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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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세상에 일대다 상황에서 잘 먹히는 검술 같은 건 없습니다. 말이 됩니까? 전쟁터에 기어 나오는 놈들이면 원래 그쪽에서도 잘 치는 놈들만 골라서 내보내는 거예요. 그걸 혼자서 다 썰면 그쪽 애들은 전부 병신들이게요? 둘러싸이면 죽고 포위당하면 전멸당합니다. 성벽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요. 그게 병법의 기본이죠. 설령 그런 해괴한 기술을 쓸 줄 아는 놈이 있다고 해도, 그놈한테도 일대일 상황이 일대다 상황보다는 수월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저도 예전에 검결을 조금 봐서 아는데, 왜검에 저런 검식은 없습니다. 안전한 후방에서 망상을 빚어내 만들어낸 겁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검식이라는 느낌도 있지만 춤 같은 느낌도 좀 난다. 빙글빙글 돌면서 사방에 칼질을 하자, 상대를 맡은 경호대대 대원들이 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미리 합을 맞춘 걸까, 아니면 전력을 다하지 않는 걸까?
그렇지만 예비역들이 그렇게 조소를 보내도, 박수가 터지고 분위기가 고조된다. 신기해서 그런 건가. 대중의 호응은 뜨거워지지만, 그와는 반대로 이쪽 분위기는 얼어붙는다.
─흥! 천것들이 뭘 알겠습니까? 평생 칼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놈들입니다.
아니, 그거야... 천민들은 칼 가진 것만으로도 처벌받는다고 어제 아침에 근오가 그러던데.
─다음은 짚단베기 시범이 있겠습니다!
크하하하하핫!!!
예비역들이 또 웃음을 터뜨린다.
─만만한 게 저거밖에 없겠죠! 짚단은 반격을 못하니까.
─아쉽네! 짚단 대신 나랑 시합 한 번만 해주면 1분 안에 애미 애비 이름 다 까먹게 해줄 수 있는데.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자극할 필요가 있나...?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다. 이 정도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유송은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 내 착각인가?
사방팔방에 놓인 짚단을 다 자르더니, 불붙은 훌라후프를 뛰어넘어 짚단을 베는 걸로 시범은 마무리된다.
예비역들은 못마땅해 하는 것 같지만, 경기장 분위기는 열광적이다. 함성과 박수가 끊이지 않는다.
영기 옹이 소리를 낮춰 중얼거린다. 으르렁대는 맹수 같다.
─뭐, 돈빨로 계속 애들을 불리고 있지만, 저런 식으로 애들 모아놔 주면 저희한테는 고마운 일이죠. 나중에 한 번에 청소하기가 쉬워지ㄴ...
영기 옹이 입을 싹 닫는다.
아 이건 무슨 얘긴가...? 저 오합지졸들 싹 없애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돈이 아쉬워서 놔두고 있는 거다. 이런 말이었을까?
어쨌거나 시범은 성황리에 마무리된다. 내가 다 다행스럽다. 만일 충돌이라도 일어났다면 분위기 정말 ㅈ같아졌을 거다.
진행요원들이 달려들어 시합장에 널린 짚단과 기타 소품들을 정리한다. 그런데 그건 좀 보기가 안 좋네. 너희가 어질렀으면 너희가 치워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잠깐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그 순간 유송이라는 작자가 내 쪽을 흘겨본다.
어... 그게 아닌데? 나는 시범 보일 때 안 웃었어요, 뭐 오해를 하는 것 같네?
유송이 계모아들의 귀에 입을 가져다대고 뭐라고 속닥거린다. 계모아들이 마이크에 입을 가져간다.
─...본 경기 시작 전에, 번외경기가 있겠습니다.
번외경기를 벌여도 괜찮은지 아버지의 의사를 묻지도 않는다. 흘깃 눈치를 살필 뿐이다. 아까 말을 잘랐던 것도 사고가 아닌 것 같다. 아, 저 새끼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왜 저렇게 사람 짜증나게 만드는 거지?
─...그동안 저는, 유송 선생님을 검술사범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그간의 성과를 영주님 앞에서 점검받고 싶습니다. 지금 도련님께 비무를 신청합니다!
역시 젊네. 뭐, 연습을 열심히 해왔으니까 저런 말도 하는 거겠지.
...응? 저요? 나? 이거 뭐지, 갑자기? 나랑 붙자고?
어...어?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칼을 잡아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예비역들의 동요가 내게까지 전해진다.
─도련님. 제 신청을 받아주시겠습니까?
아, 저 개새끼 진짜 마음에 안 드네? 너 아까부터 영기 옹 멘트 가로챌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리고 유송 저 씹새끼는 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야? 정 억울하면 웃은 예비역 아무나 나오라고 해서 맞다이 뜨면 되는 거 아니야?
어허, 큰일이네? 나는 저... 검술이라는 걸 배워본 적도 없고, 어제 운동을 너무 빡세게 해서 컨디션도 안 좋거든? 온몸에 알이 배겨 있으니까 정말 급한 거 아니면 다음 기회에...
그런데 실실 쪼개며 대답을 기다린다는 계모아들의 해사한 상판대기를 보니 왠지 열이 뻗친다. 저 새끼 지금 내 얼굴 똑바로 쏘고 있는 거 맞는 거지?
아, 어이없네. 시합이라는 건, 기량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야. 이길지 질지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걸 신청할 자격을 얻는 거라고.
칼자루 잡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 다 알면서 뭘 하자는 거야? 뻔히 이길 줄 알고 싸우는 게 무슨 시합이고 비무냐? 그냥 약한 사람 괴롭히는 짓거리지.
웃어? 웃기냐, 새끼야?
─좋습니다! 까짓 거 한번 해보죠, 뭐.
드르륵! 드륵!
예비역들이 대경실색해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척인성 중령 뒤에 서 있던 근오까지 이쪽으로 달려온다. 석구 옹이 계모아들을 노려보며 칼자루를 만지작거린다.
─죽일까요, 형?
당연히 말리고 나설 줄 알았던 대대장은 아무 말도 없다. 턱 근육을 펌핑시키고 있을 뿐이다. 영기 옹이 내게 소리를 지른다.
─도련님! 왜 이러십니까? 저를 대리인으로 선정하세요! 그럼 저 놈들도 찍소리 못하고 그냥 넘어갈 겁니다. 비록 저의 몸은 늙었지만 저 두 놈 정도는 칼 없이도 얼마든지 뼈를 다 꺾어놓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데, 대리인 내세우고 도망가라고요? 차라리 사람들 안 보는 편의점에서 여자애한테 칼 맞고 개망신 당하는 게 더 낫겠네요.
─그... 그건...!
─일단 제가 지명을 받았으니까 제가 해결을 해야죠.
─그렇지만 도련님...
─물론 이길 자신 같은 건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부터는 검술수업을 받을 예정이었으니까, 언젠가 되갚아줄 날도 오겠죠. 오늘을 보고 하는 게 아니라 다음을 보고 하는 거예요. 제 목표는, 내가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저 놈도 알게 되겠죠. 만약 다음에 또 나를 걸고넘어진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어려워질 거라는 사실을요.
─...그럼 갑옷 챙겨가지고 올게요, 도련님.
시무룩한 얼굴로 근오가 자리를 떠난다. 아, 그런데 나중 일이야 어떻게 되든 이 얘기는 지금 꼭 해야겠어.
─저기, 지금 꼭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유언인가요, 도련님?
아, 이 양반이 정말! 왜 이런 순간에까지 개그치고 그래?
─아까 공연할 때 너무 크게 웃는다 했어요. 저쪽 사람들을 지나치게 자극하셨잖아요. 상대방을 깎아내린다고 우리가 더 나아지는 게 아닙니다. 당장은 신나고 통쾌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반감을 사게 되죠. 이걸 보세요, 원한을 사게 되니까 골치 아픈 일이 터지고, 결국에는 거하게 뒷감당을 하게 되잖아요.
예비역 노인들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는다. 이거 내가 괜한 소릴 했나...?
─그렇지만 도련님... 도련님께서 평소 하시던 거에 비하면 오늘 저희는 그냥 애교 수준이었는데...
음...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도련님 이 새끼... 평생 착한 일을 하나라도 한 적이 있었을까?
─후아. 도련님, 여기 연습갑옷이요. 아마 맞을 거예요.
근오가 숨을 몰아쉰다. 저 덩치에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볼수록 놀랍다.
일단 갑옷을 받아들고 보니 얇은 체인메일 한 겹을 입고 그 위에 카본보호대를 묶어 다는 식으로 돼 있다.
갑옷상태는 아주 좋다. 보호대 끄트머리의 색이 바란 걸 봐서는 공장에서 바로 나온 신품 같지는 않은데, 전체적인 상태를 보면 아직 제대로 사용한 적이 없는 물건 같다.
일단 망토를 벗고, 허리띠를 끄르고, 예복 상의를 벗고, 바지는... 그대로 입어도 되려나? 이거 움직이기 엄청 불편하던데.
─갑옷 속에 입을 전포가 없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바지까지 벗어야 될 모양이다. 주위에 예비역들이 둘러선다. 카본 링Ring을 빈틈없이 엮은 체인메일을 옷처럼 입는다.
아 이거, 착용감도 별로 안 좋고... 살이 찝히지 않을까 걱정도 되는데.
─다른 거는 어떻게 착용하는 거예요?
영기 옹이 한숨을 쉰다.
─하아... 제가 매드리겠습니다, 도련님.
팔꿈치보호대가 먼저 결속된다. 그 다음은 흉갑.
갑옷을 채우고 줄을 묶으면서 영기 옹이 조용히 말한다.
─...늙어서 더 이상은 전쟁에 나갈 수 없게 된 뒤로 계속 도련님을 돌봐왔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죠. 건강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매일같이 일으키셨고, 충심으로 도련님을 보살피는 저희를 모욕하신 적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도련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든 절대로 모욕당하셔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그 꼴을 살아서 보느니 차라리 오늘 죽겠습니다.
정식투구보다 좀 간단하게 생겨먹은 연습투구가 머리에 씌워진다.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으세요, 도련님. 만일 저 천것이, 도련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려 한다면 투구를 벗어서 놈의 얼굴에 집어 던지십시오. 그럼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굽은 칼을 찬 놈들은 결코 살아서 이곳을 나서지 못할 겁니다.
석구 옹도, 대대장도 말이 없다. 오싹하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투구 끈을 한 번 더 묶어주세요. 풀리지 않게요.
─도련님!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다쳐선 안돼요. 오늘은 경사스런 날이잖아요.
─그럼... 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칼이요?
─이쪽에 있는 게 다 비무할 때 쓰는 칼들입니다.
어어? 이거 봐라? 나는 장식용 도검들인 줄 알았는데, 저것들이 연습용 칼이었어?
뭐야, 이거? 나는 당연히 죽도나 목검으로 할 줄 알았지!
물론 연습용 칼에는 날이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갑옷을 입는다고 해도 저런 걸로 치고 받게 되면...
일이 꼬이고 있는 것 같다. 이거... 무사히 내려올 수 있을까? 솔직히 조금 쫄린다.
무기 종류가 굉장히 많다.
─저기 있는 창으로 해도 되나요? 아무래도 긴 게 유리할 것 같은데.
─예, 사용할 수는 있는데... 비무 상대의 사전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 관두죠. 말 섞기도 싫네요, 저 개새끼.
놈은 이미 칼을 들고 시합장에 올라가 있다. 암만 봐도 스무 살 전후다. 어린놈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이걸로 할게요.
─도련님, 칼이 길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닙니다. 이걸 어떻게 다루려고 그러세요?
─저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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