 뭐해? 빨리 가라. 나 마음 바뀌기 전에.
─여기 좀... 와보셔야 할 것 같...
응? 피곤해 죽겠는데 또 뭐래? 침실에서 거실로 걸어 나간다.
─뭐야? 졸려 죽겠는데...
어억? 이게 뭐야? 놀라서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다행이다.
떨어진 문 밖에 승혜가 서 있다. 고작 한 걸음 밖에서, 거실 안에 있는 ㅇ과 나를 넘겨보고 있는 거다.
아니, 어째서?! 아 이런 씹할! 이거 꿈인가...? 이 늦은 시각에? 대체 왜?!
...이 비열한 작가 새끼...! 아까 환영식장에서 연구소장이 승혜 말고 적합한 사람 찾아서 보내겠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이 새끼 분명히 노리고 있었던 거야!
승혜가 서 있다. 아까 활터에서 내가 준 화살을 손에 든 채다. 설마 저걸 돌려줄 생각으로 몰래 여기까지 온 건가?
승혜의 숨이 거칠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너, 너어...! 뭐야, 이 미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ㅇ이 나를 돌아본다. 그렇게 쳐다봐야 소용없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아... 있잖아, 승혜 씨. 이거는 내가 설명을 해줄게. 오해할 만한 상황이라는 건 나도 알아. 아는데,
짜악!
말을 맺지도 못했는데 뺨 때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ㅇ이 바닥에 풀썩 쓰러진다. 아니 밑도 끝도 없이 때리고 보면 어떡하냐? 한 방에 보내네? 이거야 애초에 체급이 다르니 뭐.
뺨 때린 걸로 성에 안 차는지 곧바로 달려들어 외투의 멱살을 잡아 고개를 들게 한다. 뭐하는 거야! 머리끄덩이 안 잡은 게 다행이네.
─잠깐만, 승혜 씨! 이러지 말고 내 말을 좀...
팔을 붙들어 보지만, 한 번에 확 뿌리친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알짱거려? 이 개 같은 니은...! 네 엄빠 다 찾아다가 죽여 버릴 거야!
어허. 갑자기 왜 이래? 막장드라마라니! 아 나 지금까지 시청해본 적도 한 번 없는데 막장드라마라니!
얼마나 화가 났는지 분을 못 이기고 울음까지 터뜨린다. 물론 내가 크게 잘못한 건 없지만, 일단 ㅇ 옆에 무릎을 꿇고 설명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타이밍이 안 나온다.
아 얘 무서워. 뭐야 진짜?
─쇠... 쇤네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아씨. 제발 목숨만...
뭐라고? 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나한테는 할 말 못할 말 다 하더니 갑자기 왜 이래? 설명을 해줘야지 이 등신아! 네가 그러고 있으면 둘 다 곤란해진다고!
─승혜 씨! 일단 진정하고, 내 얘기를 들ㅇ...
─아악! 아파요, 아씨!
기어이 머리끄덩이를 잡는구나. 길지도 않은 머리채를 잡고 침실로 질질 끌고 들어간다. 혹시 프로레슬링을 배웠나.
─너 뭐 했어, 여기서! 똑바로 말해!
─아씨...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이 손 좀...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은 승혜가, 아니 손을 놓았다기보다는 ㅇ의 머리를 바닥에 팽개친 승혜가 울면서 소리를 지른다. 밖에까지 들릴까봐 나는 서둘러 침실 문을 닫는다.
─거짓말을 해?! 지금 장난 같냐? 내가 만만해 보여? 산 채로 썰어버릴 거야, 너어! 아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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