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냐 너
그런데 고려라니? 그거 혹시 REPUBLIC OF KOREA를 말하는 건가? 나는 왜 아닌 것 같지?
─고구려 시절 수, 당은 물론, 그 살벌하던 몽고 놈들까지도 우리 성벽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벽은 수많은 외침으로부터 우릴 보호해 왔으며,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터전을 내준 수호신입니다! 그걸 지금 모른다 하신 겝니까?! 조롱하고 부정하시려는 겁니까?
대대장의 이마에 핏줄이 솟고, 얼굴이 시뻘개진다. 이건 차라리 종교인의 자세야. 절대로 장난이 아니다.
아니, 말실수 한 번 했다고 나를, 아니 도련님을 어떻게 하려는 건가? 진짜 이 사람들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잠깐만. 긍지는 알겠는데, 내가 아는 역사하고는 좀 다른 것 같다? 우리, 몽고한테는 깨지지 않았었나?
─저는... 모, 모르겠어요...
허어! 한숨을 쉬는 대대장 앞에 하얀 김이 길게 드리워진다. 폐활량이 얼마나 좋은 거야 이거? 하루 종일 칼질해도 안 지치겠는데?
─정말 저것이 안 보이신다는 말씀입니까?
손가락으로 내 등 뒤를 가리킨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 저런 게 있었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멀리, 들판이 끝나는 곳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벽이 서 있다. 족히 백 미터는 될 듯한 높이의 성벽이 마치 지평선인 양 길게 드리워져 있는 거다. 이런 규모의 성벽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성묘하러 가는 길에 구경했던 고성古城은 여기다 대면 그냥 애들 장난이었구나. 성城이라는 건 저걸 말하는 거였나. 중국집 이름인 줄 알았더니만.
─저희 가문은 대대로 영주님께 충성해왔습니다. 열과 성을 다해 모셨습니다! 그리고 부상을 입어 전장에 나갈 수 없게 된 뒤로는 도련님을 돌봐왔습니다. 짓궂은 장난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배려 없는 언행으로 우릴 모욕하신 적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성벽을 가지고 장난치셨던 적은 없었습니다.
대대장이 칼자루에 손을 얹는다. 어어?
─...누구냐 너.
반말이 흘러나온다. 비로소 저 칼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두려워진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영기와 근오 역시 대대장 바로 뒤에 서서 금방이라도 뽑을 것처럼 칼자루를 매만지고 있다.
사방은 개활지, 사방으로 펼쳐진 논이다. 어디 움치고 뛸 만한 구석이 없는 것이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으니 나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겠지만, 저들에게는 차량이 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내가 침묵하는 사이, 자기들끼리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댄다. 그렇지만 내게는 다 들리는 소리다. 얘네한테는 정말 기밀이라는 게 없나봐.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정말 도련님이 아닌 거예요?
대대장은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영기라는 노인이 말한다.
─대대장. 도련님이 태어나시던 날부터 지척에서 지켜봐온 우리들 아닌가. 어떻게 봐도 도련님 맞잖아. 물론 머리카락을 이상하게 자르고 괴상한 옷을 입고 계시지만, 저걸 몰라볼 사람이 성 안에 누가 있겠어?
─나도 알아.
─그럼 지금 뭐하자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뭔가 석연치가 않아.
영기 옹이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쓸어내린다.
─아, 뭐가?
─분명히 뭔가 있어.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내 육감은 특별하다고.
육감이란 소리를 들은 노인2가 아주 괴로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걸 봐서는 그게 영 그렇지 않을지도...
하지만 대대장은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근오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아까 주머니 뒤져봤을 때 영수증 나온 게 없었잖아요? 혹시 어제 술집 외상이 안 돼서 술 말고 대마초 한 대 하신 거 아닐까요? 병원 털어서 그 약 가지고 이상한 짓 하셨던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
어이쿠. 진짜 대단한 인물이구나. 이 도련님이라는 놈...
─아! 좋은 생각이 있네. 옷을 벗겨서 몸에 나 있는 흉터 모양을 확인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대대장이 코웃음을 친다.
─장난해? 도련님은 지금까지 칼을 잡아본 적도 없는 분이야. 흉터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나.
시무룩해진 영기 옹.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약간 귀엽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도련님이 아니라는 걸 저 자들이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하다. 죄 없는 사람들 목을 종잇장 찢듯 날려버리려던 인간들이다. 이런 제기랄.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이런 나락으로 떨어지다니.
대대장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너 같은 건 언제든 죽여 넘길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다. 때마침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바람을 등지고 섰지만 대대장은 반대다. 상투 비슷하게 틀어 올린 백발이 마치 뽑혀나갈 것처럼 흔들린다. 그러나 대대장은 눈도 깜짝이지 않고 계속 나를 노려본다.
흡사 맹수의 눈이다. 온 세상이 얼어붙는 것 같다. 수갑을 차고 있어서라거나, 아무런 무기도 없는 맨손이라서가 아니다. 눈으로 내쏘는 기백에 눌려버린 거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죽는다. 그럼 어떻게 하지? 장난이었다고 억지로 웃으며 얼버무려야 하나? 술 마시다 머리를 맞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해볼까? 정말 그놈의 도련님인 양 거짓연기를 해야 하나?
─...너는 누구냐. 누가 보냈지?
똑바로 나를 보고 있다. 굳이 칼을 빼지 않아도 그 눈빛만으로 나를 베어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절로 마른침이 삼켜진다. 솔직히 바지에 오줌을 지릴 것 같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이럴 땐 뭐라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체온이 낮아진다. 몸이 떨리고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사람 잘못 보신 거라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온 대답 중 가장 어려운 대답이 아니었나 싶다.
혹시 여기서 죽게 되면 다시 내 집 내 방으로 돌아가서 눈 뜨게 되는 걸 수도 있잖아. 에라, 모르겠다.
─저는 도련님 아니에요.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요.
대대장은 깜짝 놀라는 얼굴이다. 다시 고민 속으로 빠져든다.
영기 옹이 입을 연다.
─자네 말대로 모든 게 똑같아. 키, 얼굴, 체형... 눈썹 끄트머리 하나 달라진 게 없어. 혹시 어제 머리를 다치셔서 기억상실증에 걸리신 건 아닐까?
─아니지. 그럼 있던 기억이 지워지고 기억에 공백이 생겨야 정상이라고. 그런데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하지 않나. 그럼 다른 기억이 따로 있는 거잖아.
입을 다무는 영기 옹. 근오가 말을 꺼낸다.
─제 생각에 이건 병인 것 같아요, 정신병이요. 도련님이라서 그 동안 말을 못했던 거지, 원래 좀 미친 인간 같긴 했었잖아요. 안 그래요? 그거 아니면 뭐... 귀신이라도 들린 건가?
뭐라고? 아니 이놈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대대장이 또 한숨을 팍 쉰다. 답답한 모양이다. 어쩐지 그 심정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영기 옹이 말을 잇는다.
─잠깐만, 귀신 들린 걸로 해두면 성 안에 감금해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우리 맨날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도련님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잖아.
뭐요? 허허. 정말 환장하겠네.
대대장이 한쪽 주먹을 꽉 쥐더니 그걸로 반대쪽 손바닥을 빡! 두드린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멀찍이서 새가 놀라서 푸드덕, 날아오른다.
─이제야 알겠어!
확신에 차 있다. 그래, 이제야 내 정체를 알게 된 건가? 영기 옹도 근오도 대대장의 입만 바라보고 서 있다.
─도련님께서는... 어젯밤 외계인들에게 납치당하셨던 거야.
뭐시라? 잠깐만... 뭐요? 아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근오는 혼란에 빠진다. 영기 옹은 버럭 화를 내며 기본적인 체면치레도 잊은 채 쌍욕을 날린다.
─또 뭔 개소릴 하고 앉아있는 거여! 이 등신새끼야!
약간의 사투리 느낌? 세계가 달라졌는데도 사투리는 그대로인 건가? 진짜 신기하네.
그나저나 이 3인조는 도대체가... 머리가 어떻게 박힌 인간들이지? 나는 또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걸까.
─아니, 생각해 봐. 기억을 지우고 다른 기억을 만들어 넣을 수 있는 건 외계인들뿐이야. 그 정도 기술력을 가진 건 그놈들밖에 없다고! 도련님은 어제 그놈들한테 납치돼 세뇌를 당하셨던 거야.
영기 옹이 이를 악문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이 새끼가 원래는 안 그랬는... 아니지, 어렸을 때부터 외계인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병신 같은 소리를... 야이 씹할! 도련님 앞에서 진짜 쪽팔리게...!
─너야말로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보라고. 저 머리 깎아놓은 모양하고 괴상한 옷을 보란 말이야! 저게 어디 사람의 행색이야? 외계인들이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외계인들이라고!
─이, 이 미친놈이...!
빠각!
참다못한 영기 옹이 대대장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우와, 손바닥으로 쳐도 저런 소리를 낼 수 있구나.
─...너 쳤냐 지금?
─넌 좀 맞아야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 같거든?
─와 나... 근오야, 하극상이다! 저 새끼 당장 체포해!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근오는 어린티를 내며 둘 사이에서 눈알만 굴리고 있다.
─풉, 어차피 예비역인데 하극상? 웃기네, 대대장이면 다냐? 넌 어릴 때부터 내 밥이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기 옹이 주먹을 날린다.
그런데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으니 주먹질이 잘 될 리 없다. 대대장은 어렵지 않게 그 느린 주먹을 피하고 받아친다. 그러나 그 주먹은 잘못 흘러 갑옷 위를 때리고 만다.
─아옼!
날도 쌀쌀해 손이 시린 판에 맨주먹으로 갑옷 위를 때렸으니 결과야 뻔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영기 옹이 중심을 확 떨어뜨리며 하단 태클을 시도한다. 그러나 대대장은 너끈히 방어해낸다.
콰가각!
갑옷과 갑옷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딱딱한 소리를 낸다. 곰과 고릴라가 육탄전을 벌이는 걸 보고 서 있는 기분이다.
저 사이에 끼이면 어떻게 될까... 나 같은 건 그냥 믹서기에 넣은 채소처럼 갈려서 사라질 거야.
처음에는 역동적인 기술 공방이 오갔지만, 기량이 막상막하라 그런 건지 체력이 방전돼서 그런 건지 결국 둘은 서로의 허리춤을 붙들고 씨름을 하고 있다.
아무리 낮춰 잡아도 180후반에 90킬로그램 이상씩은 될 거구들이다. 두 노인은 싸움소처럼 씩씩대며 용을 쓴다. 돈 내고라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을 거다.
그러나 위세도 잠시, 균형이 무너지고 곰 두 마리는 둘 다 흙길에서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건 도대체 뭘까? 무슨 상황이지? 곰 두 마리가 논바닥에 있어.
뭐긴 뭐야? 도망치라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지! 어차피 수갑도 앞으로 채워진 참이다. 뒤돌아서서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다들 미친놈들이야! 어떻게든 도망쳐야 해!
죽어라고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린다. 아까 본 성벽과는 반대 방향이다. 먹은 게 없어 힘이 없고 수갑도 차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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