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관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그런데 그 대신...
내 말 한 마디에 차 안은 얼어붙는다.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내 말을 기다린다.
─해주셔야 할 일이 있어요. 말씀대로, 어제는 제가 놀다가 정말 머리를 다친 것 같거든요? 그리고 기억이 안 돌아온 것 같은데, 이러다가는 멋모르고 큰 실수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제가 뭘 잘 모르는 눈치면, 따로 질문하지 않아도 옆에서 설명 좀 해주세요. 사실 지금도 조금... 난감하네요.
─...저, 정말 그런 걸로 괜찮겠습니까?
─예. 저는 그거면 됐어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도련님.
차 안에는 평화가 자리 잡는다. 그나저나 곧 고대성벽이 나온다고 했던가? 근오는 과속을 주로 하는 애고, 꽤 달려온 것 같은데?
아. 멀리서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1차 성곽 때와는 다른 양상이다. 이번에는 성곽이 높아서 눈에 확 들어온 게 아니라, 성이 높은 곳에 있어서 한눈에 들어온 거다.
그렇지. 저거야. 저런 게 성城인 거지.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성벽의 높이만 놓고 보면 아담해 보일 정도다. 물론 1차 성곽에 비교해 볼 때 그렇다는 거다.
못 해도 10~15미터 정도 높이는 될 텐데. 저 높이가 아담해 보인다니.
그러나 성벽은 유적이 아니다. 아직 쌩쌩한 현역이다. 어떤 안내도 받지 않았지만, 방비의 중심지라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해자가 파여 있고 성벽 위에는 CCTV까지 돌아가고 있다. 성벽 위에 CCTV라니, 어째 잘 안 어울리는 광경이기는 하다.
불현듯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 공원으로 바뀐 고성古城에 놀라갔던 일이 떠오른다. 아버지 직장이 아직은 그럭저럭 괜찮았을 때였지. 계속 그렇게 괜찮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그 도련님이란 새끼는 도대체 어떻게 이 성벽을 넘었다녔던 걸까? 고작 술 마시자고 여기는 물론이고 1차 성곽까지도 넘어 다녔다는 것 같더만.
솔직히 처음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도망치는 재주 하나는 타고난 것 같다.
성문 앞까지는 급경사다. 그럼에도 차는 감속 없이 올라간다.
쿵! 차르르르르!
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해자 위로 성문이 내려오면서 다리가 된다. 쇠사슬? 혹은 기계식? 문은 천천히 내려오는데, 근오는 속력을 줄이지 않는다.
아, 쫄려. 그렇지만 익숙한 척 해야겠지. 그래도 꿀꺽, 절로 마른침이 삼켜진다.
쿠.드.드.드.드!
조금만 더 빨리 달렸으면 성문 끄트머리를 들이받았을 거다. 그렇지만 차는 무사히 다리 위로 올라선다.
성문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궁금하다. 궁금해서 몸이 떨릴 지경이다. 어릴 적 종종 놀러 다니곤 했던 성은, 안에 시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냥 싹 다 비우고 공원으로 쓰던 곳이었으니까.
성문 바로 위에 있는 전통 누각 아래를 지나간다. 성 안으로 들어서니 창이 없거나 작고, 콘크리트만으로 지어진 지상건물들이 삭막하고 딱딱한 느낌으로 빽빽이 들어서 있다.
군사시설이다. 방어요새인 게 확실하다. 그 시설들을 가로질러 차는 중심지로 들어간다.
고풍스런 전통양식과 견고한 현대양식이 결합된 대저택 앞으로 근오가 차를 몬다.
아니다, 저택이라기보다는 관사라고 해야 하나? 관청 같은 느낌이 더 강한 것 같다.
─아이, 씹새끼가 진짜! 여기까지 나와서 서 있네.
나한테 한 욕인 줄 알고 식겁해 목을 움츠린다. 관청 현관으로 보이는 넓은 공간에 한 중년 남자가 서 있다.
갑옷차림이 아니네? 처음 보는 옷차림이다. 옛날 고려시대 관복하고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요즘 옷 같기도 한, 이상한 복장이다.
비쩍 마른 사내다. 턱 선이 날카롭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거나 비슷하다. 처음 만나는 평균체구의 남자인 건가. 조금 반갑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
그런데 복장과 체급을 봐서는 절대로 현장요원이 아닌 것 같다.
끼이이익!
급발진으로 시작했으니 급정거로 맺는 것이 순리인가. 차가 서자마자 대대장이 벌컥, 차 문을 열고 내린다.
─여, 안녕하시오.
방금 차 안에서 쌍욕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불편한 관계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듯싶은 인사였다. 가까이서 보니 굉장히 신경질적인 인상을 주는 사람이다.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카랑카랑한 목소리. 역시 사람은 생긴 대로 노는 건가.
─다녀올 데야 많지. 그런데 우리가 그것까지 일일이 그쪽 허락받고 다녀야 됩니까?
뒤에서 영기 옹이 근오에게 속삭인다.
─근오야. 수갑, 수갑. 빨리!
근오는 대답도 없이 신속히 움직인다. 순식간에 열쇠를 꺼내더니 소리 안 나게 조심해가며 수갑에 꽂아 넣는다.
내 생각에 이건 아주 익숙한 상황이거나,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인 것 같다.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고.
영기 옹이 뛰듯이 차에서 내려 대대장 옆으로 가서 선다. 순식간에 차와 그 남자 사이에 벽이 하나 드리워진다.
─물론 어디든 필요한 곳이면 가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주님 가족의 신변은 확실히 보호되고 통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하께서 내려주신 제 임무입니다. 직. 접. 보고를 올려야 하는 사안인 겁니다.
긴장했는지 수갑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근오 얼굴이 확 굳는다.
달각!
드디어 자유다. 영화에서 수갑 차고 있던 사람들이 왜 풀려나자마자 손목 주무르는지를 알 것 같다. 이거 은근히 짜증나네 진짜.
근오도 차에서 내려 노인들 뒤에 선다. 나 보고 내리라고 하지 않았으니 일단 눈치를 보는 게 낫겠다.
─지금 상황실과 당직실에 들렀다 오는 길인데, 도련님께서는 어디도 안 계시더군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영내 어디를 가시든 마음대로지만, 보고는 반드시 올라가야 합니다.
응? 나 여기 있는데?
─저는 도련님께서 간밤에 어디 계셨는지, 또 지금 어디 계신지를 캐물었지만, 침소의 시종과 상황실 근무자의 말이 서로 달랐습니다. 이렇게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하시면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이제 슬슬 내려도 될 것 같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다.
─안녕하세요.
피도 눈물도 없을 것처럼 생긴 남자가 움찔한다. 정말 몰랐나?
아하, 아까 표시등 끄라고 했었지 내가? 당황한 가운데서도 남자는 흔들림 없이 허리를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내가 차에서 내려서 얼굴을 내밀었는데도 긴장감은 여전하다. 이런 걸로 해결될 상황이 아닌 거다. 남자는 인사하느라 숙인 고개를 들자마자 내게 질문을 던진다.
─간밤엔 어디 계셨던 겁니까?
그야 나도 모르죠.
덩치는 산만 한 남자 셋이 바짝 긴장한다. 이제 나도 여기 분위기를 좀 알겠다. 간밤에 이 도련님이라는 놈은 여기 없었어. 상황실과 당직실 말이 안 맞는다고 했지?
말을 맞출 틈 없이 몰아치기 위해서 이렇게 현관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 터다.
이럴 때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어젯밤이요? 잤죠.
당직실과 상황실 근무자의 말이 엇갈렸다면... 두 곳 중 적어도 어느 한 곳에서는 내가 어디 안 나가고 얌전히 잤다고 거짓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만일 두 군데 모두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남자는 두 군데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하든지, 아니면 ‘어디에서’ 잤던 거냐고 반문하든지 할 테지.
그렇지만 나는 어디에서 잤다고까지는 하지 않았으니 그때 가서 또 둘러대면 된다. 6하 원칙 중 ‘어디서’를 생략해 말하는 것에는 장점이 하나 더 있다. 장소를 거짓으로 꾸며 대지 않았으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상황실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역시 한 군데에서는 내가 자고 있다고 말한 거다. 이거, 고지식하고 깐깐하게 생겨먹기는 했어도 순진한 데가 있는 사람 같은데?
─어? 그렇게 얘기하지 않던가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이제 한 군데의 진술에 맞춰서 다른 한 쪽을 부정하거나, 때려 맞추면 된다. 틀려도 착오였다고 하면 되니까 어차피 상관없다.
남은 한쪽에서는 뭐라고 둘러댔을까? 뭐라고...?
─그럼 야간순찰 나가셨다는 건...
어이쿠. 아예 통째로 갖다 주네?
─아, 그것도 맞아요. 밤에 푹 자고 있었는데, 새벽에 이유 없이 잠을 설치는 바람에 그 길로 그냥 경비태세 점검하러 갔다가 이렇게 들어오는 길입니다.
─으음...
분한 얼굴이다. 운이 좋았네. 다른 한 군데에선 순찰 나갔다고 했었구나. 하긴 그게 가장 무난하지.
안 됐네. 그 동안 말이 잘 맞아서 어떻게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는 말이 엇나가게 되니까 신나서 달려온 걸 텐데.
─...아침식사도 거르시고요? 그리고 복장은 그게 도대체...
─아이, 그럼 방비태세에 식사시간이 따로 있나요? 이 옷은, 거동수상자로 가장해보려고 그랬던 거죠. 잘 안 됐지만요. 금세 알아차리시더군요. 하하하하.
남자는 말이 없다.
여기 온 뒤로 사람이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으면, 조금 있다가 크하하하하하핫! 하고 누가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턱을 실룩일 뿐, 웃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럼 오늘은 그렇게 보고 올리겠습니다.
등을 돌리고 현관으로 들어가는 듯하더니 다시 돌아선다. 으잇, 깜짝아.
─아, 간밤에 결제하신 영수증 혹시 있으신가요? 지출내역 있으시면 신고하셔야 합니다.
─예? 아니, 없습니다. 야간점검 나가서 돈 쓸 일은 없으니까요.
남자가 입술을 두어 번 질겅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푸히히히히힛...
남자가 사라지자 셋은 소리 죽여 웃기 시작한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작게 좀 웃어줬으면 좋겠네.
─새끼... 속으로 ㅈ나 열 받았을 걸요?
─말하면 뭐해. 흐헤헤헤...
그러나 웃는 것도 잠시. 새나라의 어린이에게 또 귀찮은 일이 떨어진다. 근오가 툴툴대며 차를 반납하러 간다.
─근데 저 사람, 누구예요?
─예?!
둘 다 멍청한 얼굴이다. 대대장이 말을 받는다.
─도련님. 누구긴 누구예요, 감시관이잖아요?
─아니, 누군지도 모르고 어떻게 그렇게 응대를 잘하셨대?
─아, 빨리 설명이나 해줘요. 약속하셨잖아요.
─끄응... 막상 설명을 하려니 그게... 길어질 것 같아서... 상황실 가는 길에 들으시죠, 도련님.
두 노인이 이끄는 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놈의 상황실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일단 티는 내지 않는 걸로.
─그... 영주님께서는 지금 전쟁 때문에 성을 비우고 파병을 나가셨죠. 그죠? 그런데 어느 영지건 간에, 영주하고 병력이 성을 비우게 되면 어떤 놈들이 빈 성 털려고 들이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감시관들이 영지에 붙는 겁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하께 보고하게 돼있는 거죠.
어? 그럼 그거 좋은 제도 아닌가? 영기 옹이 말을 보탠다.
─그런데 좀 걸러 들으셔야 돼요. 그건 그냥 조정에서 하는 얘기거든요. 구실이죠. 만약에 전쟁하러 전선 올라간 영주들이 군화 거꾸로 신으면 어떻게 될까요? 통제할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