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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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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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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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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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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29. 수제비(2)

DUMMY

“······.”

“어릴 때 네가 많이 해줬지. 다른 음식보다 수제비를 유난히 잘 끓였지 않니? 타국 생활하느라 이런 거 잘 못 먹었지? 너 주려고 끓였으니 먹어 봐라.”


명자는 잠자코 숟가락을 들었다. 국물은 조금 들큼했고, 감자와 호박 모양은 제멋대로에 수제비 반죽은 너무 텁텁하고 두꺼웠다.

명자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오빠, 난 말이지, 수제비가 싫었어요. 밥이나 고기를 먹고 싶었는데 툭하면 수제비를 하라고 해서, 이담에 크면 수제비는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생각했다고요.

사실 집이 어려워서 수제비를 많이 먹었던 거겠지만, 어린 마음으로는 오빠가 좋아하니까 수제비를 자주 먹는 거라고 생각해서 더 싫었어요.


그녀는 천천히 숟가락질을 하면서 왠지 조마조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명호를 향해 말했다.


“맛있네요.”

“그래?”


명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예, 맛있어요.”


명자가 수제비 그릇을 깨끗이 다 비웠을 때 잠들어 있던 어머니의 주름진 입술이 미소 짓는 것처럼 살짝 늘어졌다.

어머니는 그 이틀 후, 명자의 손을 잡은 채 잠자는 듯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독일로 돌아가기 전날, 명자는 언젠가 다희가 한 말을 기억하고 안서동으로 갔다.


혹시 다희 언니를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다희 언니는 날 기억할까?


안서동 종점, 세 번째 골목, 명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여우 얼굴이 그려진 간판을 보았다.


전당포잖아? 다희 언니가 전당포에서 일할 리는 없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 문간에 달린 종을 살짝 울렸을 때.

다라랑, 풍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시원한 나무향, 그리고 안쪽의 책상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명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여자를 한참 쳐다보았다. 눈시울에서 뭔가 따끈한 것이 부풀어 올랐다.


“다희 언니······.”


책상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녀에게 가까이 왔다.


“명자구나. 오랜만이네.”


어디선가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랬군요.”


꿈에서 깨어난 듯 눈을 뜬 브랜틀리 관장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명에게 그런 이야기가 있었군요.”


그는 손을 내밀어서 노리개를 살짝 만졌다.


“하지만 그 다희라는 분은 이제 안 계시겠지요? 명보다도 훨씬 나이가 위니까, 그래도 명은 이 노리개를 그분께 돌려드리고 싶었나 보네요.”


노리개를 가만히 보고 있던 세나가 말했다.


“그분은, 제 고모랍니다.”


윤다희는 세나 아버지의 큰누나였고 세나 이전 죽림 전당포의 집사였다.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서 천의무봉이라는 별명이 있었지요. 저와는 달리 음식도 잘하셨고요.”


세나는 손가락으로 노리개를 쓰다듬었다.


“고모는 무척 담백하고, 냉담해 보였지만 사실은 정이 많은 분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답니다.”

“?”

“우리는, 사람들과 일반적인 관계를 맺고 살지 못하는데 누군가에게 정을 주면 그만큼 상처받을 일이 많아지니까요.”


세나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설렁설렁 가벼운 관계를 맺고 사는 집사들도 많았는데, 고모는 유난히 그런 면을 힘들어해서 아예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명자 씨를 각별하게 생각하셨군요. 그래서 이 바늘집 노리개도 주신 거였고. 명은 또 이걸 돌려주고 싶었나 봅니다.”


브랜틀리 관장은 노리개를 세나 쪽으로 밀었다.


“받아 주십시오. 다희 씨는 안 계시지만 조카분이 받아주시면 명도 기뻐할 겁니다.”


세나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 바늘은 다른 사람이 쓰면 보통 바늘이겠지만, 다희 고모나 제가 쓰면 특별한 힘을 내지요. 직녀의 제자가 썼던 바늘이라는 전설이 있어요.”


세나가 노리개를 받자 브랜틀리 관장은 홀가분한 얼굴이 되었다.


“저도 명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어 기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간이 늦었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관장님. 제가 준비한 게 있습니다.”


시현이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반죽을 미리 해뒀으니까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시간을 잠시 거슬러서 그날 오후, 브랜틀리 관장의 호텔로 가기 전의 일이다.

시현은 죽림의 주방에서 찰밀가루 봉지를 꺼냈다.

명자 씨가 어렸을 때 밥 대신 자주 먹었다는 말이나, 요양소에서 찰흙 반죽을 냄비에 떼어 넣었다는 말에 짐작 가는 음식이 있어서였다.


밀가루를 양푼에 부어 놓고 소금물을 따로 만드는 걸 보고 은롱이 물었다.


“형, 밀가루 반죽하려고?”

“응.”

“소금을 밀가루에 넣지 않고 소금물을 따로 만들어?”

“응, 이렇게 만드는 게 반죽에 간이 골고루 잘 배거든.”


짜지 않고 간간한 정도의 소금물을 조금씩 부어 가며 밀가루를 반죽한다. 약간 질다 싶을 정도로 반죽을 해야 반죽이 얇고 쫀득해진다.

반죽이 매끈해지도록 식용유를 한 술 정도 넣어서 계속 치댄다.

표면이 매끈해질 때까지 잘 치댄 반죽을 냉장고에 넣어 둔 뒤 브랜틀리 관장을 데리러 갔던 것이다.


주방에 들어간 시현은 서둘러 멸치다시 물을 끓이고 호박과 감자를 어슷어슷 썰었다.

멸치 국물에 감자를 넣어 끓이다가 국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아까 만들어 두었던 수제비 반죽을 얇게 쭉쭉 늘여가며 뚝뚝 끊어 넣는다.


"반죽이 아주 매끈하면서도 쫀쫀하게 잘 됐네."


반죽을 다 넣은 후 호박을 넣고 국간장과 멸치액젓으로 간을 하자 구수한 냄새가 따뜻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시현이 한 숟가락 떠서 간을 보았다.


“음, 마늘 조금 넣어야겠다.”


간 마늘도 한 숟가락 넣고 대파도 송송 썰어 넣었다. 마지막에 계란을 풀어 줄알을 친다.

수제비에 계란은 안 넣는 경우도 많지만 시현은 떡국이나 수제비에 계란을 풀어 넣는 맛을 좋아했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릇에 뜨고 얇게 썬 김을 올려서 거실로 들고 나갔다.


“비도 오고 시간도 늦었으니 야식으로 한 그릇 들고 가십시오.”

“냄새가 좋은데요.”


브랜틀리 관장은 신중하게 수제비를 떠먹더니 잠시 추억에 어린 눈빛이 되었다.


“이거, 맛있습니다. 건더기가 쫄깃쫄깃하고 국물은 구수하면서 은은한 단맛과 짠맛이 아주 잘 어우러지네요. 포근포근한 감자도 좋고요. 어렸을 때 먹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명이 끓여준 적이 있어요.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관장님이 말씀하신 그 요리가 아마 이걸 겁니다.”

“음, 새 요리가 아니었군요. 명은 왜 이 음식을 새 이름이 나오는 요리라고 했을까요?”

“이 요리의 이름은 수제비입니다. 어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손으로 반죽을 뜯어 넣는 요리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제비가 영어로 swallow와 발음이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새 이름과 같다고 하셨나 봅니다. 명자 씨는 새와 익숙하셨다고 하니까요.”

“제비라, 그렇군요. 겨울에는 따뜻한 곳으로 가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온다는 새지요.”


브랜틀리 관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제비 한 그릇을 맛있게 다 비웠다.


“고맙습니다. 시현 씨, 전당포도 찾아 주시고 수제비까지 끓여 주시다니, 덕분에 제가 아쉬움 없이 독일로 돌아갈 수 있께 되었습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브랜틀리 관장이 일어섰고, 세나가 말했다.


“고모님의 노리개를 가져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관장님은 이 전당포를 나가시는 순간 노리개가 보여준 이야기는 잊게 되실 겁니다. 다만 시현 씨의 안내를 받아 전당포를 찾아와 명자 씨가 부탁한 노리개를 직원에게 돌려준 것만 기억하실 거예요.”


세나는 작은 상자 하나를 브랜틀리 관장에게 내밀었다.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김명자 씨께 드리는 답례입니다. 전해주세요.”


세나가 뚜껑을 열어 보인 상자 안에는 작은 담홍색 새 모양의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예쁘네요. 명이 좋아하겠습니다.”


전당포를 나와서 차에 오르자 브랜틀리 관장은 하품을 하더니 졸기 시작했다.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관장님.”

“아, 제가 깜빡 잠이 들었군요.”


브랜틀리 관장은 차에서 내리면서 시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늦은 시간에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명이 부탁한 것도 전하고 선물도 받았네요. 수제비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이것도 가져가세요.”


시현이 쪽지 한 장을 브랜틀리 관장에게 주었다.


“이건 뭡니까?”

“수제비 조리법을 적은 겁니다. 제가 오지랖이 좀 넓어서, 혹시 몰라 적어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브랜틀리 관장이 시현의 손에서 쪽지를 받을 때, 그들은 몰랐지만 시현의 손에서 피어오른 아우라가 무지개처럼 반짝이며 쪽지를 감싼 채 브랜틀리 관장의 손으로 건너갔다.


***


-지잉, 지잉!

“어, 주호냐? 오늘 공항 나간다더니 벌써 일 끝났냐?”

-엉, 지금 브랜틀리 관장님 게이트 들어가는 것까지 배웅하고 공항 나가는 길이다.

“그래 잘 가셨구나.”

-엉, 근데 너 어젯밤에 브랜틀리 관장 모시고 어딜 갔다 온 거냐?

“아, 내가 아는 전당포가 관장님이 찾으시는 전당포 같아서 모시고 갔었는데 맞더라.”

-얘기는 들었는데, 브랜틀리 관장이 굉장히 총기가 좋은 분인데 이상하게 어젯밤 일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시더라고.


주호의 말에 따르면 관장은 김명자 씨에게 부탁받은 노리개를 전당포에 전하고 답례품으로 브로치를 받은 건 기억나는데 상세한 내용이 통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술을 드신 것도 아닌데 기억이 좀 몽롱하다고 이상하다 하셨는데, 그래도 시현이 네가 수제비 만들어준 건 정말 맛있었다고 하시더라. 너 왜 남의 전당포에서 야식을 만들고 그러냐?

“아 뭐, 잘 아는 집이라서 그래도 된다.”


시현은 말을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잘 떠나셨대요?”


세나가 무심한 듯 물었다.


“예. 그런데 브랜틀리 관장님은 세나 씨를 기억하시나 봅니다.”

“정확히는 기억 못하실 거예요. 전당포에 여직원이 있었다 정도만 기억하실 뿐, 아마 다시 만난다고 해도 알아보진 못할 거고요. 관장님이 정확히 기억하시는 건 시현 씨뿐일 겁니다. 시현 씨는 전당포에서 만난 게 아니라 친구분 소개로 만난 거니까요.”

“예. 그 명자 씨라는 분도 지병이 있으시다지만 잘 지내시면 좋겠네요.”


시현이 말하면서 보니 세나는 백동 바늘집 노리개를 도깨비 두두리가 주고 간 감투에 넣고 있었다.

감투에 들어간 노리개는 금방 안 보이게 되었다. 도깨비의 말대로 반짇고리로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세나 씨는 어떻게 알고 그 브로치를 미리 준비하셨어요?”


시현이 묻자 세나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준비한 게 아니에요. 고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주셨어요. 언젠가 붉은 깃털이 든 바늘집 노리개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거든 그걸 주라고 하셨지요.”


***


일주일쯤 후 시현이 이메일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메일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상황에 맞는 답메일을 쓰고 광고 메일은 삭제하던 중 새로 온 이메일을 하나 발견했다.

brantely@maria_g,org

브랜틀리 관장의 이메일이었다. 시현이 이메일을 열어 보자 한 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흰 벽의 작은 방, 소꿉놀이용 장난감 같은 요리도구들이 흩어져 있는 탁자, 단정하게 꾸며져 있고 환한 햇살이 방을 채우고 있어 아늑해 보인다. 하지만 커튼 뒤로 보이는 창문의 쇠창살이나 환자용 침대를 보면 요양소의 병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침대 위에 머리가 하얗게 센 동양계 여성 한 명이 앉아 있고 브랜틀리 관장이 그 옆에 서 있었다.

한 손으로 브랜틀리 관장의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숟가락을 든 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얼굴은 다소 어색하고 뻣뻣했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주 따뜻했다. 노부인의 옷깃에 달린 담홍색 새 모양 브로치가 눈길을 끌었다.


침대에 붙어 있는 접이식 식탁 위에 올려진 식판 위에는 큼직한 그릇이 하나 있었다.

붉은머리오목눈이2.JPG


작가의말

붉은머리오목눈이 

사진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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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33. 송화다식(2) +13 24.06.27 263 29 13쪽
57 33. 송화다식(1) +8 24.06.26 302 34 13쪽
56 32. 송화 +9 24.06.25 334 35 12쪽
55 31. 가지 누르미 +10 24.06.24 360 36 13쪽
54 30. 첫 번째 선물(2) +7 24.06.22 413 46 12쪽
53 30. 첫 번째 선물(1) +5 24.06.21 413 42 12쪽
» 29. 수제비(2) +10 24.06.20 413 43 12쪽
51 29. 수제비(1) +6 24.06.19 418 44 12쪽
50 28. 노리개(2) +8 24.06.18 424 39 12쪽
49 28. 노리개(1) +8 24.06.17 426 43 12쪽
48 27. 콩나물밥(2) +5 24.06.16 424 38 13쪽
47 27. 콩나물밥(1) +5 24.06.15 482 36 12쪽
46 26. 조우 +7 24.06.14 488 36 12쪽
45 25. 맥적(4) +9 24.06.13 480 38 13쪽
44 25. 맥적(3) +4 24.06.12 480 35 12쪽
43 25. 맥적(2) +6 24.06.11 480 33 12쪽
42 25. 맥적(1) +8 24.06.10 488 39 12쪽
41 24. 고종 냉면(3) +6 24.06.09 494 34 12쪽
40 24. 고종 냉면(2) +6 24.06.08 493 38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493 36 11쪽
38 23. 향설고 +5 24.06.06 499 42 12쪽
37 22. 몽중시(夢中市)(2) +4 24.06.05 504 42 13쪽
36 22. 몽중시(夢中市)(1) +5 24.06.04 510 40 12쪽
35 21. 나미와 미미(2) +7 24.06.03 511 41 11쪽
34 21. 나미와 미미(1) +5 24.06.02 513 39 12쪽
33 20. 경성 오므라이스(3) +6 24.06.01 524 47 11쪽
32 20. 경성 오므라이스(2) +6 24.05.31 524 4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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