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천사
맨살에 닿는 느낌이 예술이다. 꼭 간지럽지 않을 만큼만 보들보들하고... 매끄럽고 따뜻... 어제도 야밤에 터진 사고 때문에 완전 쫄렸었는데 여기 눕자마자 스치듯 잠들어 버렸지.
잠깐만. 따뜻하다고? 이거 이상하다? 이불 속에서 뭔가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잖아. 뭐지, 이거? 발로 슬쩍 건드려 본다. 종아리 언저리로 와락, 뭔가 뜨거운 게 만져진다. 매끄럽게 반들반들하며 뭉클하기도 한... 이건 이불이 아닌데? 이렇게 미끄덩한 이불이 세상에 어디 있어.
혹시 핫팩? 문짝 떨어뜨려서 냉기가 들어오니까 그게 미안해서 춥지 않게 자라고 넣어둔 건가? 아니지. 설마 핫팩 챙겨준다고 집어넣다가 침대에다 토한 건? 황급히 이불을 허리 아래까지 들춰본다.
뭐야, 이건? 으앗! 깜짝이야, 아 이 샤발!
우당탕! 쿵탕!
침대에서 떨어진 것 같다. 불 꺼진 방에서는 보이는 게 없다보니 소리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양탄자가 깔려 있어서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지만, 황망하기가 짝이 없는 상황이다. 후다닥 일어나려고 해봤지만 불은 꺼져 있고 나는 잔뜩 당황한데다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몸에 엮여 끌려 내려온 이불까지 엉키는 바람에 한동안 허우적댄다.
심장이, 뚜껑을 잘못 닫아서 증기가 새는 압력솥처럼 펄떡댄다.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방금 전의 촉감만은 계속 어둠 속에서 선명해진다. 분명해. 사람의 맨살이었어.
기둥과 옷장을 각각 한 번씩 들이받고 난 뒤에야 전등 스위치를 찾아낸다. 아야야야!
가까스로 불을 켠다. 그러자 이불이 걷힌 침대 한 귀퉁이에서, 새우처럼 둥글게 말린 채로 결박된 여체가 드러난다.
편의점녀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 확신이 너무 단단해 나도 놀랍다.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나도 모르겠다. 내 쪽으로는 등을 돌린 채로 눕혀져 있어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당황해서 그런 걸까? 묶인 그녀의 뒷모습이, 마치 날개가 비틀려 땅으로 떨어진 천사 같아 보여 나는 눈을 비빈다.
툭, 무릎이 침대에 부딪치면서 나는 정신을 차린다. 그만큼 침대에 바짝 다가선 거다. 나도 모르게. 팔이 등 뒤로 꺾여 플라스틱 케이블 타이에 양 손목이 묶여 있다(그래서 날개처럼 보였던 건가). 다리도 마찬가지로 발목이 묶였다. 그리고 그 손목과 발목의 케이블 타이는 또다른 케이블 타이에 의해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고작 케이블 타이 세 개 가지고 옴쭉달싹도 못하게 해 놓은 거다. 군대식이네.
피가 안 통할 만큼 세게 조였는지 손과 발 색깔이 푸르스름하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피부는 창백하고 희다. 묶인 곳을 풀 생각은 하지 않고, 묶이지 않은 곳을 그저 넋 놓고 바라보다가 곧 죄책감에 고개를 돌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 하도 당황하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한동안 정말 동상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꺼낸 말이 이거다.
─...저기요. 그거 풀어주면 나 때릴 거죠?
내게 등을 돌리고 있던 그녀는 몸을 뒤틀어 내 쪽을 돌아보려고 하지만, 여의치가 않은 모양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자, 그대로 고개만 틀어 천장 쪽으로 돌리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래요? 때리시겠다? 어제 아침 댓바람부터 칼 휘둘렀던 때마냥?
얘 조금... 머리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아니면 정말 미친 게 맞는 거든지. 아니,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 매 맞을 걸 뻔히 알면서 내가 널 왜 풀어 주겠냐?
어? 이제 보니 입에 재갈도 물려있네. 그래서 소리도 못 내고 있었던 건가.
─그러면... 입에 물린 거 풀어드리면 소리 지르실 건가요?
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아... 고민이 깊어진다. 안 그래도 문짝 떨어져 나가서 방음도 안 되는 판에, 찢어지게 비명 지르면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 다 깨서 여기로 달려올 텐데? 이틀 연속으로 개망신 확정?
─잠깐만요.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일단 저는 안 건드릴 테니까 여기서 좀 주무세요. 저는 거실에서 자도 되니까요.
옷을 챙겨 조용히 거실로 걸어 나온다. 주무시기 좋게 아예 불까지 꺼주지. 소파에 앉아서 옷을 입고 나니 그제야 진도 8.0 수준으로 뒤흔들리던 마음이 간신히 진정된다. 이불이라도 덮어주고 올 걸 그랬나 싶어지지만, 왠지 또다시 들어가기는 좀 뭐하다.
그럼 아까 대대장이 재미있게 놀라는 게 이거였나? 퍽이나 재미있겠다. 놀라서 기절 안한 게 다행이구만. 미리 좀 얘기를 해줬으면 좀 덜 놀랐을 거 아니야?
저 인터폰 어떻게 쓰는 거지? 전화해서 항의라도 해야지 이거... 아무리 신분제 사회고 영주 아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물건 던져놓듯이 던져놓고 가면 어쩌자는 거야 정말? 이런 고마운 사람들 같으니라고...
응? 내가 무슨 소릴?
잠깐만, 그러고 보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고마운 상황일 수도 있잖아? 안 그런가? 당장이라도 연예인 뺨따귀를 후릴 수 있을만한 미인이 내 침실, 그것도 침대 위에 누워있는 거잖아. 더군다나 실오라기 한 올도 안 걸친 채로.
마음이 진정되나 했더니 다시 미친 소처럼 날뛰기 시작한다. 아니 그런데... 안 건드릴 테니까 안심하고 자라고 했던 게 방금 전인데 어떻게 한 입 가지고 두 말을 하냐고.
쿵!
깜짝이야! 침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우웁! 우우우웁!
응? 뭐야, 이건? 몸이 자동으로 침실을 향해 움직인다.
이건 마치... 침실로 다시 들어갈 구실만 찾고 있었던 것 같은 몸놀림인데?
아니, 나는 무슨 안전상의 문제라도 발생한 게 아닌가 싶어서 들어가는 거라고. 그 정도는 괜찮잖아? 어디까지나 보호차원에서!
아 나 진짜 왜 이러냐.
불을 켜자마자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온다. 어억! 저러면 다 보이잖아. 차마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린다.
응? 잠깐만. 괜찮은지 보려고 들어와서 아예 안 쳐다보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너무 노골적으로 노려본 걸까. 편의점녀가 후다닥 몸을 바닥에 붙여 가릴 곳을 가린다. 쩝. 분위기가 아주 어색해진다.
독해하기 어려운 상황은 아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게 된 것일 테고, 고달픈 지경에 빠지게 되니까 달리 방도가 없어 내게 도움을 청한 거겠지.
목을 뒤로 젖혀 고개를 들고 애처로운 눈빛을 보낸다. 나 떨어졌어요, 아파요.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재갈 풀어주면 소리 지를 거라면서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소리는 안 지르겠다는 건가. 재갈을 풀어주려고 손을 내다가 멈칫한다.
─...풀어주면 쌍욕할 거죠?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후우... 아까는 머리가 나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이 정도면 머리가 보통 나쁜 게 아니라 아주 많이 나쁜 거다.
나로서는 말없이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도로 불 끄고 나갈까? 아니야, 그래도 잠시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녀도 고민이라는 걸 할 줄 안다면 말이야.
고민하던 편의점녀가 고개를 젓는다. 도리도리. 그럼 일단 믿고 재갈을 풀어 볼까.
아, 진짜 어지간히 세게 묶어놨네. 재갈이 풀리자 편의점녀가 푸하, 하고 막혀있던 숨을 내쉰다.
그와 동시에 나도 숨이 턱 막힌다. 이럴 수가 있나. 그저 재갈이 풀리며 드러난 얼굴을 바라본 것뿐인데. 갑자기 숨이 차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연예인 실물을 직접 보면 뒤에서 후광이 비친다느니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되, 그게 다 말 많은 사람들의 괜한 호들갑일 거라고 믿어왔던 나에게는 대단한 충격이다.
이렇게 예쁜 얼굴을 본 건 난생 처음... 아니구나. 계모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 본 게 바로 몇 시간 전 일이다. 계모처럼 콧날이 과히 높고 날카로운 편은 아닌데, 눈꼬리가 조금 치켜 올라가있어 약간 성이 난 듯한 느낌을 준다.
계모처럼 단정하고 도도하면서도 차가운 느낌과는 정반대다. 계모처럼 화려하게 예쁜 건 아니지만... 뭐랄까, 한쪽이 온실의 장미라면 이쪽은 사막의 들꽃?
정확히 어느 구석에서 나오는 건지는 모르지만 퇴폐적인 아름다움도 풍긴다. 하얀 피부 때문일까? 건강한 살빛은 아니잖아. 약간 병적인 느낌? 그러나 어찌 됐든 잡티 하나 없는 저 피부는 정말 대단하다.
턱이 작고 입술이 붉다. 마치 피를 발라둔 것처럼. 그 예쁜 눈코입이 내 손바닥보다 조금 넓은 얼굴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거다.
─...나리, 나리. 나 밥 좀 줘요...
욕이 안 튀어나와서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밥 달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줄은...
─그런데 풀어주면 나 때릴 거라면서요?
─야이 씹샊... 아니, 그... 안 때릴게요. 정말이에요.
하하하하. 참나. 네가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나까지 병신으로 보냐 지금?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 걸음 물러서니까 얼른 부언을 한다.
─나리, 제발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배고파요, 배고파요. 배고프다고요! 먹을 거 주시면 시키는 거 다 할게요.
...저, 정말? 내가 뭘 시킬지 어떻게 알고? 시킬 일이라는 건 그러면...
뭐, 뭐, 뭐를 시키면 좋을까? 갑자기 이상한 상상들이 왈칵 흘러넘친다. 생각은 정리가 안 되는데 몸은 허둥지둥 케이블타이를 자를 도구를 찾고 있다.
아하. 나 병신 맞구나. 얘가 정확히 꿰뚫어본 거야.
그렇지만... 풀어줬다가 소동이라도 일으키게 되면 나는 아버지에게 딴 점수를 다 잃게 되는데? 냉정하게 생각하자.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을까. 일단 거실에는 먹을 게 차려져 있으니까 어디다 음식 가져다 달라는 소리는 안 해도 될 거고.
─으으... 그거, 그거!
음식상을 가져다 눈앞에 놓으니 잔뜩 흥분한다. 몸을 옆으로 일으켜 세우고 몸부림을 친다.
으악! 바로 눈앞에서 흔들린다...! 정말 잠시 후면 저 몸을 내 마음대로...? 그러나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체구가 워낙 작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름다워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지금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형 같다.
후욱!
애써 호흡을 다잡는다. 까딱 잘못하면 이성을 잃을 것 같다.
─이거... 원래는 내가 먹으려던 거였는데, 말썽 안 피운다고 하면 특별히 그쪽한테 줄게요. 손목발목도 풀어줄 건데, 만약에 소란 피우고 그러면, 아까 그 무서운 사람들 불러다가 혼내주라고 할 거예요, 알았죠?
─네! 나리! 알았어요, 알았어요.
생각 같은 걸 하지도 않고 대답이 다급히 떨어진다. 나도 서둘러 케이블타이를 끊을 도구를 찾는다. 니퍼 같은 게 있었으면 좋을 텐데. 거실에 장식되어 있던 작은 단검을 집어 든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