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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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채와 환호를 갑옷처럼 두른 녀석이 내게로 다가온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싱그럽게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저는 두 순을 쏴서 모두 적중시켰습니다. 한번 쏴보시겠습니까, 도련님?
아니, 별로.
지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네 아구창을 한 번 더 돌려놓는 건데요.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여기다 또 이벤트를 파놔? 산 넘으니 또다시 산이다. 이 씹새끼.
유송이 마이크를 놓고 내게 걸어온다. 활을 하나 들고 있다.
─활은 준비돼있습니다.
아 이 쌍놈새끼들 진짜. 점점 더 마음에 안 드네.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더니만 유송은 관중석을 바라보고 박수를 유도하는 손짓을 한다.
그렇지만 계모아들이 화살 열 대를 다 꽂아 넣었을 때보다 더 큰 박수와 환호가 쏟아지자 이내 그치라고 손을 가로로 긋는다. 웃기는 새끼네.
유송이 내미는 활을 멋모르고 받아들 뻔하다가 겨우 손을 물린다.
내가 미쳤냐? 활에다 무슨 짓을 해놨을지 알고? 대신 계모 아들이 들고 방금 전까지 쏘고 있던 활을 홱, 낚아챈다.
─이걸 쓰는 게 낫겠네요.
빼앗아들고 보니 잘한 일 같다. 유송이 주는 활은 믿을 수 없고, 대대장이나 영기 옹 활을 빌린다면 아마 줄을 당기지도 못할 거다. 아마 이 새끼가 제일 좋은 걸 가지고 쏘고 있었겠지.
과녁은 사로를 반으로 자르고도 더 가까운 곳에 놓여있다. 아마 저 거리는 제 놈이 실수 없이 맞출 수 있으되 나는 맞추지 못할 거리를 계산해 옮기고 또 옮기고 시험한 것일 터다.
아 근데 이건 뭐가 이렇게 생겨먹었냐?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국궁장 한 번 놀러 갔을 때 좀 만져보기라도 할 걸. 하긴 열 살 갓 넘었을 무렵이었으니 만져봤어도 별다를 건 없었겠다. 일단 빈 활이라도 당겨볼까?
강성이 조금 센 활인 것 같다는 느낌은 드는데, 그래도 당기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새끼, 조금 힘을 쓰는 편이었네?
아, 아니구나. 오랜 시간 활을 연습해왔을 텐데 이 정도 활을 쓰는 거면 힘은 별로인 거다.
그런데 내가 줄을 당겨보고 있으려니까 계모아들이 배를 잡으며 낭랑하게 웃는다. 관객들 중에도 따라 웃는 사람들이 있다.
뭐, 이 새끼야? 왜 처웃고 지랄이야?
─하하하하. 깍지는 끼고 쏘셔야죠, 형님.
깍지? 그게 뭐지?
아, 손가락에 뭘 끼고 쏘던가? 아버지가 활을 쏘던 기억이 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활시위를 당기는 손 엄지에 무슨 반지 같은 걸 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깍지라고 하는 모양이다. 근데 아까는 도련님이라더니 이제는 은근슬쩍 형이라네?
근데 어쩌냐, 나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거든?
─활을 빌려드리는 김에 깍지까지 빌려드리겠습니다.
달라고도 안 했는데 무슨 반지 같은 걸 내 손에 쥐여 주더니 또 박수를 이끌어낸다. 관대한 척 하는 건가.
모르긴 몰라도 비싼 물건인 건 같기는 하네. 고맙다, 이 아름다운 새끼야.
─와... 이거 고마워서 어쩌지? 참, 아까 맞은 데는 좀 어때? 아플 것 같던데.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어.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될 걸? 다음에는 이빨도 나갈지 모르니까.
만면한 웃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눈이 가늘어진다. 어지간히 기분 더러워진 모양이다. 흐하하.
그나저나 어느 놈 대가리에서 나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건 정말 비열한 짓거리다. 아까 비무원에서 당한 개망신을 만회하고 싶었다면, 본인이 노력해서 잘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되는 거다.
그게 정석이라고. 이런 식으로 함정 파놓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그 반사효과를 노리는 건 어떻게 봐도 잘못된 게 맞다.
─깍지는, 엄지에 끼우시고 이렇게 시위를 당기시면 됩니다.
진영이 내 앞에서 활 당기는 포즈를 몇 번 취해 보인다. 그러는 동안 유송은 내 연습용갑옷 허리띠에 화살을 꽂아주고는 친절하게 내 등을 떠민다. 이건 뭐 소매치기 당한 기분인데? 하나는 바람잡이, 하나는 행동대원.
왜 이렇게 자상하게 구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대대장과 영기 옹이 내게 도움을 주는 걸 몸으로 막아서려고 붙어선 것 같다. 진짜 가식 쩌는 인간들이다.
결국 얼떨결에 사로에 서고 만다. 뭘 어디에 끼우고 어떻게 당겨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이건 뭐, 먹는 거야?
등 뒤를 돌아보며 깍지라고 내게 준 물건을 앞니로 살짝 문다.
달각!
그런 내 얼굴이 스크린에 비춰지자 사람들이 와아, 웃음을 터뜨린다. 일단 허리춤의 화살을 빼서 살펴본다. 그런데 화살 끝에 진짜 화살촉이 달려 있다.
오오, 이건 뜻밖인데? 이렇게 해 놓으면 과녁에 꽂아 넣었을 때 빼기가 어지간히 어려워질 텐데. 혹시 박힌 화살을 수월하게 빼낼 수 있는 신소재로 과녁을 만든 건가?
화살을 시위에 올린다. 화살을 땅에 떨굴 뻔하다가 간신히 잡아챈다.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려 있다. 아직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숨쉬기가 어려워진다.
녀석은 엄지로 당기라고 했지만, 일단 검지와 중지로 시위를 잡아본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는 깍지에 활시위가 닿을 때까지 당긴다. 그렇게 센 활은 아니라서 충분히 당길 만하다.
그런데 내 자세가 그렇게 이상한가? 관중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아이고. 그래, 웃어라. 웃어.
사로를 반절 이상 잘라먹거도 더 들어와 있는 과녁을 바라본다. 열 대의 화살이 작은 원 안에 가지런히 들어가 있다. 팽팽히 당겨놓은 시위를 놓지 않고 천천히 원래대로 돌린다.
관중들이 웅성댄다. 사로 올라간 놈이 화살 쏠 생각은 않고 그냥 활시위만 당겼다가 풀었으니 뭐. 입에 문 깍지를 빼내 손에 쥔다.
그리고 돌아서서 과녁을 등지고 아버지가 앉아있는 본부석 쪽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송구스럽지만! 못 하겠습니다! 과녁이 너무 가깝습니다! 애들 장난이 아닌 다음에야! 저런 걸 쏴 맞춰봐야 치욕이 될 뿐입니다!
켈록. 오랜만에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한 번에 가 버리네.
진영과 유송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뜬다. 표정이 없지만 손의 움직임을 볼 때는 분명히 초조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옆에 앉아 있는 계모의 얼굴을 살피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대장과 영기 옹 역시 적잖이 불안해하는 얼굴이다.
─하오니 과녁을! 뒤로 더 물려주십시오!
아버지는 미간을 찡그리고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즉시 행사진행요원들이 화다닥, 사로를 향해 뛰어나간다.
과녁이 있는 곳까지 뛰어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작은 사람들은 과녁 언저리에서 우왕좌왕하고만 있다. 하긴 난감하기도 할 거다. 과녁을 얼마나 뒤로 물려야 하는가. 간단한 것 같지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아까 자리배치 때문에 흥분한 영기 옹이 내뱉었던, ‘하루살이 같은 새끼들’이라는 욕이 아마도 저 사람들의 형편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말일 거다. 저들에게는 결과가 중요치 않다. 그저 누구에게도 밉보이지 않으면서 시키는 일을 해내는 것만이 중요한 거다. 가엾고 딱한 처지다.
과녁을 뽑아 여럿이서 들더니 어정쩡하게 뒤로 물러나 내 눈치를 살핀다.
─너무 가깝습니다!
과녁이 더 뒤로 물러나다가 다시 멈춘다.
─아직도 가깝습니다!
두 번을 더 물린 뒤에야 과녁은 사로 가장 끝자락으로 옮겨진다. 풀이 자란 상태를 볼 때 과녁이 원래 있던 자리는 아마도 그곳인 것 같다.
멀쩡한 다른 과녁들이 거기 서 있으면 과녁을 가까이 옮겼다는 게 더 부각될 테니 죄다 뽑아다가 어디다 치워버렸겠지.
─대대장님. 이제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는데요?
─예! 분부만 하십시오, 도련님.
유송이 치고 들어온다.
─하오나, 도련님. 비무라면 몰라도, 활을 대신 쏴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대대장이 대신 말을 받는다. 말에 가시가 돋쳐있다.
─과녁을 코앞까지 옮겨놓고 쏘는 건 괜찮고, 대신 쏘게 하는 건 안 된다는 건가?
영기 옹도 지지 않고 험한 소리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점잖게 손으로 제지한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해가며 유송에게 말한다.
─누가 그런다고 했습니까?
유송은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이고 뒤로 물러난다. 그와는 달리 대대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내게 바싹 달라붙어 속삭인다.
─도련님, 대신 쏴달라고 하실 거 아니었어요?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저기, 본부석 옆에 장식용 월도月刀 있죠?
─예, 그런데요?
─저걸 최대한 멀리 던져서 땅에 꽂아주실 수 있나요?
─예? 그야 어렵지 않지만... 왜 그러시는지는 좀...?
─저도 이벤트 한번 해보려고요, 임팩트 있게. 도와주세요.
─끄응... 알겠습니다.
본부석에 가서 날이 없는 커다란 월도를 들고 온 대대장이 몸도 안 풀고 도움닫기를 한다. 장식용이라 그런지 더 큰 것 같은데.
─워리얍!
쐐애액! 콰악!
세상에. 저 무거운 걸 저기까지 날려? 모르기는 해도 무게가 꽤 나갈 텐데. 언뜻 봐도 백 미터 정도는 떨어져 있는 과녁 주변으로까지 날려 보낸다. 조준만 정확히 맞았다면 능히
창으로 과녁을 꿰뚫었을 수도. 실로 어마어마한 힘이다.
그 어마어마한 기세에 눌려 멋모르고 비명을 지른 관중까지 몇 있었을 정도다. 아직 나는 활을 쏘지도 않았는데, 창던지기만으로도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이 정도 호응이라면, 사로 중간에다 과녁 갖다놓고 활 쏘던 꼬맹이는 이미 깨끗이 잊혔을 거다.
관중들의 반응으로 미루어보건대 여태까지 이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변칙보다는 정석으로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은 게 바로 방금 전의 일이지만, 저쪽에서 더러운 부비트랩을 깔아놓고 나오는데 이쪽에서도 극적효과를 좀 노려야 공평해지는 거 아닐까.
박수와 환호에 한껏 고무된 대대장이 헛기침을 한다.
─허흠! 저 정도쯤이야 뭐 식후 운동거리지요, 허허허. 으허허허! 으하하하하하핫!!!
대대장의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 모습을 본 영기 옹이 다른 장식용 창을 들고 달려든다.
─도련님. 저도 합니까, 저도? 제가 더 멀리 던질 수 있는데.
가만히 고개를 저으니 세상 아쉬운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린다. 자연스럽게 영기 옹과 대대장이 내 뒤에 선다. 자연히 진영과 유송은 내게서 물러나게 된다. 이제 더는 날 건드리지 못하겠지.
과녁 옆의 부드러운 땅에 거꾸로 꽂힌 월도가 우뚝 서 있다. 시위를 매기기 전에 가만히 거리를 가늠해본다. 너무 객기를 부린 건 아닌가. 솔직히 걱정도 좀 된다. 저렇게까지 멀게 잡지는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마침 바람이 멎는다. 하늘도 나를 돕는가. 시위를 당긴다.
퉁! 슈릭!
가벼운 소리를 내며 출발한 첫 번째 화살이 늦겨울 공기를 찢는다.
물론 영 어이없는 곳으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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