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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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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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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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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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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8. 노리개(1)

DUMMY

딸그락!

시현이 숭늉 그릇을 떨어뜨렸다. 다행히 거의 다 마신 그릇이라 쏟아진 것은 몇 방울뿐이었다.


“여우 전당포요?”

“예. 무슨 말인지 몰라서 몇 번이나 다시 여쭤봤는데, 또 기억이 흐려지셨는지 그 이후로는 대답을 안 하시라고요. 꼭 돌려주고 싶은 물건인 것 같아서 저도 전해주고 싶은데 아무도 모르더군요.”

“왜 그러냐? 시현아. 괜찮아?”


시현의 놀란 얼굴을 보고 통역하던 주호가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어, 아니, 내가 좀 짐작 가는 게 있어서 그런다. 관장님 서울에 얼마나 더 계시냐?”

“사흘 더 계시지.”

“어, 그럼, 내가 좀 알아보고 내일이나 모레쯤 전화할게. 어쩌면 그 전당포를 찾아드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 그래? 다행이다. 나도 관장님 말 듣고 검색을 해봤는데 통 모르겠더라고.”


식사를 마치고 다과와 함께 한참이나 담소를 나눈 후에야 주호가 브랜틀리 관장을 호텔에 데려다주러 떠났고, 시현은 후다닥 죽림 전당포로 향했다.


-다라랑

풍경 소리가 울리자 세나가 내다봤다.


“시현 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웬일이세요?”

“잠깐 의논드릴 게 좀 있어서요. 금손 씨랑 은롱이 좀 불러 주세요.”

“나 여기 있어, 형아, 왜?”


거실에서 은롱이 고개를 쏙 내밀었지만 금손 씨는 보이지 않았다.


“금손 씨는?”

“중요한 볼일이 있다고 외출하셨는데. 아 마침 저기 오시네.”

“미야아옹.”


대답하듯 길게 끄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골목길 담벼락 위로 노란 고양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우아하게 담 위를 걸어오는 금손의 모습은 꽤나 관록 있어 보였다.

그 뒤로 몇 발짝 떨어져서 통칭 고등어 무늬라고 부르는 밤색 줄무늬 고양이와 흰색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가 찍힌 젖소 무늬 고양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담 위에서 살짝 뛰어내린 금손이 문으로 들어가며 시현에게 소곤거렸다.


“들어가세.”


금손을 호위하듯 따라왔던 길고양이 두 마리는 금손이 전당포로 들어서는 걸 보자 인사하듯 정중하게 야옹거린 후 돌아서서 사라졌다.


실내로 들어온 금손이 기지개를 길게 켰다.


“아이고, 우리 동네 대장냥이랑 옆 동네 짱냥이가 싸움이 나서 말이지. 자칫하다간 큰 패싸움이 날 거 같아 중재하러 다녀왔다네.”

“어, 음, 그런 일도 하십니까?”

“응. 연장자, 아니 연장묘의 책임이랄까, 뭐 그런 거지. 그래, 무슨 일로 이렇게 밤중에 뛰어왔나?”

“예, 실은······.”


시현의 이야기를 들은 금손과 은롱은 둘 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노리개라······.”

“예, 혹시 짚이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글쎄, 보기 전에는 잘 모르겠는걸.”


금손이 연둣빛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다.


“간호사 출신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아마 오십 년쯤 전에 독일에 간 사람일 거야. 그중 죽림과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 두어 명쯤 있기는 했지.”


1960년대 한국은 심각한 실업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반면 독일은 노동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간호 인력의 부족이 심한 상태였다.

1966년 독일 마인츠 대학의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대규모 간호사 파견이 시작된 이래 1976년까지 약 1만여 명의 간호 인력이 독일에 파견되었다.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에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자본 부족에 허덕이던 한국의 외화벌이에도 큰 기여를 했다.

요즘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고 이민자도 많지 않던 시절, 이국에 가서 일한다는 것은 현재의 우리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들 중에는 여러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에 살게 된 사람들이 많았고,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 파견되었던 광부들과 함께 유럽 한인 사회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시현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김명자 씨는 그 시절 외화를 벌기 위해 고국을 떠났던 젊은 간호사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브랜틀리 관장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가까운 가족이 없다. 한국에 오빠가 한 분 있었으나 몇 년 전 돌아가셨고, 법적인 보호자는 죽은 남편의 조카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녀에게 브랜틀리 관장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형, 그 사람 데리고 와 봐, 전하고 싶은 물건이 있다는 걸 보면 우리 손님일지도 몰라.”

“그래요. 만약 인연이 없다면 우리 전당포가 안 보이겠지만, 노리개라니 꼭 좀 보고 싶은데요.”


옛날 복식 문화에 흥미가 많아서인지 세나가 시현의 이야기에 유난히 관심을 보였다.


이틀 뒤, 브랜틀리 관장이 한국을 떠나기 전날, 일정이 모두 끝난 저녁 시간에 시현은 브랜틀리 관장의 호텔을 찾아갔다.

주호가 이미 당일의 통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고 사정상 다시 나오기는 어렵다 해서 시현은 다소 더듬거리는 영어로 브랜틀리 관장에게 안서동으로 같이 갈 것을 권했다.


“정말입니까? 그 전당포를 찾으셨나요?”

“예. 제가 아는 전당포가 있는데, 아무래도 관장님이 찾으시는 그 전당포 같습니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내일이면 독일로 떠나는데 명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고 돌아가게 될까 봐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브랜틀리 관장은 반색을 하면서 시현의 경차에 올랐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그새 비가 오네요.”


시현은 경차를 전당포 뒤쪽 빈터에 세우고 브랜틀리 관장을 앞쪽으로 안내했다.

인연이 있는 물건을 지니고 있으니 전당포가 보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혹시라도 그에게 전당포가 안 보일 경우를 생각해서 아무 말 없이 브랜틀리 관장의 반응을 살폈다.

브랜틀리 관장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죽림 전당포의 간판을 쳐다보는 걸 보니 그에게 전당포가 보이는 게 확실했다.


“여우 얼굴이군요. 로고 디자인이 간결하고 세련되었는데요? 색감이나 글자와의 균형감도 좋고, 전당포 간판이라기에는 디자인이 상당히 훌륭합니다.”


미술관 관장 아니랄까 봐 브랜틀리 관장은 전당포를 보자마자 간판의 로고를 보고 흥미로워했다.

시현도 죽림의 간판이 멋스럽다고는 생각했지만 전문가가 그렇게 평하는 걸 보니 새삼스러워서 간판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비가 와서 그런가, 분위기가 상당히 묘하네요.”


브랜틀리 관장이 전당포를 살펴보며 말했다.


-다라랑

풍경 소리와 함께 시현과 브랜틀리 관장이 함께 죽림 전당포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거실의 책상에서 세나가 일어섰고 브랜틀리 관장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실내를 훑어보았다.


“전당포라더니, 제가 생각한 전당포와는 전혀 다른데요. 굉장히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관장이 말을 하자마자 시현이 흠칫 놀랐다.

방금 문 바로 바깥에서 로고 이야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브랜틀리 관장은 영어를 하고 있었고, 시현은 듣는 것은 어느 정도 되지만 말하기가 힘들어서 대꾸할 때마다 버벅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내에 들어오자마자 브랜틀리 관장의 말이 영어라는 느낌이 전혀 없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거였다.

마치 검정고양이 나미가 이 전당포 내에서는 전혀 문제없이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세나가 브랜틀리 관장을 소파 쪽으로 안내했고 시현은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시현이 커피와 복숭아정과를 쟁반에 받쳐 들고나오자 브랜틀리 관장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사실은 제가 여기서 일한답니다. 전속 요리사지요.”


시현이 대답하자 브랜틀리 관장이 놀라서 그를 다시 보았다.


“갑자기 왜 영어가······, 아니, 영어가 아닌가? 말이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들리죠?”


놀란 브랜틀리 관장을 보면서 세나가 살짝 웃었다.


“죽림은 그런 곳입니다. 어떤 손님과도 자유롭게 대화가 가능하지요. 자, 이거 하나 먼저 드세요.”


브랜틀리 관장은 얼떨결에 세나가 권하는 세뇌용 복숭아정과를 받아먹고는 잠시 후 세뇌가 완료된 얼굴, 그러니까 편안하게 수긍하는 얼굴이 되었다.


“들어올 때부터 좀 신비로운 곳이라는 느낌을 받긴 했는데 정말이군요. 특별한 곳이었어요. 음, 혹시 사진을 좀 찍어도 될까요?”

“안 됩니다. 여기는 비밀의 공간이거든요.”


세나가 얼굴에 미소를 띤 채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브랜틀리 관장이 조금 실망한 얼굴로 복숭아정과를 하나 더 집어 먹는데 이층에서 은롱과 금손이 살랑살랑 내려와 세나의 양쪽 옆에 나뉘어 앉았다.

브랜틀리 관장이 시현을 향해 머리를 돌리면서 헛웃음을 웃었다.


“여우와 고양이라, 동화 속의 세상 같군요. 송시현 씨, 절 도대체 어디에 데려오신 건가요. 제가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요?”


세나가 빙그레 웃었다.


“여기는 죽림,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 줄 특별한 대나무숲입니다. 자, 브랜틀리 관장님, 가지고 오신 물건을 보여주세요. 죽림에 돌려줄 물건이라고 하셨다면서요?”

“예. 여기 있습니다.”


브랜틀리 관장은 가방에서 나들나들 낡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입구를 조인 실이 해져 떨어졌는지 조임 매듭도 없이 허술하게 벌어진 주머니 안에서 그가 꺼낸 것은 낡은 노리개였다.

흔히 보는 삼작노리개 등과는 다른 형태로, 통통한 부채를 두 개 이어놓은 듯한 백동 형태의 몸체 아래로 색바랜 수실 매듭이 늘어져 있었다.


“이렇게 생긴 노리개는 처음 보네요?”


시현이 무심코 말했지만 세나는 왠지 눈빛이 촉촉해지면서 손가락 끝으로 노리개를 살짝 쓰다듬었다.


“이건 바늘집 노리개네요.”

“바늘집 노리개요?”

“예.”


세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노리개 몸체의 백동 장식 윗부분을 살짝 당겼다.

딸깍 소리가 나면서 노리개가 두 쪽으로 벌어지고 위쪽이 열렸다.


“침낭(針囊)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윗부분이 뚜껑이고 아래쪽 공간에 바늘을 담는 거예요. 이렇게 자주 쓰는 물건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장신구로 몸 가까이 두는 게 옛사람들의 멋이기도 했죠.”


세나의 말에 따르면 바늘집 노리개는 비단에 수를 놓아 만든 것도 있고 가죽으로도 만들고 금속으로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 바늘집 노리개는 장식 없는 백동으로 단순하게 만들었지만, 칠보 공예를 하거나 금은으로 장식한 화려한 것도 있어요. 아, 아직도 바늘이 있네요.”


세나는 말하면서 백동 몸체 안쪽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원래는 바늘이 녹슬지 말라고 여기다 머리카락을 채워요. 거기다 바늘을 꽂아두는 건데 이건······, 머리카락이 아니고 새의 깃털이네요.”


시현도 세나가 보여주는 바늘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부드러운 담홍색 털이 몽글몽글 들어 있고 그 안에 은빛 바늘이 세 개 꽂혀 있었다.


세나가 노리개를 향해 긴 속눈썹을 내리깔면서 읊조리듯 말했다.


“그래요. 이 바늘집 노리개는 분명히 죽림과 인연이 있어 보이는군요. 은롱아, 어때?”


세나가 묻자 은롱이가 노리개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그러네, 노리개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데, 한번 들어 볼까?”

“저, 관장님이 계신데 괜찮을까?”


시현이 말하자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실 때는 기억하지 못하실 테니까요.”


세나가 은롱의 앞에 노리개를 놓자 은롱이 코가 맞닿을 정도로 노리개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노리개 주위에 은은한 안개가 서리기 시작하는 걸 보고 브랜틀리 관장은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눈치껏 조용히 하고 있었다.


노리개에서 나온 안개가 살짝 짙어지면서 사람들의 시야가 흐려졌다.

백동바늘집노리개.JPG


작가의말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백동 바늘집 노리개입니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공공누리 자유이용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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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6. 조우 +7 24.06.14 488 36 12쪽
45 25. 맥적(4) +9 24.06.13 480 38 13쪽
44 25. 맥적(3) +4 24.06.12 480 35 12쪽
43 25. 맥적(2) +6 24.06.11 481 33 12쪽
42 25. 맥적(1) +8 24.06.10 488 39 12쪽
41 24. 고종 냉면(3) +6 24.06.09 494 34 12쪽
40 24. 고종 냉면(2) +6 24.06.08 493 38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493 36 11쪽
38 23. 향설고 +5 24.06.06 500 42 12쪽
37 22. 몽중시(夢中市)(2) +4 24.06.05 504 42 13쪽
36 22. 몽중시(夢中市)(1) +5 24.06.04 510 40 12쪽
35 21. 나미와 미미(2) +7 24.06.03 511 41 11쪽
34 21. 나미와 미미(1) +5 24.06.02 513 39 12쪽
33 20. 경성 오므라이스(3) +6 24.06.01 524 47 11쪽
32 20. 경성 오므라이스(2) +6 24.05.31 524 4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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