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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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채우는 일이 점점 미안해진다.
─세상 참 재미있지 않냐? 전공을 세우고 권력에 다가가려고 정략결혼을 했는데, 결국 그로 인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손바닥만 한 영지조차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거야. 게다가 이 결혼에서 가장 비참한 부분은 아직 남아 있지. 너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말았다는 거다.
이대로 잔을 비워둬도 혼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워두자.
─그러나 나한테는 너뿐이다. 물론 네가 매일같이 사고치고 돌아다닐 때는, 차라리 이번 놈은 죽여 버리고 새로 하나 낳을까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예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거 말씀 정말 섭섭하게 하시네, 거!
─야. 나도 인간이라고! 네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가만히 있어도 다 귀에 들어와 인마! 네가 오늘부터 정신을 차리겠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 말도 다는 못 믿겠다.
하아, 한숨 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네. 참으로 돈독한 부자관계다.
─내가 이 성에 얼마나 많이 신경을 쓰고 있는지, 또 그게 누구 때문인지 너라면 알고 있을 거다. 그렇지 않으냐?
자연히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 아버지도 같은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복잡하고 위험한 여자다. 처음에는 철모르는 소녀 흉내를 내더니만, 혼담이 오갈 무렵에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얼굴을 바꾸고, 돈줄을 다 틀어쥐게 된 뒤에는 본색을 드러내더구나. 아니, 예전과 변함없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내가 민낯을 들여다 본 거라고 해야할까. 혼인휴가 끝나고 부대로 복귀하자마자 수술을 했다. 비밀리에 말이야.
무슨 수술이요? 설마 그...?
─예에?!
─쉿. 조용히 해 인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네가 한창 개차반 짓을 하고 다니던 때였지. 네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곤 했다. 그 여자도 그런 내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더구나. 그래서 나도 노력하는 척을 해온 거다. 아마 내가 나이 들어서 그런 거라고 알고 있을 테지. 요즘 들어 검사를 받아보자는 소리를 하는데, 자존심을 구실로 무시하고 있는 처지야.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흥. 그러니까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저 여자에게 아이까지 안겨 줘선 안 돼, 절대로. 그랬다간 이 성은 먹힌다. 이곳은 내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평생을 바쳐 일궈낸 영지야. 누구에게도 내줄 수 없다.
말 끝에 칼 같은 결기가 담겨 있다.
─전쟁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느껴져. 놈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그 말에 단단한 확신이 들어차 있어 나는 도리어 당혹스러워진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방금 전 저한테는 완전 반대로 말씀하셨었잖아요.
─그런데 전쟁 끝난 뒤가 문제다. 논공행상의 날들이 찾아올지, 아니면 토사구팽의 날들이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나는 미리 대비를 해뒀으니까.
아버지가 또렷해진 눈으로 내 눈을 노려본다.
─어쩌면... 너는 젊은 시절의 내가 그랬듯 그저 여기서 도망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그때와는 모든 게 달라졌어. 그런 식으로 뭔가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황이 아닌 거다.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면, 너는 여기 있어야 돼.
아버지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나는 너를 믿는다. 알고 보니 네가 아예 생각 없는 멍청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너를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야. 오늘 보아하니까 어쩌면 너도 모든 것을 숨기고 은밀히 노력해왔던 게 아닌가 싶더구나. 이제부터는 네 생각에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라. 너와 나에게 이로울 거라고 믿어지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너한테 내 여섯시 방향을 맡긴다.
─...그럼 저도 아버지께 제 열두 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말주변이 늘었구나. 그래. 후방에서 꿀 빠는 게 네 일인 거야. 그렇지만 곧 네가 해줘야 할 일이 한 가지 생길 텐데... 사실 이번 휴가에는 이걸 확실히 해서 너한테 알려주고 싶었다만, 일 돌아가는 게 여의치가 않더구나. 그렇다고 지금 말해주기는 좀 그렇고... 이게 워낙 기밀에 속하는 사항이기도 하지만, 미리 말했다가 만의 하나 일이 성사가 안 되기라도 하면 너나 나나 우스워지는 거니까.
─정해지면 언제든 말씀만 해주세요. 뭐든지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빈 잔을 들어올린다.
─그럼 한잔 따라 봐라. 좋은 날이잖냐? 근데 너 진짜 안 마실 거냐?
─금주하겠다고 말씀을 드린 게 방금 전인데 얼마나 지났다고 또 술을 마시겠어요?
─이 새끼는 어떻게 된 게 날이 갈수록 말을 안 들어? 한 잔쯤 더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인마.
─남자가 어떻게 한입 갖고 두말을 하겠습니까.
─그래? 그럼 이렇게 물어보면 되겠네. 그냥 그 잔에 얌전히 받아 마실래, 아니면 냉면그릇 다시 채워서 마실래?
─...잔으로 주셔야죠.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핥아먹겠습니다.
챙, 처음으로 부자의 잔이 부딪친다.
─아참, 내가 방금 얘기한 일하고는 별개인데, 네가 여기서 해줄 일이 하나 더 있다.
아버지가 한 모금에 잔을 비우더니 뜸을 들인다.
─예, 뭔데요?
나도 잔을 입에 가져간다.
─만일 네 계모에게 애가 들어서면 다 잡아다 죽여라.
푸훕!
술을 뿜고 만다. 아버지는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팔을 슥 치운다.
─콜록! 콜록! 그... 게 무슨...! 콜록!
─또 순진한 소리 하고 앉았네. 나는 오래 전에 정관수술을 받았다고. 일이 그렇게 흘러가면 반드시 죽여 놔야 돼. 네가 직접 지휘하고 보고해. 부대 복귀하기 전에 예비역들한테도 언질을 해둘 테니까.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춤추고 있는 자들을 향해 쩌렁쩌렁하게 소리 지른다.
─좋아! 아침까지 마셔보자고!
모두들 잔을 들어올린다. 덩실덩실. 아... 저 무브먼트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네.
─마시고 죽자! 크하하하하핫!
무서운 밤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
아침까지 좋아하시네. 아직 자정도 안 된 것 같은데 전원 사망이다. 하긴 해 떨어지기 전부터 마셔댔으니 술 마신 시간만 가지고 보면 밤을 샌 거나 다름없을라나.
다들 테이블에 엎어져 있다. 기세 좋게 달리던 아버지도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곯아 떨어진지 오래다. 술에 약이라도 탄 거야, 뭐야?
하긴 정말 독한 술이기는 했지. 어휴, 다리가 다 후들거리네. 그래도 멀쩡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뒷감당은 내 몫이로구나. 애고.
─도련뉘임~ 헬헬헬헬...
대대장이 천천히 다가온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그런 게 아니고, 발걸음이 흔들거려서다.
─이제 쉬셔야지요... 딸꾹! 제가 침소까지 모시... 겠습니다. 히! 하.
영기 옹 역시 얼큰하게 취해있다.
─저희가! 침소까지! 후아, 마시겠습니다!
정말 더 마실 수 있는 걸까. 그대로 스르르 무너져 내린다.
─제가 모셔다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기 정리부터 하고요. 저기요! 이제 다들 드신 것 같은데 이쪽부터 치워주세요. 빨리 정리 끝내셔야 쉴 시간이 생기실 것 같은데.
피곤에 찌든 작은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가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응? 왜들 그러지?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내게 쭈뼛거리며 다가온다.
─나리, 그렇지만 이 분들을 어떻게 숙소까지 옮겨드려야 할지... 저희 인력은 많지도 않고 보시다시피 다들 지쳐 있습니다.
아하. 여기저기 널브러진 예비역 노인들을 숙소까지 데려다줘야 하는 문제가 있구나. 확실히 이 인력 가지고는 무리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연극이니 음악회니 하는 오후행사도 한참 전에 끝났을 건데. 그쪽 인사들은 코빼기도 안 비치네.
에이, 안 오는 게 속 편하지. 술 취해 패싸움이라도 나면 골치 아파지니 뭐. 그런데 이 양반들을 어떻게 옮기지? 답이 안 나오네.
─일단 음식이랑 테이블부터 정리해주시고요, 침낭 가져다가 이분들 여기서 주무시게 하면 될 것 같네요. 깨어나면 알아서들 복귀하시겠죠.
─...하오나 내일 아침식사를 이곳에서 해야 하는데...
─아, 내일 아침은 준비하지 마시고 그냥 푹 쉬세요. 며칠 철야하셨다면서요. 와서 뭐라고 하는 놈 있으면 제가 시켰다고 하시고요.
─...감사합니다, 나리.
고개를 꾸벅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진다. 다들 분주히 움직인다.
─근오야, 근오야! 자냐? 잠깐만 일어나봐. 너 술 안마셨지? 나 좀 도와줄래?.
─...우웅... 졸린데용...
너어? 그런 안 어울리는 짓 좀 하지 마.
졸리다며 칭얼대면서도 근오는 내가 시키는 대로 예비역 노인들을 하나하나 침낭으로 포장한다.
그런데 진짜 힘이 더럽게 세다. 그냥 거구도 아니고 술에 취해 축 늘어져버린 노인들을 별로 힘도 안 들이고 옮기네? 어른 되면 정말 무섭겠어.
이걸 다 어떻게 정리하나 싶었는데 곧 끝날 것 같다. 큰 소리도 내지 않고 주변 이렇게 빨리 정리하다니 놀랍다. 근오랑 같이 잠자리를 만들고 있는데 책임자가 다시 내 앞에 와 선다.
─나리. 저쪽에...
응? 아, 이제야 나타나신 건가? 칼 찬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난 계모가 내게 인사를 한다. 고개만 까딱.
─도련님.
─오후 행사가 잘 마무리된 모양이지요. 다행입니다. 보시다시피 이쪽도 끝나가는 분위기예요.
─네, 저는... 영주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수심 어린 얼굴이다. 긴 속눈썹과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마치 내 허락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양손을 배 앞에 모아 쥐고 있다.
그런데 저 길고 흰 목 언저리에서 도저히 눈을 못 떼겠다. 이제까지 봐온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선이다. 이 곡선의 아름다움은, 호수 위를 미끄러져 나가는 우아한 새에 비유하는 것조차 미안해질 정도로 아찔하다.
문득 아들 뻘인 나에게까지 존대를 해야 하는 신분의 벽이 가련해진다. 뭔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잘못했네. 휴가 왔으면 회포부터 푸셔야지. 세상에, 나 같이 쓸모없는 아들 녀석이랑 시간이나 보내고 말이야.
경계해야 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시선을 강탈당한다. 입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잔주름 하나가 들어서지 않은 얼굴이다. 누가 저런 자태의 미인을 장성한 아들의 어머니로 볼까. 어느 시대 어느 곳에 태어든 간에 누구든 넋을 놓고 쳐다볼 정도의 미모...
쿠당! 앗, 깜짝이야.
─영주밈! 저가 모스겠스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척인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거다. 나는 괜히 천둥소리에 놀란 아이처럼 조마조마해진다. 나 이상한 생각하지 않았어! 이상한 생각했던 거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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