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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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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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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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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9. 연잎밥

DUMMY


토요일, 시현은 금손과 은롱과 함께 나루서점을 찾았다.


“난 안 오려고 했는데, 세나 누나랑 가게 본다니까.”


은롱이 뺨을 부풀렸지만 금손이 살살 달랬다.


“내가 변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짧은 거 알잖니? 시현이가 오늘 솜씨를 발휘할 건데 시간이 걸리는 요리라서,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내가 고양이로 돌아가 버리면 어쩔 것이냐? 우리 은롱이가 옆에서 힘을 불어넣어 줘야 내가 편안하게 오랫동안 사람 모습을 유지하지.”

“나루도 할 수 있을 건데.”

“나루는 은롱이보다 어리지 않으냐. 우리 은롱이만큼 힘이 없지. 그리고 외부인, 아니 외부 신수 아니냐. 내가 우리 은롱이를 두고 왜 다른 신수에게 부탁하겠니.”


금손이 은롱을 추켜세워 주자 은롱은 아닌 척하면서도 콧등이 씰룩씰룩하는 게 뿌듯한 모양이었다.


“금손 씨가 그렇게 내가 필요하면 어쩔 수 없지. 같이 가야지 뭐!”


***


나루서점 앞 길에 유 사장이 나루를 데리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왕, 왕왕!”


은롱을 발견한 나루가 귀를 펄럭거리며 세 다리로 달려와서 은롱에게 덤벼들며 손을 핥았다.

은롱이가 새치름하게 고개를 외로 꼬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유 사장이 얼른 나루를 잡았다.


“우리 나루가 은롱이를 기억하는구나. 그런데 은롱이는 강아지를 별로 안 좋아하나? 지난번에 왔을 땐 잘 놀았던 것 같은데. 혹시 불편하면 나루 목줄을 할까?”


유 사장이 은롱이에게서 나루를 떼어내며 묻자 나루는 금방 슬픈 표정이 되어서 끼이잉 울며 귀를 축 늘어뜨렸다.


“괜찮아요. 그냥 두세요.”


은롱은 인심을 쓴다는 듯 나루에게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고 나루는 기쁜 듯이 까만 눈을 반짝이며 은롱의 옆에 붙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바로 집이 나옵니다.”


유 사장의 안내를 따라 서점 뒤쪽 길로 돌아가니 골동품상과 전통찻집이 있고 그다음에 유 사장의 살림집이 있었다.


“원래는 서점과 살림집이 붙어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서점 규모가 축소되어서 살림집과 서점 사이에 다른 가게가 들어왔어요.”


시현은 유 사장의 말을 듣고 서점과 살림집 사이의 거리를 눈대중해 보았다.


“옛날에는 훨씬 더 큰 서점이었나 봐요.”

“저 골동품상 자리까지가 다 서점이었지요. 그리고 전통찻집 자리는 증조부님과 그 친우분들이 모여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시던 곳이고요.”


시현이 처음 죽림 전당포에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봤을 때 그는 저자가 요리사인 줄 알았다.

제자의 가업이 식당이 아니고 서점이라길래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위관(韋觀) 이용기는 전문 요리사가 아니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것’을 모아 남기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재야 지식인이었다.


이용기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외에 십 년에 걸려 조선 가요를 모은 ‘악부’도 편찬했고 조선어사전 편찬 일에도 참여했었다.

그런 만큼 이용기의 제자 역시 요리사가 아니라 실학자에 가까워서 가업이 요리사가 아니라 서점, 그것도 생활 관련 도서를 주로 다루는 서점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손님들 오셨네. 어서 오세요.”


살림집의 현관에는 가냘픈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여든이 훌쩍 넘으셨다고 들었는데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곱고 정정한 모습이었다.


“어머니, 나오지 마시라니까, 넘어지시면 어쩌려고 나오셨어요.”


유 사장이 서둘러 다가가서 노부인을 부축했지만 노부인은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호호 소녀처럼 웃었다.


“이 늙은이한테 맛난 거를 해줄 손님이 오신다면서. 그럼 내가 마중을 나와야지.”

“안녕하십니까, 성 여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금손이 점잖게 인사를 건네자 노부인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 금손을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예, 전에 서너 번 뵈었습니다.”

“그래요. 그런 것도 같은데 생각이 잘 안 나네. 미안해요.”


노부인은 은롱이를 보더니 반가운 듯이 웃었다.


“예쁜 꼬마 손님은 기억나네. 전에 왔었지? 우리 나루 친구 아니니?”

“왕 왕!”


나루가 귀를 팔락거리며 맞장구를 쳤고 은롱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쪽 총각도 내가 만나본 적이 있던가?”

“아니요. 저는 처음 뵙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다!”


아는 사람을 기억 못 하는 게 아니라서인지 노부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호명아, 이것 봐. 이분은 내가 기억 못 하는 게 아니고 처음 보는 총각이 맞아!”


노부인이 아들을 향해 어린애처럼 자랑스럽게 손짓을 하자 유 사장도 웃었다.


“예. 맞아요. 이제 들어가시죠.”


아들의 몸에 의지해서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가는 노부인의 자그마한 등을 보며 시현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생각이 났다.

시현의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아마 큰아들 부부를 앞세운 슬픔을 이기지 못하셨던 것 같다.


“우리 현이, 내가 살아서 우리 현이를 돌봐야 할 텐데 할머니 몸이 이래서 할머니가 미안해.”


몸이 좀 괜찮을 때면 시현의 손을 잡고 토닥거리던 할머니는 돌아가실 즈음에 지금 유 사장의 모친처럼 가까운 일의 기억을 잘 못 하셨다.


오래전 일은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시면서 가까운 일을 점점 잊어가더니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아들 부부의 교통사고 직전까지 기억이 퇴행했었다.

그때 할머니는 몇 년간 할머니를 괴롭히던 아들 부부의 교통사고를 잊었고 덕분에 예전의 밝고 명랑한 할머니로 돌아왔었다.


시현은 할머니가 부모님의 사고를 잊어버린 게 차라리 잘된 일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


"왕, 왕왕!"


나루가 은롱의 바짓자락을 잡아끌었다.


"뒤뜰로 놀러 나가자고 하는 모양이구나."


은롱은 마지못한 듯 나루에게 끌려 뒤뜰로 나갔고, 금손과 유 사장, 노부인이 거실에 앉아 담소하는 동안 시현은 주방에서 일을 시작했다.


“저기, 총각, 나 죽 말고 밥을 먹고 싶은데.”


잠시 후 주방에 머리를 들이민 노부인이 살짝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예?”

“내가 늙었다고 자꾸 죽을 주거든. 죽도 괜찮지만 나 아직 밥도 잘 먹을 수 있는데. 오늘 메뉴가 죽은 아니지?”

“예 아니에요. 앉아계시면 제가 밥 맛있게 지어 올릴게요.”


시현이 말하자 노부인은 신이 난 듯 아이처럼 손뼉을 치고는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아마 도우미나 돌보는 분이 죽을 많이 해드렸던 모양이지?


시현은 집에서 가져온 오지 탕관, 그러니까 질그릇 솥을 꺼냈다.

이 오지 탕관은 할아버지의 유물이다. 고조부로부터 증조부, 다시 할아버지에게로 내려온 물건이라고 했으니 송윤수도 이 오지 탕관을 썼을 것이다.


규합총서에 보면 ‘밥과 죽은 돌솥이 으뜸이요, 오지 탕관이 그다음이다.’라는 구절이 있고,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도 ‘밥을 짓는 그릇은 석정(돌솥)이 첫째요, 오지 탕관이 그다음이고 무쇠솥이 셋째요, 통노구(구리솥)가 하등이다.’라는 글이 있다.


시현은 할아버지 밑에서 요리를 공부할 적에 돌솥도 물론 써 보았지만 개인적으로 오지 탕관의 밥맛을 좋아했다.

오지 탕관이라 해도 다 같은 것이 아니어서, 할아버지가 갖고 계시던 질그릇 솥이나 냄비가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 시현이 특히 좋아했던 것이 오늘 가져온 오지 탕관이었다.

유난히 시현의 손과 잘 맞았고, 시현의 입맛에는 이 오지 탕관의 밥맛이 다른 솥의 밥맛보다 훨씬 좋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살림을 정리할 때 삼촌이 대부분의 물건을 처분했지만 시현은 신경 써서 이 오지 탕관을 챙겼다.


지금은 자리에 누운 호반 신 사장의 환갑 때 일이다. 신 사장은 자식이 없어 조카인 기석이 환갑잔치를 맡아 치르게 되었다.

당시 2호점의 주방장이었던 기석은 유명호텔 뷔페에서 잔치를 치르고 싶어 했지만 신 사장이 손사래를 쳤다.


“야, 뭐 큰 잔치라고 그렇게 거창하게 하려고. 우리 다 요리사인데 뭣 하러 남이 한 음식으로 잔치를 해?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 식당에서 가까운 손님들만 모시고 단출하게 하자. 기석이랑 시현이랑 맡아서 해봐라.”


기석은 입이 불룩 튀어나와서 투덜거렸다.


“맨날 주방에서 사는데, 이럴 때라도 남이 한 요리 좀 먹어보지, 늘 일하는 식당 말고 보란 듯이 근사한 호텔에서 잔치 한번 치르면 좀 좋아! 큰아버지도 고집은!”


기석과 시현이 메뉴를 짜고 직원들과 함께 잔치를 준비했는데, 시현이 집에서 오지 탕관을 가지고 왔었다.


식당에서는 물론 전기밥솥을 쓰고 요즘 전기밥솥은 밥도 잘된다. 하객을 많이 부르진 않을 거라지만 하객 전체가 먹을 밥을 오지 탕관에 할 수도 없고.

시현은 단지 날이 날이니만큼 신 사장께만이라도 좀 특별한 밥을 해드리고 싶었다.


“어이고! 요즘 전기밥솥도 얼마나 밥이 잘되는데 하여간 티를 내요, 티를 내!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도 모르냐?”


오지 탕관에 따로 신 사장 부부 몫의 밥을 하는 시현을 보면서 기석이 빈정거렸지만 시현은 그냥 웃으면서 밥을 안쳐 놓고 바삐 다른 요리들을 했었다.


기석의 말처럼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고 좋은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형편없는 도구로도 좋은 결과를 낼 정도로 솜씨가 있다는 거지 손에 맞고 좋은 도구가 있으면 더 훌륭한 결과를 낼 수 있는 법이다.

옛적 추사 김정희 선생도 명필 중의 명필이지만 도구를 가리는 것으로도 유명하지 않았나. 좋은 붓과 좋은 종이에 대한 열망도 강렬했고.


기석과 시현의 지휘 아래 직원들이 바삐 움직인 끝에 잔치는 무사히 잘 치러졌고 요리들도 하나같이 좋은 평을 받았다.


“오늘 다들 수고 많았다. 기석이랑 시현이도 애썼고.”


고생한 직원들에게 기분 좋게 금일봉을 골고루 나눠준 신 사장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 밥은 누가 했나? 평소보다 밥이 너무 잘됐던데. 솥밥이지? 정말 맛있었다.”

“시현 형님이 집에서 가져오신 오지 탕관에 했다 아입니까. 사장님 진지만 따로!”


홀 담당 성훈이 얼른 대답했고 신 사장은 기분 좋게 시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이고 그래? 일부러 솥을 가져왔구나? 내가 송 명인 댁에 내려오는 솥에 한 밥을 먹었구만. 이거 영광이네, 고맙다. 시현아.”


그때만 해도 사장님이 건강하셨는데.

시현은 오지 탕관을 어루만지면서 신 사장을 생각했다.


***


조리 시간을 좀 줄이려고 집에서 미리 찹쌀, 멥쌀, 흑미를 깨끗이 씻어 물에 불리고, 콩도 물에 불려서 삶아 놓은 걸 가져왔다.

은행과 밤, 단호박도 손질해서 준비하고 연근은 씻어서 껍질을 벗긴 후 얄팍얄팍하게 썰어 준다.

밥물에 소금을 한 술 넣고 밥을 안친 뒤 그동안 연저육찜과 궁중 오이생채를 한다.


“연잎밥 준비하고 있어? 형?”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주방에서 뒤뜰로 난 쪽문에서 은롱과 나루가 같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응.”

“흐앙, 냄새가 구수하고 너무 좋다.”

“왕왕! 배고파지는 냄새야!”


천적이 어쩌고저쩌고하더니 둘이 사이좋게 잘만 노네.


오지 탕관에서 김이 폭폭 나면서 구수한 밥 내음이 피어오르고 연저육찜도 자글자글 침샘을 자극하는 향기를 풍겼다.

밥이 다 되면 연잎을 펼치고 밥을 한 주먹씩 넣고 고명을 올려서 반듯반듯하게 접는다.


김 오른 찜기에 연잎으로 싼 찰밥을 담아서 찌자 은은한 연잎 향이 주방 안에 그윽하게 퍼졌다.




연잎밥2개f.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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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5. 맥적(3) +4 24.06.12 441 34 12쪽
43 25. 맥적(2) +6 24.06.11 442 33 12쪽
42 25. 맥적(1) +8 24.06.10 453 38 12쪽
41 24. 고종 냉면(3) +6 24.06.09 457 34 12쪽
40 24. 고종 냉면(2) +6 24.06.08 458 38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458 35 11쪽
38 23. 향설고 +5 24.06.06 464 41 12쪽
37 22. 몽중시(夢中市)(2) +4 24.06.05 467 41 13쪽
36 22. 몽중시(夢中市)(1) +5 24.06.04 475 40 12쪽
35 21. 나미와 미미(2) +7 24.06.03 476 40 11쪽
34 21. 나미와 미미(1) +5 24.06.02 476 39 12쪽
33 20. 경성 오므라이스(3) +6 24.06.01 486 46 11쪽
32 20. 경성 오므라이스(2) +6 24.05.31 486 41 12쪽
31 20. 경성 오므라이스(1) +5 24.05.30 486 37 12쪽
» 19. 연잎밥 +7 24.05.29 487 42 12쪽
29 18. 연저육찜 +7 24.05.28 509 4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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