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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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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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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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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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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5. 나루서점

DUMMY


파락, 파락!

작은 불덩이가 마치 바람을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움직여 봐.”


시현이 손바닥을 끌어당겼지만 불덩이는 놀리듯이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흠, 이게 말을 안 듣네.”


시현이 손을 탈탈 흔들어 보는데 금손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연습 중인가?”

“예. 아 참 그런데요. 집에서는 이 불이 안 나와요.”


전날 처음으로 도깨비불을 꺼내 본 후 시현은 집에 돌아가서도 연습을 해 보았다.

도깨비불을 막 꺼내 보고 싶다거나 빨리 써 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죽림에서 해볼 때는 손바닥에서 튀어나와 동동 떠다니던 작은 불덩이가 집에 가서 해보니까 전혀 나타날 낌새가 없었다.


“이거 죽림 전당포 밖에서는 전혀 못 꺼내는 건가? 거기서만 가능한 거였나?”


전날 밤이나 오늘 아침에도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꺼낼 수 없었는데, 전당포에 와서 해보니까 금방 불덩이가 나타났다.


“처음이니까 그런 거야. 죽림은 환경상 도깨비불이 나타나기 훨씬 쉽지. 여기서 계속 훈련해서 자네와 도깨비불의 유대가 강해지고 도깨비불의 힘이 강해지면 나중엔 바깥세상에서도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게 될 걸세.”


금손은 점잖은 말투와는 달리 귀여운 몸짓으로 옆걸음을 쳐서 시현의 다리에 몸을 몇 번 비빈 다음 뒷발로 일어나 앉았다.


“오늘은 나랑 어디 좀 가세나. 정과 조금만 싸 가지고.”

“어딜 가는데요?”


시현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금손이 말했다.


“고서점 말이야.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저자의 제자 집안에서 하는 고서점. 송가미록의 흔적을 찾으러 가는 거야.”


시현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송가미록을 찾으러 가는 건가.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내가 들은 정보가 있어서 가보는 거지만 오늘 꼭 찾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어디 있는 고서점이에요?”

“인사동.”

“아, 인사동 고서점은 저도 몇 군데 가봤는데.”

“그래? 어디 어디 가봤는데?”

“통문관이랑, 세인서점, 그리고 레아······.”

“오, 통문관 가봤으면 알기 쉽겠네, 우리가 오늘 가려는 집은 통문관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바로 그 근처에 있다네.”


금손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말을 이었다.


“통문관은 우리나라 최고의 고서점이지만 조리서는 별로 없지. 세인서점은 조리서가 좀 있었지만 이제 문을 닫았고.”

“예 지난번에 제가 갔을 때는 세인서점 자리에 카페가 생겼더라고요.”

“청계천 책방거리나 인사동 고서점이 이제 다 없어졌으니까. 지금 가려는 나루서점도 언제 없어질지 몰라.”


금손이 시키는 대로 주방에서 복숭아정과 한 봉지를 담아 거실로 나온 시현에게 금손이 물었다.


“시현이 운전할 줄 아나?”

“예······.”

“잘됐네. 그럼 세나 차를 타고 가면 되겠어.”

“그게 어디 제 찬가요? 죽림 차지.”


세나가 끼어들었고 금손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운전할 수 있는 게 세나뿐이니 세나 차나 마찬가지지 뭐. 아, 이제 시현이도 쓸 수 있으려나?”


시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냥 지하철 타면 어떨까요?”

“나랑 같이 가야 하는데 대중교통 타면 내가 계속 이동장에 들어가 있어야 하잖아.”

“전에 보니까 할아버지로 변신도 가능하시던데 사람 모습으로 가면 안 되나요?”


금손은 조금 머쓱한 듯 앞발로 얼굴을 문질렀다.


“나는 은롱이처럼 자유자재로 둔갑은 못 해. 죽림이 아닌 곳에선 변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고. 서점에 가면 변신을 해야 하니까 그전까지는 고양이 모습을 유지해서 시간을 벌어야지.”

“그럼, 혹시 청주 갈 때 썼던 문은요?”


금손이 가당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지. 그 문은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은롱이가 함께 가지 않으면 쓸 수도 없고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네. 이런 단거리에, 더구나 대낮에 사람 많은 자리에 갈 땐 쓰기 어렵고.”

“아 네.”


시현의 말꼬리가 조금 늘어지는 걸 깨달은 금손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 시현을 올려다봤다.


“왜, 운전하기 싫은가? 잘 못 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운전 잘합니다.”


시현은 일찍부터 식당 일을 한 만큼 식자재 구입 등으로 차량을 몰 일도 많아 면허도 빨리 땄고 운전에도 능했지만 운전을 즐기진 않았다.


시현은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당시 시현도 차 안에 같이 타고 있었는데,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 안에서 시현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어머니가 온몸으로 시현을 끌어안고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23년 전의 일이지만 시현은 아직도 자신을 꽉 껴안은 엄마의 어깨 너머로 끼쳐오던 타는 휘발유 냄새와 피 냄새, 부모님의 신음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기억했다.

그 교통사고의 기억 때문인지 시현은 어릴 때부터 휘발유 냄새를 싫어했고, 웬만하면 차량 이동보다는 걷는 쪽을 선호했다.


자라면서 차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지긴 했지만 남의 차를 탈 때는 괜찮아도 직접 운전하게 되면 어쩌다 무의식중에 옛 기억이 되살아날 때가 있었다.


“운전이 불편하면 그냥 이동장을 쓰고 대중교통을 탈까? 내가 답답해도 좀 참지 뭐. 세나야, 내 이동장 어디 뒀니?”

“사용한 지 너무 오래돼서······, 찾아봐야겠는데요?”


세나가 이 층 쪽을 향하려 하자 시현이 얼른 말렸다.


“괜찮아요. 그냥 제가 운전할게요. 불편할 정도는 아닙니다. 식당에서도 연차 낮을 때 차 자주 몰았어요.”


자주 운전할 때는 괜찮았는데 요즘 운전 안 한 지가 오래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조금 망설여졌던 거였다.


***


“형아 잘 다녀와.”

전당포 뒤쪽 작은 빈터에 세워진 검은색 경차에 시동을 걸자 은롱이 뒷문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손님 올까 봐 같이 안 가는 거야?”


금손과 시현이 같이 외출한다고 하자 금방 따라나설 기세였던 은롱은 나루서점에 간다고 하자 왠지 주춤거리다가 그냥 전당포에 있겠다고 했다.


“응, 뭐, 그냥. 잘 다녀와.”


차를 출발시킨 시현이 큰길로 나오자 금손이 골골거리면서 웃었다.


“저 녀석 같이 가고 싶으면서 나루를 만나는 게 껄끄러워서 저러지.”

“나루요?”

“응, 나루서점에 은롱이가 좀 껄끄러워하는 아이가 있거든.”


붙임성이 좋고 정이 많은 은롱이가 껄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시현은 조금 의아해하면서 인사동 쪽으로 차를 몰았다.


“통문관 뒤쪽 작은 길로 가면 되네.”


통문관(通文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서점으로 인문학의 보고라 할 만한 곳이다. 인사동의 많은 고서점들이 폐업하고 사라진 지금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현도 몇 번 들러보았는데 조리서는 거의 없지만 가치 있는 고서들이 많아 갈 때마다 감명 깊게 보곤 했었다.


“여기, 여기서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되네.”


금손의 말에 따라 우회전하자 시현이 처음 보는 작은 길이 나왔고 저만치 나루서점의 간판이 보였다.


“인사동에 남아 있는 고서점 웬만한 데는 다 들러본 줄 알았는데 여기는 처음 보네요.”

“음, 대중적으로 알려진 곳은 아니지,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곳이니까. 잠깐 요 옆에 차를 세우게.”

“예. 여기 마침 자리가 있네요.”

“음, 그리고 저쪽 잠깐만 보고 있어.”


시현이 고개를 길 건너편 쪽으로 돌리고 있다가 다시 돌아보니 금손은 예전에 본 백발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전처럼 도포를 입고 있지는 않고 셔츠와 재킷, 면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오, 스타일링 좋으신데요?”


시현이 칭찬하자 금손은 내심 흐뭇한 듯 한쪽 눈에 비스듬하게 댄 안대를 살짝 만졌다.


“자, 내가 죽림 바깥에서 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두 시간 정도니까 얼른 가서 일을 보세.”


금손을 따라 들어선 나루서점은 크진 않지만 단정한 느낌의 책방이었다. 벽의 고서들을 훑어본 시현은 한눈에 이 서점에 옛 살림살이에 관한 책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금손 선생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안에서 중년의 서점 주인이 반가운 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금손에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이네, 유 사장. 잘 지내셨는가.”

“예 저야 뭐 항상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책을 보러 오셨는지요?”

“오늘은 이 친구가 찾는 책이 있어서 왔다네. 옛날 조리서를 찾고 있지.”

“오, 젊은 친구가 옛 조리서에 관심이 있다니 대견하군요.”

“요리사라네. 옛 대령숙수 송가의 후손이고.”

“아 그렇습니까?”


유 사장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면서 시현을 보는 눈에도 흥미가 더해졌다.


“그렇다면 송 명인님 손자분이시겠습니다? 그 댁 아드님들은 다 요리를 안 하신다고 들었는데 손자분이 맥을 이으시는군요.”

“할아버지를 아십니까?”

“예 물론이죠. 요리하는 사람들이라면 송 명인님 직접 뵙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누구신지는 알지요.”

“자네는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유 사장의 너스레에 금손이 피식 웃자 유 사장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요리는 안 하지만 요리책을 수집하고 판매도 하잖습니까. 자, 송 선생님, 여기 잘 오셨습니다. 우리 책방이 크진 않지만 옛 조리서 보유량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일 겁니다.”


유 사장은 자신 있게 단언했고 금손도 머리를 끄덕이며 시현을 향해 말했다.


“유 사장이 흰소리를 좀 잘하긴 하지만 그 말은 맞는 말이야. 여기 원래 서점을 열었던 유 사장의 증조부가 요리책이라든지, 살림하는 방법이라든지, 농사짓는 법이라든지 등 말하자면 생활잡서 전문점으로 시작한 거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증조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양서를 높이 보고 살림살이 등에 대해 쓴 잡서는 문자 그대로 잡서라고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잡서도 양서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옛사람들의 살던 모습이나 생각을 아는 면에서 더 중요할 수도 있으니 생활잡서도 아끼고 모아줄 곳이 필요하다 하면서!”


그는 웅변하듯 가슴을 탕 쳤다.


“우리 나루서점을 여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안 돼도 굳건하게 이 서점을 지키고 있는 거고요.”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칠 뻔했다.


“증조부님이 훌륭한 분이셨네요.”


시현의 말에 유 사장은 만족스러운 듯 어깨를 펴더니 그제서야 물었다.


“그럼, 찾고 계시는 책은 어떤 책인지요?”

“송가미록이라는 조리서입니다. 제 고조부님이 쓰신 책이지요.”

“아하, 송가미록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금손 선생님도 한번 연락을 주셨지요. 송가미록을 찾고 계신다고. 송 선생님 때문이었나 보군요.”


유 사장은 고개를 저으면서 조금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저희 가게에 송가미록이 들어오진 않았는데요. 혹시 송가미록에 대해 알게 되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금손이 말했다.


“새로 들어온 조리서들이 좀 있지 않나? 한번 살펴볼 수 있을까?”

“아, 맞습니다. 그저께 들여온 책들 중에 조리서도 좀 있습니다. 아직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책들도 있는데 금손 선생님처럼 전문가가 봐주시면 감사하지요. 이쪽으로 오세요.”


안쪽으로 향하는 유 사장의 뒤를 따라가며 시현은 금손을 슬쩍 쳐다봤다.


‘여기 사장님이 금손 씨한테 연락한 것 같진 않은데 금손 씨는 새로 조리서가 들어왔다는 걸 누구한테 들은 거지?’


유 사장이 책방 안쪽의 문을 열며 말했다.


“새로 들여온 책은 아직 정리를 하지 않아서 매장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 한 마리가 깡충 뛰어나오며 아르릉 반갑게 짖었다.


“나루야, 오랜만이구나.”

“왕, 왕왕!”


금손 씨를 보고 반갑게 꼬리를 치며 인사하는 강아지는 어디서 사고라도 당했는지 앞다리 하나가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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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5. 맥적(1) +8 24.06.10 453 38 12쪽
41 24. 고종 냉면(3) +6 24.06.09 457 34 12쪽
40 24. 고종 냉면(2) +6 24.06.08 457 38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458 35 11쪽
38 23. 향설고 +5 24.06.06 464 41 12쪽
37 22. 몽중시(夢中市)(2) +4 24.06.05 467 41 13쪽
36 22. 몽중시(夢中市)(1) +5 24.06.04 475 40 12쪽
35 21. 나미와 미미(2) +7 24.06.03 476 40 11쪽
34 21. 나미와 미미(1) +5 24.06.02 475 39 12쪽
33 20. 경성 오므라이스(3) +6 24.06.01 485 46 11쪽
32 20. 경성 오므라이스(2) +6 24.05.31 485 41 12쪽
31 20. 경성 오므라이스(1) +5 24.05.30 484 3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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