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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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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최근연재일 :
2024.06.2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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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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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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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26. 조우

DUMMY

다섯 살에 부모를 잃은 시현이기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삼촌은 그에게 유일한 가족이었고 더 애틋한 존재였다.

그런 삼촌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았을 때 시현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올리고 위아래로 쓸었다. 삼촌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 속에서 둔중한 아픔이 일어서 생긴 버릇이었다.


집에 돌아가려던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죽림으로 발길을 돌렸다.

휴일이라 출근할 필요가 없는 날이었지만 왠지 죽림 식구들이 보고 싶었다.


“얼굴이 왜 그런가? 오늘 갔던 일이 잘 안 되었나?”


양지바른 창가 소파에서 그루밍을 하고 있던 금손이 시현이 들어서는 걸 보고 놀란 듯 냐아옹 울었다.


“아뇨, 강민우 씨네 일은 잘 됐어요. 그냥 제가 좀 울적한 기억이 떠올라서요.”

“저런, 이리 오게, 내가 골골송 좀 불러주지.”


시현이 금손의 옆에 앉자 노란 고양이는 앞발로 시현의 팔을 끌어안고는 골골골 목을 울리기 시작했다.


“형아 왜애? 주말인데 요리하고 와서 피곤해?”


이층에서 돌돌돌 구르듯 내려온 은롱이 소파 등받이에 기어 올라가더니 작은 손으로 시현의 어깨를 통통통 두드렸다.

거실 책상에 앉아서 일을 보던 세나가 그들을 힐끗 보고 주방에 들어가더니 사향커피 한 잔을 내려서 들고 와 슬그머니 시현의 앞에 밀어놓고 책상으로 돌아갔다.


시현은 한쪽 팔을 금손의 골골 진동에 맡긴 채 다른 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번졌다.


‘좋은 사람들, 아니 좋은 사람과 좋은 여우, 좋은 고양이인가.’


마음이 포근해지면서 가슴의 답답함이 사라졌다. 금손의 골골에 맞춰 자신도 골골송을 부를 수만 있다면 골골 목을 울리고 싶은 기분이 된 시현이 흐뭇하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시현의 기분은 더 좋아졌다.

송가미록을 펼쳐 보니 향설고의 끝부분이 조금 더 보였기 때문이었다.


“얼굴 환해진 거 보니 글이 좀 더 보이나 보지?”


금손이 물었고 시현이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송가미록을 몇 줄 더 읽을 수 있는 것도 기쁘지만, 제가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 만한 음식을 할 수 있다는 게 참 좋네요.”


***


“시현이 뭐 쓰고 있나?”


이 층에서 내려오던 금손이 거실 책상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시현에게 물었다.


“송가미록 필사 중입니다. 아, 손으로 쓰고 있는 게 아니니까 필사는 아니려나요? 아무튼 옮겨 쓰고 있어요.”


송가미록을 펼쳐 볼 때마다 낡은 책장이 상하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워서 공부도 할 겸 내용을 컴퓨터에 옮겨 정리하는 중이었다.


“후식인가?”


책상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와 노트북을 넘겨다본 금손이 입맛을 다셨다.


“예, 후식 부분입니다. 고조부님이 꽤 많이 정리해 놓으셨어요.”


밥, 면, 국, 장 등이 있는 앞부분을 분실했기에 뒤쪽만 공부 중이었는데 뒤쪽에는 고기, 생선 등의 요리와 찬류 외에 술과 후식, 그리고 외국 요리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후식 좋지, 우리나라에도 참 정갈하고 맛깔스러운 후식이 많은데 자꾸 잊혀져 가는 게 안타까워. 자네 같은 사람이 그런 음식이 없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네.”


금손은 앞발을 들어 시현의 어깨를 두드렸고 시현은 그 말랑말랑하고 보슬보슬한 앞발을 보며 콩고물 뿌린 찰떡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런 후식을 만들어 팔면 잘 팔릴 텐데.


며칠 전 첫 월급을 받아서 노트북을 장만했다. 예전에 생활고에 쫓겨 노트북을 전당포에 맡기고 결국 찾지 못했던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더 넉넉한 첫 월급을 받고 나니 얼마나 배가 부른지.


새로 산 노트북에 송가미록의 내용을 옮기는 중이었는데, 빈자리에 있던 향설고의 조리법도 옮겨 적을 수 있을까 시도해 봤지만 되지 않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만큼만이라도 옮겨 써 보려고 했으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는지 자판을 쳐도 화면에 글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건 안 되는 건가 보네.”


시현은 납득하고 원래 읽을 수 있던 조리법들만 옮겨 쓰고 있었다.


***


죽림의 첫 월급 기념으로 선물을 준비해서 신 사장에게 가면서 강서호에게 연락해 같이 다녀왔다.

신 사장의 상태는 여전히 그만그만했다. 몸의 오른쪽 반신을 쓰지 못했고, 부인의 부축을 받아 식사도 하고 걷기도 하지만 사람을 알아보거나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하지 못했다. 마치 인형처럼 이쪽으로 돌리면 이쪽으로, 저쪽으로 돌리면 저쪽으로 움직일 뿐.


“떡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사 왔는데, 맛이 없나 봐요.”


강서호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신 사장 부부가 떡이나 다식 같은 한과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현도 일부러 나미네 가게에 들러서 한과를 사 왔는데, 부인이 입에 대어 주면 받아먹기는 하지만 맛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표정이 없었다.


“우리 사장님이 참 정도 많고 감정 표현이 풍부하신 분이었는데.”


사장님도 그렇고, 간병하느라 부쩍 수척해진 사모님을 보는 것도 마음 아파서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


“세나 씨, 뭐 좀 여쭤볼 게 있는데요.”

“예. 뭔데요?”


책상에서 뭔가 서류를 정리하던 세나가 눈을 들고 시현을 바라봤다.


“죽림 전당포에 사연을 맡기면 원하는 소원, 그러니까 원하는 걸 뭐든지 받을 수 있나요?”

“?”

“목소리나 꿈처럼 형태가 없는 것도 받을 수 있고, 제 고조부님이 만들었던 향설고 환처럼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도 받을 수 있는 걸 보면······.”


세나가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시현을 향했다.


“웬만한 건 다 가능하고, 저희도 손님들의 소원을 최대한 들어드리려고 하지만 한계는 있습니다. 지난번에 은롱이가 말했듯이 로또 번호라든지 운동경기의 승패 예측 같은 건 대가로 받을 수 없어요. 그리고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든지 하는 무리한 소원도 불가능하고요.”

“예······.”

“지난번 나미와 미미 같은 경우 향설고 환이 한 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줄 수 있었는데, 만약 소리를 못 내는 손님이 또 온다면 당장 도와드릴 수 없겠지요. 비슷한 효능을 가진 건 있는데 향설고보다는 좀 떨어져요.”

“죽림에 왔던 손님 중 원하는 것을 얻어가지 못한 손님도 있나요?”

“빈손으로 돌아가신 손님은 없습니다.”


세나는 단언했다.


“일단 죽림에 오는 손님은 자격을 가진 손님이고, 뭔가 받기를 원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러 오는 경우가 더 많거든요. 검정고양이 나미처럼 확실하게 뭔가를 원하고 오는 경우는 드물어요.”

“그렇군요.”

“정말 어려운 소원을 갖고 오신 분이라 해도 최소한 소원과 비슷한 것은 받아 가니까요.”

“비슷한 거라면······?”


세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잔잔하게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는 소원은 들어줄 수 없지만, 죽은 사람을 만나는 꿈 같은 건 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시현은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


“서천꽃밭 말인데요. 제가 서천꽃밭 설화를 찾아보니까 죽은 사람도 살리는 꽃이 있다고 하던데요.”

“음, 정말 죽은 사람을 살리는 꽃은 아니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꽃은 있어요.”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된 후 사람도 못 알아보고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듣는 꽃도 있을까요?”

“글쎄요······.”


세나가 턱을 살짝 고였다.


“서천꽃밭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뼈오를꽃이라든지 살오를꽃처럼 설화를 통해 알려진 꽃들도 있지만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꽃들도 굉장히 많으니까요.”

“예······.”

“저도 죽림에 오래 있으면서 서천꽃밭에서 보내주는 꿀이야 먹어봤고, 서천꽃밭의 꽃이나 꿀로 만든 약단지도 관리하긴 하지만 모르는 꽃이 더 많아요. 직접 가본 것도 아니고.”

“금손 씨나 은롱이는 잘 알까요?”

“글쎄요. 꽃감관이 아닌 이상 그 많은 꽃들의 효능이나 특성을 다 알 순 없으니까 자세히는 모를걸요?”


마침 이층에서 내려오던 금손과 은롱이 시현과 세나의 대화를 들었는지 가까이 왔다.


“왜,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나?”

“예. 제가 일하던 식당 사장님이요.”

“아하, 뇌졸중 후유증으로 누워 계신다는 그 사장님 말이로군?”

“예. 나미와 미미를 보고 생각한 건데, 혹시 가능하다면 저도 대가를 치르고 신 사장님을 낫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시현의 말을 들은 은롱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형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려워.”

“······.”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해내려면 큰 대가가 필요하고, 게다가 형이 직접 받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려는 거잖아.”


은롱은 눈을 살짝 내리깔면서 말을 계속했다.


“우리 전당포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손님이 뭔가 그만한 자격을 갖췄다는 걸 말하는데, 여기 들어오지 못한 사람에게 양도하려면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하거든.”

“······.”

“서천꽃밭의 잠깨일꽃이 아마 형이 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 받아오기도 어렵고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도 없으니까. 형 고조부가 했던 것처럼 약선으로 조제를 해야 할걸?”


은롱이 금빛 눈을 살짝 치켜들었다.


“어쩌면 형 고조부가 벌써 해봤을지도 몰라. 송가미록에 적혀 있지 않을까?”


은롱은 미안한 듯 말을 덧붙였다.


“형이 아직 죽림에서 일한 시간이 짧으니까, 원하는 답을 못 줘서 미안해. 더 많이 수행하면 형도 고조부처럼 원하는 약선을 조제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시현은 은롱의 머리를 쓸어주며 웃었다.


“그래. 고마워. 내가 마음이 좀 조급해서 물어본 거야. 더 열심히 수행할게.”

“응! 힘내!”


작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은롱을 뒤로 하고 시현은 자꾸 조급해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강서호에게 호반맥적을 해주고 난 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요리를 몇 번 더 했는데도 더 이상 글이 보이지 않아 속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조리법을 보면 이제 조금밖에 안 남은 것 같은데 통 보이질 않네.’

“잠시 장에 좀 다녀올게.”


시현은 기분전환도 할 겸 장에 좀 다녀오려고 죽림을 나섰다.


요즘은 시장에 들르면 한과 가게 앞을 천천히 지나가면서 가게 안쪽을 슬그머니 들여다보곤 한다.

오늘도 사이좋게 놀고 있는 소녀와 고양이를 보자 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갓 고양이도 제가 동생처럼 사랑하는 아이의 실어증을 고치기 위해 제 가장 귀한 보물을 내놓았다. 나미는 영수가 되는 길을 버리고 평범한 고양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는데, 나에게도 뭔가 대가를 치를 만한 것이 있을까?


시현은 한과 가게 앞을 떠나며 혼자 중얼거렸다.


“사장님, 조금만 더 힘내고 기다려 주세요. 제가 꼭 사장님의 병을 낫게 할 방법을 찾아내 보겠습니다.”


***


시장을 보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왔을 때였다.

시현이 지나가는 길 옆에 주차되어 있던 검정 중형차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송시현 씨?”

“예?”


차 안에서 시현을 부른 것은 뜻밖에도 오인국이었다.


“오인국 셰프님 아니십니까?”

“그래요. 송시현 씨죠?”

“절 아십니까?”

“아, 강민우 씨한테 이야길 듣기도 했고, 서울 컬리너리 챌린지 최연소 우승자라는 말을 들어서 좀 관심이 있었는데 여기서 만나네.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조기 카페에서?”


시현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차에 짐을 실어 놓고 오인국을 따라갔다. 오인국이 죽림에 들어올 뻔했던 요리사라 해서 시현도 관심이 있기도 했고.

오인국이 차에서 내리자 그의 뒤를 따르듯 키가 훤칠한 황갈색 머리의 남자 한 명이 함께 내렸다.

매니저나 비서인가? 그렇다기엔 아랫사람 같은 분위기가 아닌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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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5. 맥적(1) +8 24.06.10 453 3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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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4. 고종 냉면(2) +6 24.06.08 457 38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458 35 11쪽
38 23. 향설고 +5 24.06.06 464 41 12쪽
37 22. 몽중시(夢中市)(2) +4 24.06.05 467 41 13쪽
36 22. 몽중시(夢中市)(1) +5 24.06.04 475 40 12쪽
35 21. 나미와 미미(2) +7 24.06.03 476 40 11쪽
34 21. 나미와 미미(1) +5 24.06.02 475 39 12쪽
33 20. 경성 오므라이스(3) +6 24.06.01 485 46 11쪽
32 20. 경성 오므라이스(2) +6 24.05.31 485 41 12쪽
31 20. 경성 오므라이스(1) +5 24.05.30 484 37 12쪽
30 19. 연잎밥 +7 24.05.29 485 42 12쪽
29 18. 연저육찜 +7 24.05.28 508 4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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