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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eyShake 님의 서재입니다.

전쟁 이후의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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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HoneyShake
작품등록일 :
2020.06.23 14:41
최근연재일 :
2020.10.22 17:46
연재수 :
10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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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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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글자수 :
549,913

작성
20.09.1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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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각성 - 3

DUMMY

“설마 지금 내가......너랑 잔 거야?”


데브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이가 없네......”


“뭐라도 마실래?”


“지금 그럴 기분 아니거든?”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입었다. 미네르바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싸워왔던 적과 같이 잔다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 남자에게 그런 감정을 품을 수 있는지......


지난 수백 년간, 미네르바는 데브칸에게 단 한 번도 특별한 감정이 생긴 적이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천족의 적이었으며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왠지 데브칸이 싫지 않게 느껴졌다. 분명 전날 밤의 일은 사고였지만, 어째서인지 미네르바는 그 사고를 즐기고 있던 것이다. 데브칸은 은근히 미남이었다. 그에게는 천족과는 다른, 어딘가 야성적인 매력이 풍겨 나왔다. 천족 중에 그녀보다 강한 존재는 없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왠지 의지가 되는 대상을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감정의 진전이었지만, 미네르바는 그 진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


그녀가 말했다.


“나도 알아. 당분간은 비밀로 하자고.”


둘은 변신을 한 뒤 여관 밖을 나왔다. 마계의 아침은 상당히 추웠다.


*****


미네르바는 그 이후로 종종 마계를 찾아갔다. 데브칸 역시 적의 수장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둘은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댄 뒤 둘만의 시간을 갖곤 했다.


둘은 괴수 퇴치에도 협력했다. 데브칸의 수하들 중 몇몇은 절대적으로 그를 신봉했으며, 설령 그가 적의 수장과 비밀스런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미네르바는 그 수하들을 통해 괴수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게리온이라 불리는 괴수들은 인간의 서너 배 정도의 크기를 가졌으며, 강력한 근접 전투 능력을 지녔다. 지성은 인간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감각으로 부족한 지성을 보완할 수 있었다.


가장 의문이 드는 것은 바로 균열이었다. 이 균열은 주로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생성되는데, 무슨 원리로 생성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균열은 괴수 두세 마리를 뱉어낸 뒤 머지않아 사라졌다. 데브칸의 말에 따르면, 마족은 한 번 이 균열 너머로 탐험을 떠났다가 대원들이 모두 실종된 이후로 균열 탐사를 중지시켰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더해져, 미네르바와 데브칸은 괴수 퇴치와 동시에 천족과 마족간의 전쟁을 끝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종전 선언을 하고 싶었지만, 양측의 여론은 휴전 및 종전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오히려 계승자보다도 인간들이 전쟁에 더 적극적이었다. 인간들은 계승자보다 하위에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제 활동을 도맡아 하고 무엇보다 숫자가 많았던 만큼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됐다. 영원한 삶을 사는 계승자들이 돈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길어봐야 100년만 살 수 있는 인간들은 더 많은 부와 권력에 집착했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영토를 확장하고 더 많은 전쟁 물자를 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네르바는 분명 여신이었지만, 인간들의 여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인간들이 단체로 반기를 든다면 필연적으로 학살이 일어나고, 이렇게 되면 천족의 힘은 약해질 것이 뻔했다.


계승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덜 폭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엘리시온과 발할라를 이끄는 관료 상당수는 상당한 민족주의자였으며, 그들은 적과의 화친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아무리 최고 지도자라 한들 이들 전체와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네르바와 데브칸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종전 계획을 짰다. 우선 각 계승자들의 전투 규모를 조금씩 줄여나간 뒤, 민중들에게 정상적인 교류가 전쟁보다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수년 간 시민들을 설득하면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도 종전에 호의적으로 바뀔 것이라 생각했다.


*****


“찾았어. 울프치니크 안에 놈들의 신전이 있더군.”


데브칸이 말했다. 미네르바는 옆에서 알몸이 된 채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잘 됐네. 어떻게 할 거야?”


“일을 꽤 잘하는 신입 계승자가 한 명 있어. 원래는 천족 출신이었는데, 휴전 시절 마족과 연애를 하다가 들켜 여기로 도망쳤다는군.”


“그거 안됐네. 적의 규모는?”“자세한 건 모르지만, 계승자 약 1개 대대를 투입하면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정말로 그 생귀니우스라는 자들이 괴수를 소환하는 걸까?”


“그거 외에는 다른 경우를 생각할 수가 없어. 아무 맥락도 없이 균열이 나타날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하지. 보통 너나 나가 상대 진영에 스파이를 보내기 위해 균열을 만드니까.”


“이제 아무렇지 않게 자백을 하네?”


데브칸이 그녀에게 다가와 이마에 키스를 했다. 미네르바는 천천히 데브칸의 몸을 어루만졌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1년 전까지 죽이려고 들었던 사람과 이러고 있다는 게......”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건 두 종족이 화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니까.”


*****


마족들은 매우 야성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강철 손톱을 써 생귀니우스들을 갈가리 찢었다. 신도들은 급하게 신전의 보호막을 작동했으나, 몇몇 마족 전사들이 땅 밑을 통해 신전으로 통하는 전술을 사용한 탓에 무용지물이었다.


혼란에 빠진 신도들은 차원의 균열을 열어 괴수를 소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균열이 만들어지기 직전에 마족 계승자들이 적 원소술사들을 모두 죽이는 데에 성공했다. 미네르바는 마족 전사들의 전투에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투가 끝나고 신전이 있던 자리에는 폐허만이 남았다.


데브칸은 직접 생포한 신도들을 심문하기로 했다. 미네르바는 옆방에서 특수 유리창을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유리는 특이하게도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았으나, 밖에서는 안이 전부 보였다.


데브칸은 고통을 주는 흑마법을 사용했다. 신도의 비명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는 것을 최대한 말하면 살려주겠다. 왜 균열을 만드는지, 왜 게리온을 신으로 섬기는지 말이야.”


“몰라,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냥 난 먹을 걸 준다길래 신전에 가서 일하던 하급 신도란 말이야.”


“모른다고? 지금 여기 있는 병사들이 니가 아랫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걸 봤다는데, 이 옷부터가 딱 봐도 귀티가 나잖아.”


데브칸은 마력의 강도를 한층 높였다. 그 생귀니우스는 아까보다 더 고통스러워했다.


“끄......끄아아아악!”


“그러니까 빨리 말하면 얼마나 좋아.”


“엿이나 처먹어! 이 가짜 신아. 언제까지 니 지배가 계속될 것 같냐? 그래, 내가 만들라고 시켰다. 내가 괴수들을 이 땅에 풀어놓았......”


“거기까지.”


어느새 미네르바는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데브칸의 수호병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말렸는데도 계속 들어가겠다고 우기셔서......”


“뭐, 뭐, 뭐야?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네?”


“천족의 여신! 마족과 동맹을 맺은 건가?”


“맞아. 원래는 한 쪽이 멸망할 때까지 싸울 운명이지만, 너희들이 너무 위협적이라 말이야. 고마워. 마족과 동맹을 맺게 해줘서.”


“둘이서 고문해봤자 소용없다. 난 생귀니움의 일원이다, 네놈들 따위에 절대 굴복하지 않......”


그 순간 미네르바는 포로의 머리를 끌어않았다.


“자, 착하지, 착하지.”


신도는 곧바로 눈이 풀렸다. 미네르바는 다시 그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왜 균열을 만들었지?”


“균열은 원래 자연적으로 생기는 겁니다. 저희는 그걸 좀 더 많이 생기도록 부추기는 것뿐이고요.”


생귀니우스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과는 완전 다르게 헤실헤실 웃으며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균열 너머에는 뭐가 있지? 가본 적 있나?”


“없습니다. 거기 들어가면 죽어요. 끝없는 우주가......헤헤헤......”


미네르바가 데브칸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없어. 질문 하나만 더 할 수 있어.”


“알았다. 이봐 생귀니우스, 너희들의 교주에 대해 알고 싶다. 생귀니움 교단을 이끄는 자는 누구지? 그의 목적은 세계를 멸망시키는 건가?”


“게리온이 세계를 지배하면, 헤, 헤헤헤......우리는 창조주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세계가......”


갑자기 신도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곧 코뿐만 아니라 눈과 귀, 입에서도 끝없는 피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왜 이래? 고문이 너무 심했나?”


“아니, 나 때문이야. 지나치게 강한 환각 마법을 걸었거든. 상대가 고위 신도인 만큼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해.”


곧 포로는 그대로 땅 위에 쓰러졌다. 수호병 몇 명이 시체를 방에서 가지고 나왔다.


“균열이 자연적으로 생긴다니......처음 듣는 얘기로군.”


데브칸은 멍하니 신도가 쓰러졌던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균열 바깥에 우주가 있다는 건 무슨 얘길까?”


“확실한 건 이 괴수들은 우리의 예상을 대폭 뛰어넘는 존재라는 거야. 휴전 협정을 앞당겨야겠어.”


“하지만 사람들이 싫어할 텐데......”


“지금 이렇게 비공개로 협력하는 건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우리의 동맹 사실도 외부에 알려야 해.”


“......알았어. 네 판단을 믿을게.”


“걱정하지 마. 괴수를 몰아내고 꼭 휴전 협정을 성사시킬 테니까.”


*****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더 안 좋아졌다.


괴수의 침공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갔다. 마족은 언제부턴가 괴수의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는 것 같았다. 미네르바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마족에 대한 공격을 자제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제 마족은 스스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데브칸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만 갔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영혼석에 마력을 집어넣으며 보냈다. 괴수에게 죽는 마족이 점점 더 많아진 탓에 부활을 기다리는 영혼이 늘어난 것이다.


“괜찮아?”


“......아직은.”


미네르바는 데브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여신을 안았다.


“천계 내에서도 괴수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어.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가능해질 거야.”


“그래서는 안 돼.”


데브칸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괴수의 존재를 알려야 동맹을 맺을 수 있다며?”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 넌 시민들이 최대한 괴수를 모르게 해야 해.”


미네르바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데브칸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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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성 - 3 20.09.11 6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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