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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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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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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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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797

작성
24.05.2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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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글자
12쪽

12. 메밀묵(2)

DUMMY


“이 친구가 만들었다네.”


금손이 시현을 가리키자 더벅머리 사내는 시현을 보며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활짝 웃었다.


“젊은 친구가 손맛이 좋구먼. 이렇게 맛 좋은 메밀묵은 진짜 오랜만이여. 내가 기력이 없어서 눈도 못 뜬 지 오래됐는데 메밀묵 냄새가 너무 좋아서 이거 한입 하려고 겨우겨우 일어났다니까.”


그는 메밀묵을 한 덩이 더 집어먹은 후 은롱에게 눈길을 주었다.

은롱은 이미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입김을 호오 불며 얼굴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여우 도령인가? 메밀묵 냄새도 냄새지만 도령이 내가 깨는 걸 도와줬지? 막 끌어당기는 게 느껴졌어. 고맙구먼.”


접시 가득한 메밀묵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더벅머리 사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서 기지개를 켰다.

덜렁거리는 한쪽 팔은 몸 옆으로 드리우고 한쪽 팔만 위로 뻗은 모습이 기묘했지만 사내는 시원한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등을 뒤덮은 화상 자국이 두드러졌다.


“어이구 삭신이야. 그 녀석이 이쪽으로 지나가지 않았으면 조만간 눈도 못 뜨고 소멸될 뻔했어. 내가 여기 기운을 느끼고 마지막 힘을 다해서 그 녀석을 이쪽으로 몰았으니 다행이지.”


그는 죽림 식구들을 둘러보며 싱긋 웃었다.


“여기 오면 누군가 꼭 구해 줄 것 같았지.”


금손과 은롱, 세나를 거쳐서 시현에게 눈길을 멈춘 더벅머리 사내가 고개를 기웃했다.


“젊은 친구는 내가 누군지 모르나 보네?”

“아, 저, 그러니까······.”


시현도 짐작 가는 게 있긴 했지만 긴가민가해서 말을 못 하고 있는데 사내가 갑자기 발을 탕 구르고 어깨를 흔들면서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씨름 한 판 할텨? 내가 몰골은 이래도 아직 김 서방 한 명쯤은 넘길 수 있다고.”

“혹시, 도, 도깨비이신가요?”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렇지, 그렇지, 이제 알아보는구먼. 내가 바로 씨름꾼 도깨비여!”

“예에. 도깨비치고는 너무 순하게 생기셔서 몰라뵈었습니다. 뿔도 없고.”

“어허이, 뿔이라니!”


도깨비가 정색을 했다.


“나는 조선 도깨비여. 조선 도깨비는 뿔이 없어.”

“뿔이 없어요?”


금손이 야웅 울면서 말했다.


“뿔이 있고 짐승 가죽을 두르고 다니는 그런 도깨비는 일본의 오니야. 우리나라 도깨비는 원래 뿔도 없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송곳니 같은 것도 없다네.”

“아하, 죄송해요. 제가 잘 몰랐습니다.”

“그려, 그려.”


더벅머리 도깨비는 시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머리를 만지더니 금방 슬픈 얼굴이 되었다.


“옷도 이렇게 남루하고 벙거지도 어디로 도망가고 없으니 도깨비 꼴이 말이 아니구먼.”

“자, 이쪽으로 앉아서 좀 쉬세요. 메밀묵 좀 더 드릴까요?”

“묵이 더 있어?”


도깨비가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게 순박해 보여서 시현이 웃었다.


“예, 더 있습니다. 더 갖다 드릴게요.”

“응, 그려. 고마워 김 서방.”


시현이 메밀묵 한 접시를 더 썰어서 내갔을 때 도깨비는 이미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앉아 있었고 금손과 은롱, 세나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자네도 여기 앉어. 내가 이제 이야기를 풀 참이니께.”

“예.”

“여기는 원래 이야기를 사는 곳이잖어, 그렇지? 내 감투를 사줬으니 나는 이야기를 팔아야지.”


***


어둑어둑한 고갯길, 장씨는 작은 보퉁이를 메고 고개를 넘고 있었다.

집에서 짠 광주리며 돗자리 등을 장터에 팔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장터에서 만난 이웃 마을 박씨와 막걸리를 한 잔씩 걸치다 보니 귀가가 너무 늦어져서 장터를 떠나기도 전에 해가 저물었다.

지름길로 간다고 평소 다니지 않던 여우고개로 길을 잡았더니 길이 영 낯설었다.

이 고갯길은 거리는 가깝지만 길이 험하고 인적이 드문데, 술자리를 좀 빨리 파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면서 장씨는 걸음을 재촉했다.


“김 서방!”


마지막 고개를 넘을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김 서방, 여기여!”

“엉? 누구여?”


자기처럼 장터에서 늦게 돌아오는 사람이 있나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고갯길 옆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장정이 손짓을 했다.


“김 서방,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가면 쓰나, 나랑 씨름 한 판 하고 가야지.”

“엉? 오랜만이라니, 뉘여? 그리고 내가 왜 김 서방이여? 난 장가인데.”


바위 위에 앉은 장정은 어딘가 모르게 얼굴이 흐릿해서 이목구비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덩치가 듬직한 게 작년에 씨름판에서 황소를 타 간 아랫마을 만기 형님 같기도 한데. 아니 이번에 장사 먹겠다고 잔뜩 벼른다는 윗마을 호동인가?


술이 알딸딸하게 돌아서 못 알아보는 건가 하고 눈을 다시 비비고 봤지만 벙거지를 쓰고 바위 위에 앉은 장정은 초면이었다.


“아무리 봐도 초면인데 그랴? 날 알어?”

“어, 고갯길 넘어다닐 때 두어 번 봤지. 자, 이리 와서 씨름 한 판 하고 가.”


곰 같은 덩치의 장정이 씨름 한 판 하자고 손을 벌리는 걸 보자 갑자기 등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그때도 늦은 시간에 여우고개를 넘던 옆 마을 김씨가 도깨비에 붙들려서 밤새도록 씨름을 했다던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때 함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김씨가 술에 취해 헛것을 봤다고 했지만 김씨는 절대 헛것이 아니라고 천지신명께 맹세를 할 수 있다고 목에 핏대를 세웠었다.

밤새도록 도깨비에게 휘둘려 이리 엎어지고 저리 자빠지고 하다가 해 뜬 뒤에야 겨우 정신이 들어서 엉금엉금 고개를 내려왔는데 몸살이 나서 열흘이나 이부자리 신세를 졌었다던가.


다시 찬찬히 보니 장정의 허리춤에 나무로 깎은 방망이도 하나 걸려 있었다. 이거, 정말 도깨비가 맞는 건가.


장씨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에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장 서방이네. 자네 이름은 뭔가?”

“나? 나는 두두리인데.”

“그래, 두두리, 내가 말이지, 잠을 자다가 담이 결려서 씨름은 못 하겠네. 오늘은 그냥 가고 다음에 하면 어떨까?”


두두리라는 도깨비는 금방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오늘 좀 놀고 가면 안 되나? 나 너무 심심한데.”


덩치는 곰 같은데 얼굴이나 말투는 어린애 같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다음에 함세, 다음에. 자, 나는 가볼 테니 다른 사람이랑 놀게나.”


두두리를 뒤로하고 얼른 고갯길을 넘으려 하는데 아무리 걸어도 내리막길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데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두두리가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놈의 도깨비, 씨름을 안 하면 안 보내줄 셈이군.


“이보게 두두리, 내가 집에 편찮으신 노모가 계시다네. 내가 나이를 이렇게 먹었어도 밖에서 자빠져서 무릎만 깨고 들어와도 눈물이 글썽해지시는데 씨름은 못 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살림인데 며칠 일이라도 쉬게 되면 어쩌겠나.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봐주게. 그냥 보내줘.”


한껏 불쌍한 얼굴로 애원하자 도깨비는 좀 망설이는 얼굴이 되었다. 옳지, 조금만 더 달래면 보내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래, 이봐 두두리, 배고프지? 내가 떡이 좀 있는데 먹겠나?”

“떡이 있어?”


시무룩한 얼굴이었던 두두리는 떡 소리에 금방 눈을 반짝였다.


“혹시 메밀묵은 없어?”

“어엉, 메밀묵은 없는데.”

“메밀묵이 있으면 그거 받고 그냥 보내줄 수 있는데.”


큰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 큼지막한 손을 흔드는 두두리를 보고 장씨는 얼른 달랬다.


“오늘은 떡 조금밖에 없네. 하지만 수수떡이여. 내가 어디선가 도깨비들은 수수떡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닌가?”

“수수떡이여?”


두두리의 목소리가 조금 흥겨워졌다.


“그려, 수수떡. 메밀묵도 말이지, 내가 쒀다 주지. 내일, 내일 갖다줄게, 어떤가?”

“내일?”


두두리가 천진한 얼굴로 묻더니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왜?”

“예전에 어떤 김 서방도 그렇게 말해서 보내줬더니 다시는 안 왔구먼. 그담부턴 씨름 안 하는 사람은 안 보내주기로 했어.”

“아니, 난 약속 꼭 지킬 걸세. 자, 우선 떡 좀 먹어보게.”


장씨는 얼른 보퉁이를 풀어서 수수떡을 꺼냈다.

두두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수수떡을 집었다. 얼마 안 되는 양이라 금방 다 먹어 치웠다.


“내가 내일 꼭 올 테니까 보내주게. 애들 주려고 산 수수떡도 자네 다 줬잖은가.”

“애기들 주려고 샀던 거여?”


두두리는 커다란 눈을 끔벅끔벅 굴리더니 한참 만에 말했다.


“그럼 가 봐, 김 서방, 아니 장 서방이라고 했나. 메밀묵 내일 꼭 갖다줘. 약조한 거여.”


장씨는 두두리의 마음이 변할까 봐 말이 떨어지자마자 구르듯이 고개를 내려왔다.


허이고, 큰일 날 뻔했다. 도깨비가 사람을 크게 해치진 않는다지만 밤새 씨름하다 골병이라도 들었으면 어쩔 뻔했어. 천만다행이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초가집에 들어선 장씨는 장터에서 떡 한 조각 안 사 왔다고 울먹거리는 아이들을 달래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눈을 뜬 장씨가 오전 내내 방에서 나오질 않자 이상하게 여긴 아내가 물었다.


“여보, 왜 그래요? 아침부터 방구석에서 움직이질 않고. 어디 아파요?”

“아니여. 내가 고민할 게 좀 있어서.”


장씨는 아침부터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이었다. 전날 급한 대로 도깨비에게 메밀묵을 갖다주겠다고 하고 빠져나오긴 했지만 정말 메밀묵을 갖다줘야 할까.

도깨비를 다시 볼 생각을 하니 은근히 무섭기도 했다. 그 고갯길을 다시 안 지나가면 되지 않을까?


한참 이리저리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하던 그는 큰맘 먹고 부엌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보, 메밀묵 좀 쒀 주구려.”

“갑자기 메밀묵은 왜요?”

“내가 좀 쓸 데가 있어서 그려.”

“집에 지금 메밀이 없는데.”

“없으면 삼돌이네에서 조금만 꾸어 와서 쒀 줘. 내가 오늘 꼭 쓸 데가 있어서 그려.”


아내는 갑자기 웬 메밀묵이냐고 구시렁거리면서도 순순히 이웃집에서 메밀을 꾸어 와서 메밀묵을 쑤어 줬다.


해가 떨어진 후 장씨는 메밀묵을 들고 고갯길로 올라갔다.


“두두리, 이봐, 두두리!”

“장씨 김 서방, 정말 왔네!”


두두리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숲속에서 나왔다.


“장 서방이라니까, 장씨 김 서방은 또 뭔가? 자, 약조했던 메밀묵일세.”


큼직한 입으로 벙글벙글 웃으며 메밀묵을 꿀떡꿀떡 잘도 먹는 두두리를 보니까 장씨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자, 그럼 난 가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는 장씨의 옷자락을 두두리가 붙잡았다.


“잠깐만.”

“엉? 왜?”


도깨비가 붙잡는 바람에 흠칫 놀란 장씨가 주춤거리자 두두리가 웃었다.


“장씨 김 서방, 어제는 애기들 먹을 수수떡을 주고, 오늘은 메밀묵도 갖다줬으니 나도 그냥 입을 닦을 수는 없지.”


두두리는 허리에 차고 있던 육모방망이 같은 나무방망이를 뽑더니 땅바닥에 툭 쳤다.

마치 옛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구슬만 한 은덩이가 한 줌이나 두두둑 떨어졌다.


“자, 이거 가져가서 애기들 떡도 사주고 메밀도 사고 그러게나.”


아니 수수나 메밀을 살 돈푼이 아니잖아. 기와집도 사고 밭도 사겠는데?


“이거 그대로 가져가면 어중이떠중이가 달려들지도 모르니까.”


두두리는 허리춤에서 뭔가를 또 꺼냈다.

말총으로 짠 감투였다.


“여기다 담아 가게.”


감투에 은덩이를 주워 담자 은덩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빈 감투로 보였다.


“여기다 뭘 담으면 안에 뭐가 있는지 안 보이게 되니까 잘 보관하고 조금씩 꺼내 써. 이제 가보게 장씨 김 서방, 내가 가끔 집에 놀러 가겠네.”


작가의말

오늘은 오후 8시 50분경 한 편 더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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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5. 맥적(1) +8 24.06.10 451 38 12쪽
41 24. 고종 냉면(3) +6 24.06.09 456 34 12쪽
40 24. 고종 냉면(2) +6 24.06.08 457 38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458 35 11쪽
38 23. 향설고 +5 24.06.06 464 41 12쪽
37 22. 몽중시(夢中市)(2) +4 24.06.05 466 41 13쪽
36 22. 몽중시(夢中市)(1) +5 24.06.04 475 40 12쪽
35 21. 나미와 미미(2) +7 24.06.03 476 40 11쪽
34 21. 나미와 미미(1) +5 24.06.02 475 39 12쪽
33 20. 경성 오므라이스(3) +6 24.06.01 485 46 11쪽
32 20. 경성 오므라이스(2) +6 24.05.31 485 41 12쪽
31 20. 경성 오므라이스(1) +5 24.05.30 484 37 12쪽
30 19. 연잎밥 +7 24.05.29 485 42 12쪽
29 18. 연저육찜 +7 24.05.28 508 4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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