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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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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최근연재일 :
2024.06.2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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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797

작성
24.06.0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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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글자
12쪽

24. 고종 냉면(2)

DUMMY

“음? 손님이 왔잖아?”


금손이 의아한 듯 은롱을 쳐다보았고 은롱이 살짝 얼굴을 가리면서 에헤헤 웃었다.


“형 요리하는 거 보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신경을 못 썼나 봐요.”


죽림 전당포는 기본적으로 손님이 많은 곳이 아니다. 이삼일에 한 명 정도밖에 오지 않는데, 대개의 경우는 손님이 오는 것을 은롱이 느낀다고 한다.


“드물게 누굴 보낸다고 추천인이 미리 연락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간절한 마음의 손님이 인연에 끌려서 오는데 그런 손님이 가까이 오면 내가 느끼거든.”


지금처럼 은롱이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으면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고 하지만.


“은롱이 네가 신경을 안 쓰고 있는 바람에 손님과 식사 시간이 겹쳤잖느냐. 미리 알았으면 손님 상담을 먼저 하고 나중에 상을 차렸을 텐데.”


금손의 말에 은롱은 멋쩍은 듯 어깨를 움츠리면서 거실 쪽을 내다봤다.

세나가 손님을 안으로 안내하는 중이었다.


“예. 여기는 전당포가 맞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은 주춤주춤 세나가 손짓하는 소파 쪽으로 왔고, 시현이 일어나서 복숭아정과를 준비했는데, 손님은 왠지 안정되지 않은 자세로 주방 쪽을 계속 힐끔거리고 있었다.


“자, 이거 먼저 한 조각 드셔보세요.”


소파 끄트머리에 옹색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손님은 마지못한 듯 복숭아정과 한 조각을 먹고 나더니 조금 안정이 되었는지 자세를 다소 편하게 고쳤다.


“너도 나가 봐야지.”


금손이 말하자 은롱도 아쉬운 듯 젓가락을 놓고 거실로 나갔다.


“자, 손님, 어떻게 오셨는지요?”


세나가 다시 묻자 손님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다른 일로 온 거긴 한데요. 안쪽에서 굉장히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데 혹시 배인가요?”


복숭아정과를 내주고 주방으로 돌아왔던 시현이 놀라서 다시 거실 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무기 산의 배가 향기가 진하긴 하지만 거실에서 바로 맡을 수 있을 정도인가?


“배 향기, 진짜 상큼하고 진한 배 향기······.”


손님은 눈을 살짝 감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동치미······, 고기 육수, 냉면인가요? 그런데 이 배는 정말!”


눈을 뜬 손님이 갑자기 앞으로 몸을 당겼다.


“이 배 한번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요?”


다들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본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명함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향에 꽂히면 앞뒤 분간을 잘 못하고 덤비는 경향이 있어서······,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에는 flavourist 서규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플레이버리스트······, 조향사시군요?”

“예!”


조향사에는 퍼퓨머(perfumer)와 플레이버리스트(flavourist)가 있다.

퍼퓨머는 화장품의 향료나 향수 등을 다루고 플레이버리스트는 식품의 향료를 전문적으로 다룬다.


“제가 향에 아주 예민하거든요. 여기 들어왔을 때 처음에 아주 좋은 나무 향이 났고, 안쪽에서는 배 냄새가 났는데 배는 워낙 향이 짙어 금방 알았고, 냉면은······.”


서규원은 뭔가 굉장히 그리운 듯한 얼굴을 하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시현이 끼어들었다.


“배 냄새는 그렇다 치고 거실에서 냉면 냄새를 맡는 건 정말 신기하네요. 식품 조향사는 그런 냄새까지도 구분할 수 있나요?”


시현 자신도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냄새에 예민한 편인데 거실에서 주방의 냉면 육수 냄새를 가려낼 자신은 없었다.


혹시 이 사람도 금손이나 은롱처럼 인외 존재인 건 아니겠지?


잠시 머뭇거리던 서규원이 입을 열었다.


“물론 조향사라고 다 이 정도로 예민한 건 아니에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전 그런 냄새까지 알 수 있어요. 냉면 맞지요. 안 그래요?”

“예, 맞긴 합니다.”

“그리고 전 냉면에 특별한 추억이 있거든요.”


뭔가 간절한 눈으로 주방 쪽을 바라보는 서규원의 배에서 갑자기 꼬르륵 소리가 났다.


“식사 못 하셨군요?”

“예. 요즘 너무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


그때 주방 쪽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모시고 이쪽으로 오지? 우리도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니 수저 한 벌 더 놓지 뭐.”


어느새 노인의 모습으로 변한 금손이 거실 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은롱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나가 말했다.


“그렇게 하시죠.”


향에 끌려 주방으로 달려들어갈 기세이던 서규원은 정작 식사를 같이하자는 말을 들으니 또 주춤거렸다.


“그래도 될까요? 이거 너무 실례가 될 것 같은데.”

“괜찮소, 우리가 그렇게 야박한 사람들은 아니니까 들어오시구려.”


금손이 말했고 서규원은 주춤주춤 시현과 세나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왔다.


식탁 위에 차려진 냉면을 본 서규원의 눈이 빛났다.


“식사하시려던 참인데 제가 와서 못 드셨군요. 밥도 아니고 면인데 그냥 식사부터 하시고 저보고 기다리라고 하시지. 정말 죄송합니다.”


시현이 재빨리 냉면을 한 그릇 더 만들어 수저와 함께 서규원의 앞에 놓아주자 서규원이 싱긋 웃었다.


“배 향기를 맡고 혹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고종 냉면이네요.”

“호오, 고종 냉면인 걸 보기만 해도 아시나?”


금손이 눈에 이채를 띠고 서규원을 쳐다보자 그는 또 싱긋 웃었다.


“예. 증조할머니가 한희순 상궁 밑에서 일했던 수라간 나인이었습니다. 아,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르실지도.”

“아니, 안다오. 한희순 상궁은 조선의 마지막 수라상궁이었지.”

“아, 아시는군요. 제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배를 좋아하셨는데 그래서 이 냉면을 자주 해주셨다고 합니다. 고종 임금님만 드시던 건데 우리 집에선 우리 손자가 임금님이다 하시면서.”

“그렇군, 일단 식사부터 할까?”


금손이 먼저 젓가락을 들고 냉면을 먹기 시작하자 다들 뒤이어 식사를 시작했다.

냉면을 한 입 먹은 서규원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젓가락질이 빨라졌다.


“맛있죠? 우리 형이 진짜 요리 잘하거든.”


은롱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서규원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맛있습니다. 면이나 고명도 그렇지만 국물이 정말 예술이네요.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시원하고 감칠맛 있는 국물이라니, 내심 고종 냉면은 저희 집 냉면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견문이 좁았네요. 게다가 배 맛이 정말!”


서규원은 침을 꼴깍 삼키며 왠지 애틋한 얼굴로 냉면을 내려다보았다.


“진짜 집에 한 그릇 싸갔으면 좋겠네요.”


다들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는 바람에 냉면 그릇이 금방 바닥을 보였다.


“아, 정말 더위가 싹 가시는 기분이군. 잘 먹었네.”


마지막 국물까지 깨끗하게 다 비운 금손이 흡족하게 입을 닦으며 말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서규원도 인사를 한 뒤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럼 이제 원래 전당포를 찾아온 이유를 들어 볼까요?”


세나가 녹차와 복숭아정과를 규원의 앞에 밀어주며 말하자 규원이 정과 한 조각으로 입가심을 한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후각이 굉장히 예민했습니다. 웬만한 음식은 냄새만으로 들어간 재료를 다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개코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고요.”

“그러셨군요.”

“후각이 너무 예민해서 힘든 일도 더러 있었지만, 결국 특성을 살려 조향사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부터 예민했던 후각이 훈련을 통해 더 예민해졌지요. 제 자랑 같아서 말하기 좀 뭣하지만 한 번 맡은 냄새는 거의 잊지 않거든요.”


서규원은 녹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아주 독특한 냄새를 맡았습니다. 이게 참 묘한 게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치즈의 노린내 같다고 할까요. 거기에 신맛이 좀 가미된 듯한 냄새였습니다.”


세나의 옆에 앉아 있던 은롱이 규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관심을 보였다.


“이 냄새가 너무 강해서 잊혀지지가 않는데, 뭔가 뒷맛이 나쁜 냄새라서요. 더 이상한 건 같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 중 이 냄새를 맡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

“제가 맡는 냄새를 다른 사람은 못 맡는 일은 흔히 있지만, 그런 경우는 대개 냄새가 약한 경우거든요? 그런데 이 냄새는 한순간이지만 꽤나 또렷했는데도 아무도 맡질 못하더라고요. 사실 금방 사라지긴 해서, 저도 이 냄새가 계속 제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잘못 맡았나 했을 겁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냄새가 자꾸 코끝을 맴돌면서 떠나질 않아서 본업에도 지장이 생겼습니다. 조향할 때 아주 방해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벌써 몇 주째 많이 힘들었는데, 며칠 전 자다가 갑자기 옛날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얘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살짝 전당포 내부를 둘러보았다.


“음, 제 얘기가 터무니없게 들리시겠지만요. 여름 휴가 때 같은 펜션에 묵었던 사람들끼리 괴담 이야기를 했는데, 누군가 안서동 종점에 특이한 전당포가 있다는 얘길 했던 생각이 났어요. 얘기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악몽을 팔고 좋은 꿈을 샀다는 얘기였어요. 꿈이나 이야기, 기억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팔 수 있는 곳이라면서요. 기담이긴 해도 괴담은 아니지 않냐고 했더니 얘기한 사람이 씩 웃더니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 전당포 주인이 여우야, 여우.


“아항.”


은롱이 살짝 웃었고 서규원도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는 다들 에이 하면서 웃고 말았거든요. 그리고 나서 그 이야기는 새까맣게 잊어버렸고요. 그런데 요 며칠 자꾸 생각이 나서요. 꿈이나 이야기를 팔 수 있다면 혹시 냄새의 기억도 맡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오늘 마침 이쪽에 볼일이 있어서 왔던 김에 속는 셈 치고 한번 둘러봤던 건데요.”


규원은 골목 두세 군데를 들어가 보면서 스스로도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웃긴다고 생각했다.

그냥 누군가 만들어낸 도시기담인 게 뻔한데 왜 여기를 왔담.


세 번째 골목까지 보고 그냥 집에 가려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어디선가 향긋한 배 냄새가 규원의 코를 스쳐 갔다.


“배인가? 지금 배가 있을 철이 아닌데? 그리고 배 향이 이렇게 짙을 리가 없지. 누가 새로 조합한 향인가?”


직업이 식품 전문 조향사다 보니까 배 향에 바로 반응한 규원이 향이 풍기는 쪽을 돌아봤다.


“어?”


조금 전까지 그냥 담벼락이었던 것 같은데 골목 안쪽에 자그마한 전당포가 보였다. 간판에 여우 얼굴이 있는.


“이상하다. 조금 전엔 분명히 못 봤던 것 같은데?”


규원은 머리를 계속 갸우뚱거리면서 홀린 듯이 배 향기를 따라 전당포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간판에 여우가 있으니까 주인이 여우라고 했나 보지요? 암튼 진짜 전당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랐어요.”


같이 냉면을 먹고 나오느라 여우의 본체로 돌아갈 타이밍을 놓쳤던 은롱이 규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 그 냄새 말예요. 어디서 맡았는지는 기억해요?”

“응. 내가 식품 조향사라서 식품 관련 방송 일도 가끔 하거든. 얼마 전에도 요리 프로그램 하나 보조하러 갔었는데 거기서 맡았어.”

“그거, 조금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은롱이 몸을 규원 쪽으로 가까이 붙였고, 금손도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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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25. 맥적(2) +6 24.06.11 442 33 12쪽
42 25. 맥적(1) +8 24.06.10 453 38 12쪽
41 24. 고종 냉면(3) +6 24.06.09 457 34 12쪽
» 24. 고종 냉면(2) +6 24.06.08 458 38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458 35 11쪽
38 23. 향설고 +5 24.06.06 464 41 12쪽
37 22. 몽중시(夢中市)(2) +4 24.06.05 467 41 13쪽
36 22. 몽중시(夢中市)(1) +5 24.06.04 475 40 12쪽
35 21. 나미와 미미(2) +7 24.06.03 476 40 11쪽
34 21. 나미와 미미(1) +5 24.06.02 475 39 12쪽
33 20. 경성 오므라이스(3) +6 24.06.01 485 46 11쪽
32 20. 경성 오므라이스(2) +6 24.05.31 486 41 12쪽
31 20. 경성 오므라이스(1) +5 24.05.30 486 37 12쪽
30 19. 연잎밥 +7 24.05.29 486 42 12쪽
29 18. 연저육찜 +7 24.05.28 509 4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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