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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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을 넘어서자 정말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목적지가 보인다.
─저 커다란 건물 보이십니까? 비무원比武園이라는 곳입니다. 비할 비, 굳셀 무, 동산 원 자를 쓰는데요, 말 그대로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견주고 비교하는 곳입니다.
안내를 하는 대대장은 한쪽 콧구멍에 휴지조각을 쑤셔 넣고 있고, 그 옆에서 따라오는 영기 옹은 한 눈이 부어 반쯤 감겨 있다. 그런데 시합 전에 이렇게 기운들 빼셔도 되는 건가 모르겠네?
─건물이 굉장히 크네요? 이름만 들어서는 정원庭園인 것 같은데...
아마도 지붕이 있는 실내체육관일 거라는 생각은 했으되 고등학교 체육관 정도 건물을 예상했었는데 규모가 훨씬 크다.
장충체육관보다 조금 작은 정도? 지난번에 얘기 들은 걸로는 극장이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런 대형체육관까지...?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저희가 젊었을 때는 그냥 작은 뜰에 불과했지요. 물론 그때도 비무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는 했습니다. 정확히 언제 붙은 이름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러왔던 것이지요. 어린 영주님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검술을 갈고 닦으셨습니다. 그때는 말 그대로 정원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렇게 변하다니 참...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건가 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서 연습을 하셨던 걸까요?
─아, 그건... 고대 성벽 안에도 우물이 있지만, 이 근처에도 맑은 우물이 있어서 연습을 하다가 물 마시기가 좋았거든요. 물론 그 우물은 지금도 있습니다. 그대로 보존을 해놨고요, 아직 물도 나옵니다.
─그래도 고대 성벽 안쪽에서 연습을 하는 편이 안전하지 않았을까요? 그때는 1차 성곽 2차 성곽이 없었다고 하셨잖아요...?
─허허.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평화로운 곳이다 보니... 선대영주님 시절까지만 해도 성문은 항상 개방돼 있었습니다. 심지어 야간에도 말이지요. 정말 인자한 분이셨지요. 사람을 참 좋아하셔서 천지사방에 적이 한명도 없으셨습니다. 물론 성내에서도 연습은 할 수 있었겠지만, 선대 영주님께서는 아주 조용한 분이셨기 때문에 성벽 안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나 고함소리가 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지요.
─아하. 그러셨군요.
─그리고 이름 높은 외부 인사들을 초청해서 무기술 세미나를 열려면 성벽 안쪽보다는 이쪽이 아무래도 편하지요, 탁 트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래도록 사용돼온 것일 테지요. 이렇게 대형 체육관으로 확장한 뒤에도 투기종목시합을 많이 유치해오고 있습니다. 그런 걸 개최하면 다른 성에서도 관람객들이 올 정도입니다.
─도련님! 여기요.
대대장의 안내를 받는 동안 앞서 걸어 나간 석구 옹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뭔가 생략된 듯한 요상한 말투에 영기 옹이 끄응, 하고 신음한다.
─귀빈 전용통로는 이쪽입니다.
예식용 갑옷을 입고 경비를 서던 젊은 친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문을 연다. 아까 석구 옹과 마찰이 있었던 남자가 입던 것과 같은, 보라색 망토를 입고 있다.
나와 비슷한 정도니까, 꽤 작은 체구다. 허리에 차고 있는 칼도 아까와 같은 일본도 양식이다.
왜 저 사람들은 망토 색깔이 다른 거죠? 라고 물어보고 싶지만, 두 노인 모두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괜히 의심 살 만한 질문하지 말고 조금 기다려보자.
통로는 대대장 정도의 체구 다섯 명이 한꺼번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많이 걸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주변이 밝아지며 시끄러운 소리가 귀로 확 쏟아져 들어온다. 아이들이 울며 떼를 쓰는 소리, 그걸 달래는 엄마의 악다구니, 웃음소리, 이야기소리, 군것질 거리를 파는 장사꾼들의 흥정소리...
체육관 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와... 이 성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정말 많다. 전쟁 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풍경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경기장 한가운데에는, 가로 세로 넓이가 10미터도 넘을 듯한 시합장이 뚝 떨어진 섬처럼 떠 있다. 그리고 천장에 그대로 이어진 대형스크린에 아버지의 얼굴이 떠 있다.
허, 출세하셨네. 제약회사 다니시던 분이? 하하하.
실내는 잔뜩 들떠 있다. 석구 옹이 또 손가락으로 어디를 가리킨다. 대대장이 부연설명을 한다.
─허흠! 저기... 영주님 왼쪽 옆자리에 배석하시면 됩니다.
시합장의 둘레는 바로 통로이고, 그 부분은 비워져 있다. 올림픽 유도시합장과 비슷하다. 그 통로 바로 외곽에 좌석이 들어서 있다. 관중석은 거의 꽉 차 있다.
관중들의 시야를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곳에 심판석 비슷한 자리들이 있는데, 그 중에 내 자리도 준비돼 있다. 로얄석인 셈이다.
그러나 앉을 자리는 아까처럼 한 자리 뿐이다.
─저 빼고 다들 서 계시는 거예요, 아까처럼?
─예, 도련님. 오늘 저희는 도련님 경호인력으로 나온 거니까요. 교범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저기, 그러지 마시고 어디 간이의자 몇 개 가져다 달라고 해서 앉아 계세요. 갑옷은 무겁잖아요.
─에헤이...! 도련님. 그렇게까지 신경써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희가 그렇게까지 늙은 것도 아니고... 에이 참... 그럴까요 그럼? 야! 여기 의자 좀 가져와봐라!
뭘 잘못 들었나, 내가?
─도련님 명이라고! 빨리 움직여 새끼들아, 생활 편하냐?
작은 사람들이 또 머리를 조아리고 허겁지겁 움직인다. 괜한 소리를 한 건가.
멀지 않은 곳에 앉은 아버지가 안 보는 척하면서 슬쩍 눈길을 내 쪽으로 돌린다. 이거 괜히 또 찍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승혜는 어디로 간 거지? 승혜와 그 아버지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조금 후에야 눈에 들어온다. 승혜는 좌석에 앉은 아버지 뒤에 서 있다.
아까 본 걸로는 의전서열 4위인 것 같던데. 왜 저런 구석자리에 가 있는 건가?
잠깐만... 이거 좌석배치가 좀 이상하다?
계모와 그 아들, 그리고 보라색 망토 입은 녀석들이 차지한 면적이 월등히 넓다. 그리고 그쪽 인사들 자리에는 좌석이 여럿이다. 그쪽 주요인사들 중에 서 있는 사람은 없는 거다.
이건 준비된 배치다. 행사준비작업 전반을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 일부러 이렇게 해놓지 않은 이상 이런 배치는 나올 수 없다.
계모의 지시가 있었든 무슨 협박을 받았든 간에, 오늘 이 자리를 준비한 실무진은 내 편이 아닌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 같다.
─비켜! 이 씹새끼들아.
석구 옹이 소리를 지른다. 아까부터 좌석배치에 불만이 많으셨지. 간이의자를 받아들자마자 옆의 두 자리를 발로 밀어내고 자기자리를 만든다.
예비역 노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내 등 뒤에 깔아도 되는 자리를 굳이 옆으로 넓게 벌려 놓고 앉는다. 아이고. 내가 괜한 소릴 했나.
드르륵! 드륵!
의자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는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리게 마련이다.
아... 이렇게까지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말려야겠다는 생각도 안 든다. 아무리 내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나이 드신 참전자 분들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건 명백한 잘못이다.
공작이라는 새는 몸집이 큰 편이 아니지만 깃을 다 펴면 어떤 새보다도 더 커 보이지. 물론 이렇게 해놔도 저쪽 인사들만큼 세가 있어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균형은 맞출 수 있을 거다.
젊은 시절 전쟁에 나가 싸우고도 죽지 않고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전쟁영웅이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은 호국영령이 되는 거다. 나중에 혼나더라도 하는 수 없다.
내 쪽을 넘겨보던 아버지는 표정이 없다. 속내를 짐작 못하겠어. 하지만 아까 들은 얘기로는 예비역들이 시합까지 뛰게 돼 있던데, 서서 대기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계모의 아들이 시합장으로 올라선다. 진행을 하려는 건가? 종이쪽지를 들고 시합장 구석에 세워진 마이크로 다가선다. 따로 통제가 없었는데도 실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확실히 얼굴만 보여줘도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는 거다. 잘 생겼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부럽네. 쩝.
─지금부터 영주님 승전기념환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목소리는 떨린다. 사람들 앞에 서게 되어 적잖이 긴장한 것 같다. 그렇지만 나름 풋풋한 면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보인다. 체육관은 단번에 얼어붙어버린다. 이건 조용해진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계모 아들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조용해져 있기는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정적이다. 모든 소리의 볼륨이 급전직하하는 바람에 나는 놀란다. 아이들 울음소리까지 들리지 않는다. 완전한 정적이다.
역시 이곳은 통제국가인 건가. 아까 석구 옹 앞에서 칼을 뽑았던 보라색 망토가 아버지에게 무선마이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내민다.
아버지가 그걸 받아들자 마치 스위치로 켠 것처럼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진다. 그렇지. 전쟁영웅의 처우는 이런 식으로 해줘야 하는 거다.
─그... 아는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겠지만, 나는 말 길어지는 거 딱 질색이니까. 간단히 하고 넘어가겠다. 오늘 놀아라. 명령이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아버지는 웃는 낯으로 잠시 말을 멈추고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린다.
─예! 그럼 곧바로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행사의 첫 번째 순서로 경호대대의 검술시범이 준비돼 있습니다.
어? 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아마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을 거다. 미묘한 문제다. 고의로 아버지의 말을 끊고 진행을 한 건지, 아니면 떨려서 아버지가 정말 거기서 말을 끊은 줄로 알고 넘어간 건지.
보라색 망토를 입은 남자는 아버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뒤로 돌아 어딘가로 수신호를 보낸다.
─저 새끼 뭐예요?
이제 의심 받더라도 물어봐야겠다. 은근히 사람 빡치게 만드네? 누구라고 찍어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대대장이 설명을 시작한다.
─저희 예비역들은... 수성치안대대 소속입니다. 1, 2차 성곽과 고대 성벽을 외적들로부터 방비하고, 그 안에서 생기는 치안문제 전반에 개입해 통제 감독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저들은 경호대대라고, 신설부대에 소속된 자들입니다. 요인경호와 사업장 관리를 맡고 있지요.
─사업장이요?
─음... 어떻게 해야 설명이 빠를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진족들은 알고 보면 그 정체성이 유목민에 가깝습니다. 그러다보니 놈들을 쳐도 전리품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아주 한정돼 있거든요. 전비를 충당하기는커녕, 생존한 참전자들에게 연금을 주기도 어려운 수준입니다.
그랬었지. 기껏 군사를 일으켜 빼앗은 땅을 조건 없이 돌려주기도 했었다고 역사책에 적혀 있던 걸 본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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