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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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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새글

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최근연재일 :
2024.06.28 18:50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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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7,577

작성
24.06.2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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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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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글자
12쪽

30. 첫 번째 선물(1)

DUMMY

시현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사진으로는 그릇 안의 내용물까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 안에 관장이 직접 만든 수제비가 들어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 주호 씨에게 물어 송시현 씨의 이메일 주소를 받았습니다. 제가 서툰 솜씨로나마 시현 씨가 준 조리법대로 수제비를 만들어 봤습니다. 레시피가 좋아서 그런지 명이 정말 맛있게 먹고 행복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현 씨. 추억의 수제비 덕분인지 몰라도 명의 기억이 조금 더 돌아온 것 같고 언어 구사 상태도 전보다 나아졌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놀라더군요.

그리고 전당포의 아가씨가 준 브로치 말입니다. 명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홍이라고 부르더군요.


시현은 브랜틀리 관장의 이메일을 죽림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음, 다행이군. 그 명자 씨라는 분, 그리워했던 수제비를 먹고 심리적으로 많이 도움이 됐을 거야.”


금손이 말했고 세나도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노리개의 기억이 분명해서 몽로도 꽤 진한 게 나왔어.”


은롱이 말했고 시현이 은롱을 살짝 보았다.


“그것도 먹을 거야?”

“응!”


은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뽑아낸 몽로니까 좀 더 숙성시킨 다음에 먹으면 좋을 것 같아. 요리는······.”


은롱은 시현을 보며 눈을 반달처럼 접었다.


“수제비에 넣어 줘.”


***


“···♪···♬···”


잠들어 있던 시현은 어디선가 낮게 읊조리는 듯한 소리를 듣고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여긴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니 푸르스름한 안개가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주변이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숲속인 것 같았다.

안개 속으로 길쭉하게 위로 뻗은 장대 같은 나무줄기가 흐릿하게 보였다. 대나무인가?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서려니 손에 흙이 느껴졌다.

죽림에서 좀 늦게 집에 돌아왔고, 몸이 좀 피곤해서 씻고 바로 잠이 들었는데 왜 이런 곳에서 깬 걸까? 아직 꿈속인가? 시현은 눈을 비볐다.


“♪···♬···♩”


어디선가 은은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듣기 좋은 음정으로 울리는 대금 같은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왠지 시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시현은 몸을 일으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대금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조금씩 뚜렷해졌다.

살짝 뿌옇게 흐려진 안개를 헤치고 나가자 바위 위에 걸터앉은 사람이 보였다.


은빛 머리와 흰옷, 금빛 눈에 매혹적인 얼굴, 등 뒤로 공작의 깃처럼 펼쳐진 아홉 개의 탐스러운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 왔느냐?”


남자가 입가에 대고 있던 대나무 피리를 내려놓더니 혼을 빨아들일 듯한 눈매로 싱긋 웃었다.


은롱이 어른이 되면 이렇게 자라겠다 싶은 남자였는데 은롱보다 훨씬 몽환적인 느낌이 강했다.

키가 190cm는 될 법한 장신의 남자인데도 요염한 분위기가 풍기는 게 과연 구미호구나 싶었다.


“세루 님이십니까?”


시현이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반갑구나, 네가 송윤수의 후손이지?”

“예, 송시현입니다.”


세루는 걸터앉아 있던 바위에서 일어나더니 시현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그를 뜯어보았다.


“그렇구나, 송가의 후손을 여러 명 보았지만 너 같은 기운을 가진 아이는 없었지. 과연 윤수의 뒤를 이을 만하구나.”

“이건, 꿈인가요?”


시현이 몽롱한 가운데 묻자 세루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꿈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

“네 육신은 잠들어 있고, 영만 이곳으로 불려온 거란다. 아, 물론 내 몸도 진짜는 아니야. 너의 영이 내 영을 만나러 온 거라고나 할까.”

“······.”

“아무튼, 네가 수행을 아주 잘 해내고 있어서 생각보다 더 빨리 첫 번째 선물을 줄 수 있게 되었구나.”

“선물이요?”

“음, 금손이에게 듣지 않았느냐?”


세루가 한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머리카락이 살풋 흩날리며 마치 은사처럼 반짝였다.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쿵할 뻔했네. 이야, 진짜 원숙한 구미호란 저런 거구나. 왜 구미호는 사람을 홀린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아.

세루가 여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지 만약 여자 구미호가 내 앞에서 저렇게 요염한 모습을 보였으면 내 손으로 간을 빼다 바쳤을지도 모르겠네.


“네가 송가미록의 보이지 않는 요리 한 가지를 읽을 수 있게 될 때마다 내가 능력 하나를 선물로 주기로 윤수와 약속했거든.”

“아, 네.”


시현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다시 말했다.


“하지만 제가 아직 한 가지도 제대로 읽지 못했는데요.”


세루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아니다. 너도 모르는 새 아주 훌륭한 성취를 이뤘단다. 돌아가면 알게 될 것이다.”

“네에······.”

“나도 너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구나. 네가 빠른 성취를 이룬 덕분에 내가 오랜 잠에서 깨어 잠시나마 육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죽림도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고.”


세루의 말로 미루어 보면 세루는 어딘가 세상과 단절된 곳에 있어서 육신은 물론 영의 눈 또한 감겨 있는 모양이었다.

시현이 비밀 요리 한 가지를 읽어낼 때마다 능력 한 가지를 선물로 주기로 한 약속 덕분에 세루가 잠시 눈을 떴고, 겸사겸사 죽림의 현재 근황도 살짝 살펴볼 수 있었던가 보다.


“우리 은롱이와 잘 지내줘서 고맙구나. 역대 죽림 요리사 중 너처럼 빠른 시일 내에 죽림 식구들과 가족처럼 융화된 사람은 몇 명 없었단다. 자, 나도 오래 머물 수는 없으니 우선 선물부터 줄까.”


세루가 시현의 눈앞으로 훅 다가서는 바람에 시현은 깜짝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금빛 눈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차가운 손가락이 이마에 닿았다.

시현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자 차가운 손가락이 시현의 이마에서부터 눈두덩까지 부드럽게 쓸어 내려왔다.

세루의 손가락이 닿은 눈꺼풀에서부터 뭔가 시원하면서도 살짝 찌르는 듯한 기운이 눈으로 들어와 머릿속까지 퍼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박하처럼 화한 향이 나는 서늘한 물이 세루의 손가락으로부터 시현의 눈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세루가 나직한 목소리로 주술처럼 읊조렸다.


“요리의 기본은 식재료 구분부터 시작하지. 첫 번째 선물은 식재료 구분의 능력이란다. 신선하고 좋은 식재료, 진짜와 가짜 식재료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바깥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식재료까지 속속들이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세루가 손가락을 떼었고 시현이 잠시 후 눈을 떴다.


“기분이 어떠냐?”


세루가 물었고 시현이 살짝 눈을 비볐다.


“눈이 조금 화한 것 같긴 한데 불편할 정도는 아니고 상쾌한 느낌입니다.”

“그래? 역시 잘 받아들이는구나. 거부 반응이 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세루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짓고는 다시 바위에 턱 걸터앉더니 손뼉을 딱 쳤다.


“자, 그럼 내가 할 일은 했고, 이제 여기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으니 급한 거 좀 물어보마.”

“예?”

“우리 은롱이 요즘 밥은 잘 먹느냐?”

“······ 아, 예. 잘 먹습니다. 음식을 조금 가리기는 합니다만 미식가라서 맛을 아주 잘 알고요. 한동안 밥투정이 좀 심했다지만 제가 온 이후로는 곧잘 먹습니다. 세나 씨 말로는 편식도 많이 고쳐졌다고 합니다.”

“응, 그 녀석이 날 닮아 맛에 예민하지. 키는 얼마나 컸더냐? 내가 잠깐 죽림을 훑어보기는 했다만 키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서 말이야.”

“아, 이 정도 됩니다.”


시현이 제 허리와 골반 사이를 손으로 짚어 보이자 세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구미호는 워낙 성장이 느리니까, 그 정도면 괜찮구나.”


세루는 세상 신중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시현이 말한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구미호의 모습에서 흔한 아버지의 분위기로 변한 세루를 보니 좀 당황스러웠지만 시현은 성심껏 죽림 식구들의 안부를 전했다.


“내가 좀 팔불출같이 보이지? 우리 은롱이는 엄마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내가 혼자 키운 자식인데 나도 사정상 그 애를 이렇게 일찍 혼자 두고 떠나게 되어서 마음이 많이 쓰인단다. 그래도 금손이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우리 금손이 건강은 좀 어떠냐? 세나는 잘 있고?”

“금손 씨 건강은 괜찮아 보이십니다. 얼마 전에는 타락죽을 드셨는데······.”


시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안개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앞 바위에 걸터앉은 세루의 모습이 안개에 가려 점점 흐려졌다.


“이런, 이제 시간이 다 되었구나. 아쉽지만 가야 하겠다. 시현이라고 했지? 너 빨리 송가미록을 더 터득하도록 하여라. 그래야 나도 다음 선물을 주러 와서 또 만날 수 있지. 잘 가거라. 우리 은롱이를 잘 부탁한다.”


세루의 몸이 안개 속으로 흩어지면서 금빛 눈만 남아 잠시 반짝이다가 누군가 불을 탁 끈 것처럼 사라졌다.


***


시현은 눈을 떴다. 흐릿하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지면서 반지하 방의 얼룩덜룩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꿈이었구나. 그런데 꿈치고는 너무 생생한데. 혼을 빨아들일 듯한 금빛 눈과 차가운 손가락의 감각이 아직 뚜렷하게 느껴졌다.


시현은 머리를 힘껏 흔들고는 부스럭부스럭 일어나서 씻고 밖으로 나왔다.


‘꿈이 너무 생생해, 죽림에 가서 금손 씨에게 좀 물어봐야겠어.’


어쩌면 송가미록을 읽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 꿈을 꿨는지도 몰랐다. 몇 자만 더 읽으면 향설고의 비밀 조리법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지막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게 영 답답했기 때문일까.


‘장에 좀 들렀다 가자.’


죽림 식구들 오늘 점심은 뭘 해주면 좋을까? 시현은 설렁설렁 걸어서 시장으로 향했다.


“오이가 쌉니다, 싸요! 가지도 아주 물이 좋습니다. 제철 가지 들여가세요!”

채소가게 아저씨가 목청 좋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정말 물 좋은 가지들이 쌓여 있었다.


‘은롱이가 아이답지 않게 가지를 좋아하지. 저번에 가지 라자냐를 해줬더니 아주 잘 먹었는데, 가지 좀 사갈까?’


채소가게 앞에 섰던 시현이 순간 흠칫 놀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뭐지?’


시현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왜 이런 게 보이는 거지?’


시현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시장에 다닌 터라 식재료 보는 눈이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자마자 채소의 좋고 나쁜 정도가 한눈에 보이는 일은 없었다.

가까이 보거나 손에 들고 본 것도 아닌데 어떤 채소가 싱싱한지, 어떤 채소가 조금 시들한지, 어떤 채소가 농약이 많이 묻었는지 마치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가지만 해도 그냥 보기엔 모두 고운 보라색이고 표면에 흠집이 없어 다 질이 좋아 보였다.

가지를 고를 때는 보통 눈으로 본 뒤 꼭지 부분을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 본다. 꼭지 부분이 생생하고 따끔한 가시가 있는 게 신선한 가지인데, 가끔 겉으로 보기엔 아주 생생해 보이지만 집에 가서 잘라 보면 속의 색이나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다.

겉은 멀쩡하지만 맛만 좀 떨어지는 이런 가지는 숙련된 요리사라도 쉽게 잡아내기 어려운데, 눈앞에 있는 가지 중 몇 개가 그런 것이 한눈에 보였다.


오이의 신선도는 육안으로도 알기 쉽지만, 어떤 것이 쓴맛이 강할지 어떤 것이 시원한 맛이 강할지까지 보기만 하고 알 수 있는 것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이거, 어젯밤 꿈이 꿈이 아니었던 걸까?’


시현은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식재료의 좋고 나쁨이나 달고 쓰고 신 속맛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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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30. 첫 번째 선물(2) +7 24.06.22 413 46 12쪽
» 30. 첫 번째 선물(1) +5 24.06.21 413 42 12쪽
52 29. 수제비(2) +10 24.06.20 412 43 12쪽
51 29. 수제비(1) +6 24.06.19 418 44 12쪽
50 28. 노리개(2) +8 24.06.18 424 39 12쪽
49 28. 노리개(1) +8 24.06.17 426 43 12쪽
48 27. 콩나물밥(2) +5 24.06.16 424 38 13쪽
47 27. 콩나물밥(1) +5 24.06.15 482 36 12쪽
46 26. 조우 +7 24.06.14 488 36 12쪽
45 25. 맥적(4) +9 24.06.13 480 38 13쪽
44 25. 맥적(3) +4 24.06.12 480 35 12쪽
43 25. 맥적(2) +6 24.06.11 480 33 12쪽
42 25. 맥적(1) +8 24.06.10 488 39 12쪽
41 24. 고종 냉면(3) +6 24.06.09 494 34 12쪽
40 24. 고종 냉면(2) +6 24.06.08 493 38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493 36 11쪽
38 23. 향설고 +5 24.06.06 499 42 12쪽
37 22. 몽중시(夢中市)(2) +4 24.06.05 504 42 13쪽
36 22. 몽중시(夢中市)(1) +5 24.06.04 510 40 12쪽
35 21. 나미와 미미(2) +7 24.06.03 511 41 11쪽
34 21. 나미와 미미(1) +5 24.06.02 513 39 12쪽
33 20. 경성 오므라이스(3) +6 24.06.01 524 47 11쪽
32 20. 경성 오므라이스(2) +6 24.05.31 524 4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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