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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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스팔트라는 것이 발명되지 않은 건가? 워낙 이상한 곳이고 보니 별 쓸데없는 생각까지 다 든다. 그래도 노면 상태가 아까 경작지처럼 나쁘지는 않다. 통행량이 길을 매끄럽게 한 것일 테지.
그런데 그 통행량이 차량의 통행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상외로 차량은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넓은 길(비포장)을 메우고 있는 것은 사람들과 말들이다.
어째서 이런? 이것들은 또 뭐지? 신기한 것들 투성이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느라 정신없이 고개를 돌린다. 차가 느려져서 구경하기가 어렵지 않다.
길에는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따로 없다. 차와 말, 말과 말 사이를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며 돌아다녀 나는 깜짝깜짝 놀란다.
내가 아는 것과는 완전 다른 도시다. 건축양식 면에서 그렇다. 같은 콘크리트 건물들이기는 해도 동양적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사람들의 키 변화도 눈에 띈다. 아까 편의점에서 본 사람들보다 꽤 커 보인다. 나보다는 약간 크거나 비슷한 정도? 그런 사람들이 거리를 웃고 떠들고 지나다닌다.
그러다 차가 옆을 지나쳐 갈 때 이쪽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인다.
─저 새끼들이 진짜...
대대장에게 운전석을 내주고 내 뒷자리로 간 근오가 낮은 목소리로 욕을 한다.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서 슬금 대대장과 영기 노인의 눈치를 살핀다.
그쪽 분위기 역시 그리 좋지는 않다. 잔뜩 굳은 얼굴. 그래서 나도 따라서 화난 얼굴을 해본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괜히 물어봤다가 또 끌려 나갈 수도 있으니까.
아, 그래도 궁금해서 못 참겠네.
─왜 욕을 하고 그래, 근오야?
말 끝나기가 무섭게 운전을 하고 있던 대대장이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본다. 고갯짓에서 바람이 느껴질 정도의 격렬한 움직임이다. 아니, 이 양반이 운전하다 말고 뭐하는 거야?
─대대장님, 사고 나겠어요!
─아이코, 예.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차가 한번 휙 흔들린다. 불안한 운전에 놀란 여자 하나가 비명을 지른다. 깜짝이야! 정신 차릴 틈도 주지 않고 근오가 내게 묻는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뭐 못 물어볼 거 물어본 거 아닌가 싶어 엄청 쫄린다.
─아 그게... 나는 근오 네가 갑자기 욕을 하길래 왜 그러나 궁금해가지고... 네가 욕한 거 때문에 기분 나빠서 그랬던 건 아니고. 아하하. 좌우간 내가 잘못했다. 다 내 잘못이야. 아하하하.
─아니, 제 이름 부르신 거냐고요 방금?
─아니 그 저기... 이름 부르면 안 되나? 내가 따로 뭐 불러줘야 하는 호칭 같은 거라도 있는... 거야?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도련님께서 이름 불러주신 게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서요. 평소에는 돼지새끼, 미친 만삭, 초고도비만 이런 걸로 부르셨었는데.
이럴 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에이, 그... 이제 클 만큼 다 큰 사람한테 그렇게 말을 해서야 쓰나? ...내가 그 동안 미안했어...요. 허허허.
─아닌데? 대대장님하고 영기 할아버지한테도 막 쌍욕하고 그러셨잖아요?
아, 이 도련님 새끼는 도대체 평소에 어떻게 하고 살아온 거야? 차 안이 조용하다. 내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는 거다.
─그... 사람이 워낙 친밀하게 지내다 보면 그런 실수를 할 때가 있죠. 잘 생각해 보니까 제가 잘못했던 것 같네요.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 동안 저... 미안했어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차가 한 번 더 흔들린다. 아, 이 양반 사고 내겠네, 진짜!
─어...? 아, 알겠습니다 도련님.
근오가 또 욕을 한다.
─아니, 저 새끼가 또...!
아무래도 길을 걷는 행인에게 한 것 같다.
─왜? 저 사람이 뭐 잘못했어?
근오가 볼멘소리를 한다.
─도련님. 원래 도련님 지나가실 때는 길에서 비켜서서 엎드려 있어야 되잖아요. 차량 타고 가실 때도 허리 구십도 숙이고 지나가시기 기다려야 하고요. 근데 저것들 좀 보세요. 고개만 까딱하고 그냥 갈길 가고 있어요.
─음... 차에 내가 탄 걸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모르겠어요? 지금 표시등 켜놓고 가고 있는데요.
표시등? 무심결에 표시등이 뭐냐고 물어볼 뻔하다가 겨우 말을 삼킨다. 아마도 안에 중요인물이 타고 있으면 밖에서 식별 가능하도록 따로 불이 들어오게 돼 있는 거겠지. 빈 택시에 “빈차” 표시 들어오는 뭐 그런 식일 거다.
그나저나 그거 참 봉건적인 아이디어네. 치안대 차량에 무슨 그런 걸 다... 아이고.
─그럼 그냥 끄고 가죠?
끼익!
이제 아예 차가 급정거를 한다.
아이, 진짜! 운전 내가 대신해주고 싶네 정말. 하긴 이런 형편이니 어린 근오한테 운전을 떠맡겼던 거겠지. 기가 막힌 건 나인데 대대장 역시 기가 차다는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찔끔한다.
─도련님. 영주님 또는 영주님 가족 분들께서 차량 탑승하셨을 때는 반드시 표시등을 켜게 돼 있습니다.
대대장의 험한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밖에서 차를 바라보는 시선도 영 곱지가 않아서 다시 안으로 눈길을 가져온다. 위험운전을 하다가 결국 급정거 해버린 차량에 쏟아지는 시선들에서 적의가 느껴진다.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이건 모두 그 도련님이라는 놈이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 거겠지? 금수저 물고 태어났으면 좀 얌전히 살 것이지...
─아니 어차피... 켜놔도 딱히 좋은 반응 안 오는 것 같아서요... 그냥 조용히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대대장은 출발할 생각은 않고 내 얼굴을 보며 눈만 깜빡거린다.
─...알...겠습니다.
차가 다시 출발한다.
나는 속으로 거리를 계산해 본다. 아까 내가 붙잡힌(?) 편의점에서 그 농지 한복판까지의 거리와, 거기서 여기까지의 거리. 내 계산이 맞다면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성벽 안에 시市 규모의 도시 하나가 전부 들어가 있는 셈이니까. 인구밀도도 높은 편인 것 같은데 모든 곳이 오밀조밀 잘 조성돼 있다.
그렇지만 저렇게 높은 성벽이 방어의 의미가 있을까? 물론 탱크 한두 대 가지고는 안 되겠지만, 포병들이 온다면? 성벽을 때려 맞추거나 아예 넘겨서 쏴대기 시작하면 그냥 박살나버릴 텐데.
아니, 잠깐. 이거 혹시 관광용이나 촬영용인가?
신기한 곳이다. 아름답고 새롭다. 구경하고 또 구경해도 물리지 않는다. 얼른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의욕은 절실함을 잃고, 이곳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자리 한다.
차 안은 조용하다. 나는 나대로 뭐라 말할 힘이 없고, 영기 노인과 근오는 마음 놓고 잠이 들었고, 대대장 역시 꿈나라...
어어? 이 양반이?
─대대장님! 운전대 잡으신 분이 주무시면 어떡해요?!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겁을 한다.
─저 안 잤...! 후릅! 안 잤습니다 도련님.
─저기, 입에 그거 침 흘리신 거 아니에요?
─어엌? 아니 저 이건... 제가 노안이 와 가지고... 눈에서 나온 겁니다 이게 이래봬도.
하이고. 그러십니까. 뒤에서 영기 옹이 좌석을 발로 찬다. 좌석 부러지겠네. 대대장이 이를 악문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운전도 제대로 못해서 도련님께 걱정이나 끼쳐 드리고!.
─시끄러! 너는 안 잤어?!
─나... 나는 안 잤거든?
─웃기네. 너 눈 감고 졸고 있는 거 내가 확인하고 나도 잠깐 눈 붙인 거라고!
─야, 나는 눈 감고 사색하고 있었던 거지! 누굴 물고 늘어져? 너 물귀신이냐?
이 분위기 왠지 익숙하다. 그래, 예비군 훈련의 스멜이야.
─피곤하시면 좀 주무세요. 제가 운전할게요. 옆에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만 알려주시면...
─그럴 순 없습니다! 어디로 또 토끼시려ㄱ... 아니 도망가시려고 그래요? 그럼 저희는 또 도련님 찾아 돌아다녀야 됩니다.
─아니, 정말 아무데도 안 갈게요. 이 수갑만 좀 풀어주시면...
거짓말이 아니다. 호기심에라도 한번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러나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저 귀가 아플 정도로 웃어댈 뿐, 수갑도 풀어주지 않는다.
자리가 다시 바뀐다. 다시 운전대를 잡게 된 근오가 볼을 잔뜩 부풀린다. 아깐 너무 무서운 짓거리들을 해서 몰랐는데, 운전석에 앉혀놓고 보니 완전 애다.
그런데 왜 노인들하고 애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차가 출발한다. 운전자가 속도 조절을 좀 못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다시 마음 놓고 도시구경에 빠져든다. 슬슬 오르막이 시작된다. 멀리 보이는 산 쪽으로 가는 게 틀림없다. 경사가 딱히 급해졌다고 할 건 아니지만, 놓치면 안 될 것 같다.
─허흠! 커흠!
응? 뒷좌석에서 헛기침 소리가 난다.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나 우렁찬 소리다.
─왜 그러세요?
─...저기, 도련님... 저희가 잠시, 몇 초 정도 졸기는 했지만... 이게 다 따지고 보면 도련님께서 도망을 다니셔가지고 벌어진 일입니다. 저희 어젯밤에 근무도 있었는데 꼭두새벽부터 차 몰고 이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뭐라고 대답해야 이 사람들이 나한테 칼질할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 영주님께는 말씀 안 하시는 걸로 좀... 허허허.
─알았어요. 못 본 걸로 할게요.
근오가 운전하다말고 놀란 얼굴로 나를 한번 돌아본다. 도대체 안전의식이라는 게 있는 건가, 이 사람들?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뒷좌석의 반응도 대강 비슷한 것 같다. 왜들 그러지? 내가 또 뭐 잘못했나?
─...감사합니다, 도련님. 저희 잘못인데.
─아휴, 별말씀을요. 어제 근무도 하셨다면서요.
─예. 젊은 놈들은 다 전쟁하러 떠나고 늙은이랑 애들만 남게 되니 참... 면목이 없습니다. 도련님.
그러고 보니 아까 편의점 텔레비전에서 전쟁영웅 같은 게 나왔었지. 전쟁 중이라서 일이 다 이 지경이었던 거구나.
계엄령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게 떨어지면 군인들이 사법권을 가져가기 때문에 직접 일반인에게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오래 전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던 적도 있었지. 그렇지만 실제로, 라는 말이 좀 헷갈린다. 이쪽 세상과 그쪽 세상 중 어느 것이 진짜지? 혼란스럽다.
─...고생 많으시겠네요. 제가 이상한 데 놀러 다녀서 걱정 많이 하셨던 것 같은데, 앞으로는 안 다닐게요.
차 안에 정적이 자리 잡는다. 어허, 이런.
크하하하하핫!!!!
아이 진짜! 바로 뒷자리에 앉아서 스테레오로 터뜨리면 어쩌자는 거야.
─아 도련님 오늘 너무 무리하시네? 오늘밤 술 약속 단단히 잡아놓으신 모양인데 이거? 하하하.
─그래도 영주님께 말씀 안 올리겠다는 약속은 지키셔야 됩니다? 남자는 한 번 말을 뱉으면 지켜야 되는 거예요.
아, 알았습니다. 알았다고요. 진짜 진저리가 날 지경이네. 이 도련님이란 놈, 신용도가 정말 개판이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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